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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응 Apr 30. 2017

네가 사는 그곳,

에어비앤비에서 워커웨이까지.. 집과 사람을 찾아 다니는 여행

불가리아 말 농장의 우리집,  돼지 가족의 알람 시간


그날의 집 

 눈 내리는 4월의 불가리아, 우리는 수도인 소피아에서 차로 40분 떨어진 말 농장의 카라반에서 살고 있다. 캐라반이라고 해서 럭셔리한 캠핑카를 상상하면 오산! 우리의 캐라반은 물도 전기도 없는 그야말로 잠을 위한 생존의 공간이다. 이 곳이 우리의 집이 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이른 아침이면 40여 마리의 돼지 가족들이 가려운 몸을 캐라반에 비벼대며 우리를 깨운다. 그들이 몰려오는 소리와 냄새, 흔들림이 이젠 우리의 알람이 되었다. 처음엔 누가 볼까 주저주저하던 우리는 이제 밤마다 훌렁훌렁 볼일을 잘도 해결한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돼지 가족이 우리의 흔적은 갈아엎어주니 환상의 호흡이라 할 수 있겠다.

 

 아침이 되면 우리는 야외 테이블로 모인다. 거기가 바로 그날의 주방이고 식탁이다. 4월에도 눈이 내리는 이런 날에는 누군가 대형 캠핑카 안 나무 난로를 태우기 시작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지글지글 난로 위에서 요리를 시작한다. 우리의 식사에 정해진 메뉴, 인원 따위는 없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있는 것들로 요리를 하고 테이블에 앉은 누구나 양껏 나눠먹는다. 사람이 모인 곳이 그날의 집이 되는 이곳이 지금 우리의 집이다. 


집으로 가는 멀고도 험난한 길, 우리집은 어디에
우리의 이사

 우리가 한국을 떠나 이렇게 살게 된지도 어느덧 5개월이 훌쩍 지났다. 우리는 각자 떠난 배낭여행에서 서로를 만났고 여행하듯 장거리 연애를 하다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한 지 2년이 되던 해, 7년 간의 회사생활을 접고 여행을 시작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베트남, 라오스, 태국을 거쳐 터키에서 불가리아까지... 각자 20킬로그램 정도의 이삿짐을 짊어지고 나라, 도시, 형태가 다른 집으로 이사를 반복했다. 우리는 유명 관광지, 맛집 대신 집을 찾아 여행을 한다. 에어비앤비와 워커웨이를 통해 우리가 살집을 찾고 동네 맛집을 스스로 찾아낸다. 시간이 되면 유명 관광지를 돌아보기도 하지만 관광지에서의 감흥보다 집에 돌아왔을 때의 편안함을 우리는 더 즐긴다. 'oo호텔'하고 번듯한 이름이 있으면 좋으련만 교외의 작은 아파트, 산골의 농장 등 매번 주소지까지 찾아가는데 애를 먹는다. 하지만 집주인이 집 열쇠를 건네주는 순간이 찾아오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배경음악이 울려 퍼진다. '당신은 이곳에 머물 자격이 있다. 우리는 당신을 신뢰한다' 반지 원정대가 반지를 건네받은 것 같은 뿌뜻함과 사명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행하며 많은 호스트를 만났다. 결혼이 하고 싶은 말레이시아 도시 청년 Nova, 1인분의 밥으로 가족 모두를 챙겨야 했던 스리랑카의 가장 Azith, 우리의 3끼 식사를 챙겨주던 순수한 터키의 대학생 Mustapa, 동물을 돌보면서 사는 게 꿈인 게이 히피 청년 Freddy 등... 단순히 공간을 함께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요리를 하고 먹으며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들의 집에서 딸의 상견례를 위해 옷을 사야 했지만 돈이 부족한 어머니의 슬픔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바닷가에 혼자서 식당을 만들어가는 청년의 꿈을 보기도 했다. 

사랑하는 스리랑카 가족, 코리안 바베큐 만들던 날
그곳, 우리의 집

 여행을 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집도 생겼다. 스리랑카 발라피티아에 있는 Passindu과일가게, 우리의 인연은 코코넛에서 시작됐다. 우리는 스리랑카의 노란 코코넛에 한창 빠져있었다. 달콤한 물을 마시고 나서 귀퉁이를 잘라 숟가락을 만들고 반을 턱 잘라 속을 파먹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당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유일한 과일가게였던 그곳에 매일 들러 코코넛을 먹었다. 떠듬떠듬 스리랑카 언어를 하며 능숙하게 코코넛을 먹는 우리가 과일가게 부부는 귀여웠나 보다. 3일째가 되던 날 그들은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까지 모여사는 17명 대가족의 집은 낡고 좁았다. 어두운 재래식 주방에 화장실도 밖에 있는 옛날 집이었다. 하지만 그 안은 따뜻한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우리 여행에서 가장 따뜻한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그날 우리는 부모, 자식이 되었다.  


