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한강
구글에 소설책을 검색해 보니 상위에 있는 책 중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 두 권이 눈에 들어온다. 검색된 목록 중 읽어본 책이 단 두 권인 것이다. 그만큼 소설이라는 장르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뉴스로 떠들썩하던 때 한강이라는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인지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두 권을 샀다. 한강과 함께 현지 번역 작가도 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어떤 내용이 어떻게 쓰였기에 타국의 언어로도 그 메시지가 잘 전달이 될 수 있었는지 호기심이 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이후로 ‘흰', ‘검은 사슴', ‘작별하지 않는다' 등 책방에서 한강 작가의 책을 발견할 때마다 한 권씩 사 왔다. 한때 유행했던 말로 ‘믿고 보는', 그 이름만 보고도 집어 들게 되는 소설가가 나에게도 생겼다는 사실에 왠지 뿌듯하기도 했다. 어쩌면 한강은 나에게 소설의 매력을 알게 해 준 작가라고 할까.
특히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처럼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참혹한 사건을 다루는 한강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대치의 악, 잔인하다는 말도 부족한 끔찍한 폭력과 공포를 직접 겪어낸 어떤 이의 놀라우리만치 차분하고 담담한 증언을 듣는 것 같다. 가끔은 다소 냉정하기까지 한 표현 방식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주말에는 동네 영화관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를 봤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와 담장을 맞대고 있는 소장 사택, 그곳에서 살고 있는 나치 장교와 그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장 부인이 정성을 다해 가꾸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그들은 누구보다 평화롭게 피크닉을 즐긴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지극히 평범하고 행복한 가족의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결코 당연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란하고 따뜻한 가족의 모습 뒤로 이따금 짧은 폭발음과 공포에 질린 듯한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소장 부인은 멀리서 여행 온 친정엄마에게 정원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꽃을 자랑하면서, 담장 너머의 수용소가 보이지 않게 포도 넝쿨을 심었다고 말한다. 바로 건너편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참극은 그들에게는 그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영화는 유대인 포로들이 겪는 고통, 매 순간 죽어 나가는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저 멀리 들릴 듯 말 듯한 총성과 비명이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살인, 공포를 담고 공기처럼 흘러올 뿐이다.
노골적이거나 잔인한 장면 하나 없이,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소름 끼치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건조하게 보여주는 영화의 표현 방식은 한강의 그것과 어딘가 닮아있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도 유명하다는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만들어낸 깔끔하고 유려한 화면과 한강의 차갑고 단정한 문장들은, 다른 어떤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표현보다 훨씬 더 뾰족하고 날카롭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게 일깨워주는 예술가들의 재능에 새삼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