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행의 기록 #1
여행을 숙제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치밀하게 동선을 짜고 시간대별로 일정을 계획하고. 준비물과 교통편, 비용 등을 스프레드시트에 꼼꼼하게 정리하고 연신 확인한다. 스스로에게, 또 일행에게 거대한 숙제를 부여하고, 하나라도 수행하지 못하면 여행 전체를 망치기라도 한 듯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의 경우는 정확히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결정하는 것부터 그렇게 즉흥적이고 대책 없을 수가 없다. 작년에 이래저래 회사 일 때문에 휴가를 못 간 것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기필코 해외여행을 가겠노라 마음먹었지만, 실업자 신분으로 멀리 가기는 불안해서 또 일본으로 정했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일본 여행이라면 혼자 또는 여럿이, 짧게 혹은 길게 너덧 번은 다녀온 것 같다.
무작정 구글 항공편 검색에서 이렇게 저렇게 가는 날과 오는 날 가장 저렴한 날짜를 찾다 어쩌다 보니 10박 11일 도쿄행이 되었다. 예전에 아는 언니와도 한 번 다녀왔고, 그때 웬만한 관광지도 다 가보지 않았나 싶은 도쿄지만, 명절 연휴 지나서 비수기에 여유롭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예약했다. 날짜가 길어질수록 그만큼 숙박비도 늘어나고 식비와 현지 교통비 등등 각종 경비도 늘어난다는 당연한 진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에이 모르겠다. 어쨌든 와버렸다. 여느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처럼 가나마치 역 스타벅스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출발하는 날(9월 20일 금요일)에는 인천공항 활주로에 비가 많이 와서 좁디좁은 에어부산 이코노미석에 앉은 채로 한 시간 넘게 대기해야 했다. 수 시간 찌그러져 있던 육신을 겨우 펴고 나리타공항에 도착해서는 또 길고 긴 입국심사 대기열에 합류했다. Visit Japan 사이트를 통해 입국 신고서와 세관 신고서는 온라인으로 미리 작성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참 줄을 서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늦은 저녁 시간임을 고려해도 너무나 적은 직원이 나와 있던 탓인지, 꼬불꼬불 이어진 끝을 알 수 없는 줄 가운데 적어도 한두 시간은 서 있던 것 같다. 이러다 나리타 귀신 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겨운 시간이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로 꽉 차는, 흡사 고시원 단칸방을 연상케 하는 작은 숙소에는 결국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피로가 몰려오면서도 여행 첫날의 설렘 때문인지 쉽게 잠이 들지 못했음에도, 다음날 (9월 21일 토요일) 아침에는 여섯 시도 되지 않아 눈이 떠졌다. 내가 아무리 무계획이지만, 아무것도 안 찾아보지는 않는다. 나름 구글맵에 저장해 두었던 장소 중 그때그때 현재 위치에서 가까운 순으로 이동하면서 반쯤은 즉흥적인 여행을 이어 나갈… 뻔했으나 토요일이라 어디를 가도 줄을 서 있고 사람도 너무 많고, 급 피로가 몰려와 오후 세 시를 조금 넘겨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오늘(9월 22일 일요일)도 아침 일찍 일어나 계획한 일들을 하나씩 수행하고 싶었지만, 이틀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는지 열 시 넘어서 겨우 침대를 벗어났다. 좁은 숙소에서 글을 쓰기는 싫어서 가까운 스타벅스를 검색해 보니 가장 가까운 지점이 전철로 30분 거리다. 그래도 와이파이 걱정이 그나마 덜한 곳이 스벅이라 바리바리 싸 들고 나와, 남들 점심 먹을 때가 다 되어서야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폈다. 무려 일요일, 이 시간에 여유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스타벅스가 도쿄에도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사실 서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데 말이다. 새삼 커피가 맛이 없다. 소시지빵은 맛있다.
아직 시간도 많고 갈 곳도 많다. 월요일인 내일부터는 주말이라면 꿈도 못 꿀 관광지와 커피 맛집 등을 탐험하며 본격적인 여행을 즐겨보아야겠다. 어제는 긴자에 있는 츠타야 서점에서 무지 공책을 한 권 샀다. 각종 티켓과 영수증, 카페에서 받은 컵 노트 등을 마스킹테이프 죽죽 찢어가며 덕지덕지 붙여본다. 이런 방식의 여행 스크랩북(?)도 난생처음 만들어본다.
이러면 어떨까. 올해의 마지막 분기는 이제껏 안 해 본 일들을 하나씩 해보는 거다. 이상하다. 분명 노는데 숙제가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