 그 후 우리는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10일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아빠는 "우리는 대가족이라 매일 17인분의 밥을 한다. 너희 2명분의 밥을 더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부담을 갖지 말라"며 조건 없이 자신의 집에 머물기를 권했다. 막내딸인 Menit은 자신의 방을 기꺼이 우리에게 내주었다. 우리는 매일 함께 밥을 해 먹고 가게일을 돕고 밤마다 작은 파티를 열기도 했다. 좁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가족 모두는 내가 부르는 어설픈 스리랑카 동요를 참 좋아했다. 우리가 떠나기 며칠 전, 가족 모두와 우리는 서로 눈만 마주치면 눈물을 글썽거렸다. 스리랑카 아빠, 엄마는 "너희는 우리 마음으로 낳은 아들, 딸이다"라며 꼭 안아주었고 우리는 큰절을 했다. 남편은 성인인 된 후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울었다고 했다. 그곳을 떠난 후 우리는 한동안 한국의 고향집만큼 그 집을 참 그리워했다. 


불가리아 캠핑장의 2층집, 행복에 좋은 집이 필요하나요?
집, 그리고 사람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말 농장 이전에 우리는 교외의 유럽풍 2층 집에서 머물렀다. 거실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있고 잘 갖춰진 유럽식 주방에 정원에는 커다란 과일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집이었다. 집주인은 10년 전 이곳으로 이주한 영국인과 일본인 부부로 작년부터 자신의 정원을 캠핑장으로 운영하고 하고 있었다. 우리는 캠핑장 일을 도우며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일을 하고 잠자리를 제공받는 워커웨이를 하면서 이렇게 좋은 집에 머물거라 기대하지 못했던 우리는 환호했다. 정원 가꾸기, 집수리, 요리, 아이 돌보기 등을 하면서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넓은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그들의 딸을 보며 이렇게 살 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가족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아내 케이코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우리 앞에서 소리 내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케이코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그녀는 우리에게 미안하다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한 그들은 2007년, 유럽의 전역을 돌아다니다 이곳에 와 정착했다고 했다. 낡은 옛날 집이었던 지금의 집을 사고 하나하나 직접 고치며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나갔다. 집을 고치기 시작하면서 남편 Matt는 오로지 집에만 몰두했다. 그녀와의 대화도 줄고 아이와 놀아주는 일도 없었다. 케이코는 그런 남편에게 불만을 호소했지만 '다 우리를 위한 거다'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집이 다 완성되었을 때 멋진 집만 있을 뿐 그 안에 행복한 가족은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집에 머무는 내내 안타까움과 불편함을 느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집도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떠난 다음 날 케이코는 그 집을 떠났다.  

 

치앙다오 히피 축제, 모두를 위한 모두의 집
네가 사는 그곳  

 신혼 초 우리도 우리만의 집에 대한 환상이 참 많았었다. 매일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예쁜 집들의 사진을 모으고 되지도 않는 조감도를 그리며 둘이 행복해했다. 그리고 결혼 전 힘들게 모은 적금을 깨 낡은 아파트의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 달리 우리의 신혼집은 지인을 너무 믿어버린 탓에 슬픔과 배신, 아쉬움의 공간으로 전락해버렸다. 

 이사 뒤 다가온 남편의 첫 생일에 '호텔 숙박권'을 선물할 정도로 우리는 그 집을 미워했었다. 집에 머무는 동안 지인에 대한 배신감에 자꾸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가구 장식품, 액자 등을 동원해 잘못된 공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몸과 마음으로 그 집에 적응하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직장을 관두고 퇴직금을 털어 여행을 결심했을 때 집을 떠나는 것이 시원하기도 하고 그동안 미워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불가리아 캠핑장을 떠나는 버스에서 우리는 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머물렀던 수많은 집들이 스쳐 지나갔다. 때론 슬프고 때론 행복하고 또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해냈다. 좁고 낡았지만 행복했던 스리랑카의 집과 아름답지만 불편하기만 했던 불가리아의 집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집은 결국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살고 싶은 집, 좋은 집은 공간이 아닌 그 안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걸을 말이다. 우리는 지금 집을 찾아, 또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찾아 여행을 하고 있다. 

 나는 우리의 집을 떠올렸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우리 집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 밖으로 스치는 많은 집을 바라보며, 우리 집에서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 남편과 나눠먹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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