딱히 여행기는 아닌..
2017년 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아 구글 포토를 뒤져본다. 혹시나 해서 캘린더도 찾아본다. 퇴근하고 영어 학원도 가고, 영화도 보고, 주말에는 미용실 예약까지. 지금 보니 참 새삼스러운 소소한 일정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눈에 띈 ‘4월 30일, 김포공항 출발’.
2017년 4월의 마지막 날, 나이 서른이 넘어 난생처음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노동절과 어린이날을 끼고 긴 휴가가 가능했던 기간이었을 거다. 같이 갔던 친구와 여행 계획하는 내내 차마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조심스레 고백했다. 제주도는 처음 가 본다고. “나도 처음인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집순이이자 극 내향인인 나보다 친구나 지인도 많고 여기저기 여행도 더 많이 했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히 제주도도 가봤을 줄 알았는데. 그 나이 먹도록 뭐 하고 산 것인지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뭐 대단히 열심히 산 것도 아닌데.
우리는 각자 일정에 맞추어 서울에서 각자 출발하여 제주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도착하여 혼자 바닷가 산책을 하고 있던 친구와 합류 후 본격적인 제주도 관광이 시작되었다. 서로의 여행 스타일은 조금 달랐지만, 둘 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주로 주변 지인이나 여행 블로그 따위에서 추천하는 관광지 위주로 돌아다녔다. 친구는 가능하면 남들이 많이 가는 주요 관광지에서 엄청난 셀카를 남겨야 하는 편이었고,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날그날 한 군데 정도 목적지를 정해놓고 나머지 시간에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다소 지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 덕분에 혼자라면 가지 않았을 관광지도 가보고, SNS에 올리기 좋은 인증샷도 찍고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해야 할 때는 서로 스타일이 잘 맞아야 한다고도 하는데, 서로 편한 사이라면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친구도 좀 더 움직이라고 보채지 않았고, 나도 친구의 템포에 크게 불만 없이 평소보다는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보려고 노력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였다.
3일째 되던 날 오설록 티 뮤지엄에서 다도 수업을 함께 듣고, 하루 먼저 휴가가 끝나는 친구와 헤어졌다. 오설록 앞에서 친구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나는 에어비앤비를 예약한 제주 시내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까지, 휴가 마지막 날 하루는 혼자서 여행할 수 있었다.
제주도가 고향인 지인이 페이스북을 보더니 (그래, 그때는 페북을 했었지…) 메시지를 보내 금능 해변을 추천해 주었다. 시내에서 서쪽 해변으로 이동해서 금능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주도는 버스가 참 어렵다. 같은 번호를 달고 있어도 행선지에 따라 노선이 전혀 다른 경우가 많아, 여러 번 확인하고도 잘못 타기 일쑤다. 웬 어리바리한 처자가 노선도 앞에 한참 서 있는 것을 본 한 어르신이 어디 가려고 하냐고 물어보셨다. 금능 간다고 하니 어르신도 금능 가신다고, 내가 타는 거 타면 된다고 하셔서 무사히 맞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금능 해변에 도착해 골목길 사이사이를 걷다 보니 집집마다 동네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직접 쓴 것 같은 시가 걸려있었다. 마을 공동체에서 진행한 어떤 프로그램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잡았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시 두 편이었는데, 하나는 바빠서 안 놀아준다는 것이고 하나는 피곤해서 안 놀아준다는 것이었다. 각자의 사정으로 자주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에 대한 원망이라기보다는, 약간 측은해하는 마음이 왠지 귀엽기도 했다. 평범한 시골 동네 산책에서 느낄 수 있는 사소하지만 쏠쏠한 재미라고나 할까. 한참 골목 구경을 하다 해넘이를 볼 수 있었다.
다음날 서울로 출발하기 전, 가볼 만한 곳이 없을까 검색해 보다 아침 일찍 도립미술관을 들렀다. 마침 ‘4.3 미술 아카이브 전’을 하고 있었는데, ‘기억 투쟁 30년’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었다. 역사에서 묻혀버린 국가의 잔인성과 잊혀서는 안 되는 비극을 알리고자 하는 처절함이 느껴졌다. 짧지만 나름 알찬 ‘혼자 여행'을 해봤다는 뿌듯함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도 않지만, 나이 들어서 하는 여행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각자의 인생을 살다 잠시 함께하기도 하고, 다시 각자의 길을 걷고, 또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번 주말에는 그 친구의 결혼식에 간다. 일이든 여행이든 뭐든지 열심히 하는 열정과 배려심을 갖춘 그녀와, 듬직한 그녀의 보살핌(?)을 받게 될 연하의 예비 신랑에게 축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