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타 루스타벨리,리버티 스퀘어,올드 트빌리시,성 게오르기우스,푸쉬킨
2016년 첫 조지아 방문에서 원래 트빌리시는 계획에 없었다. 하하. 사실은 수도가 트빌리시인 것도 몰랐다. 바투미 사진축제 측에서 제공받은 항공권이 이스탄불 경유 바투미 인, 아웃이기도 했고 조지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찾아볼 정신도 없었다. 그런데 바투미 사진축제의 우크라이나 친구들이 트빌리시 사진축제가 곧 열리니 함께 여행겸 가자고 하여 딸려 가게 되었다. 예약한 부킹닷컴 숙소 링크를 알려줘 나도 같은 숙소를 예약했다.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시설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아고다가 익숙해 예약했는데 조지아는 부킹닷컴이 더 선택의 폭이 넓고 저렴한 편이다. 아고다는 아무래도 동아시아에 특화되어 있는 느낌이고 사전 결재 숙소 중심이기 때문에 조지아처럼 소규모 업소에서 신용카드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고 현장에서 현금결제를 선호하는 경우는 부킹닷컴 쪽으로 몰리는 듯하다. 이런 현지인 혹은 주변 국가의 친구들이 어디를 간다고 하면 사실 별로 걱정할 필요 없이 따라가는 게 좋다. 보통 언어나, 문화적으로 이미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횡재하는 기분. 한국인 지인들과 함께하면 현지와 동화되기 어려워지고 거리감이 생기는 것과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트빌리시 여행 결정의 가장 큰 요인은 바투미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본 그림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였다. 서유럽 도시와는 왠지 다른 그렇다고 아랍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려운 다문화적인 요소들이 아름다운 비율로 섞여 있는 처음 보는 느낌의 도시였다. 나와 이란에서 온 기획자 알리를 안내했던 축제 코디네이터 마리암에게 물으니 이 곳이 바로 트빌리시 란다. 우와. 진짜? 보통 수도는 차가운 시멘트 건축물로 가득 찬 곳인고 이런 역사적인 도시는 수도에서 한참을 가야 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트빌리시는 정말 매력적인 곳이었다. 검색해 보니 중세 트빌리시 풍경을 그린 그림과 지금의 풍경이 거의 변함이 없는 듯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수도를 가진 나라라니 부러웠다. 당시에는 바투미 중심가에 기차표 예약 사무소가 있어서 도심 외곽의 역까지 나갈 필요 없이 편하게 자정에 출발하여 아침에 떨어지는 표를 구입하였다. 낡고 어두운 기차역과는 어울리지 않은 서유럽에서 온 미래적인 디자인의 고급스러운 2층 기차였고 심지어 무료 Wifi도 제공했다.
트빌리시 Tbilisi /티플리스 Tiflis
코카서스 남쪽 조지아의 수도?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 동방정교회? 구소련연방 몰락의 유산이자 1991년 독립한 국가? 조지아 와인? 이 정도가 가장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지아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조금 더 국제 정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압하지아 분쟁과 개봉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할리우드 영화 5 Days War의 오세티야 전쟁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암튼 그곳의 수도. 스탄으로 끝나는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들과 비슷한 나라쯤으로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무려 50개 민족이 살고 있는 코카서스 지방은 수많은 제국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았고 12세기에 이르러 지금의 조지아로 불릴 수 있는 통일왕조가 탄생하였다. 그 전에는 작은 규모의 공국 수준의 국가들이 짧게 존재하다가 사라지고 제국에 합병되는 과정을 수 없이 격었다. 통일 조지아를 형성하였던 황금기 Golden Age의 역사는 아쉽게도 1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뒤에도 몽골, 티무르, 오스만 투르크, 제정 러시아, 소련연방에 합병되어 지속적으로 외세의 지배를 받는다. 1121년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이 끝나고 수도를 드디어 트빌리시로 천도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조지아의 황금시대 Golden Age -조지아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렸다. 1236년 수부타이의 몽골군이 침략하기 전에 이미 트빌리시는 1226년부터 이슬람 화레즘 제국의 영향권에* 있었다. 마르코폴로**는 트빌리시를 "그림으로 그린듯이 아름답다"고 극찬하였다. 12세기 말에 트빌리시의 인구는 10만에 가까웠다. 트빌리시는 한마디로 말하면 다양성의 도시이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북쪽으로는 코카서스 산과 유목 기마 제국들의 스텝 지역이 남쪽으로는 페르시아 문명과 튀르크 문명 더 가면 바빌로니아 문명과 만난다. 흑해를 통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문명이 전해졌다. 트빌리시는 1936년 이전에는 국제적으로 티플리스 Tiflis라고 불렸다.(1936년 이전의 페르시아어, 독일어, 터키어, 러시아어 자료를 보면 Tiflis로 표기되어 있다.) 조지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수도이다. 쿠라 강 Kura River 기슭에 위치해 있으면 현재 인구는 150만에 이른다.(조지아 전체 인구 390만) 5세기 이베리아 Iberia*** 왕국 시대에 세워졌으며 역사 속에서 다양한 조지아 왕국과 공화국의 수도였다. 1801년과 1917년 사이의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남북 코카서스 전체를 다스리는 역할을 하였다. 트빌리시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 그리고 실크로드에 위치해 항상 강대국들이 서로 차지하고자 하는 지리적, 상업적 그리고 군사적 요충지였다. 트빌리시의 다양한 양식이(중세, 신고전주의, 아르누보, 보자르, 스탈리니스트) 혼재된 건축유산들은 이러한 트빌리시의 역사를 대변한다. 또한 아랍, 그리스 로마와 아시아의 영향도 함께 느낄 수 있다. 루스타벨리와 원도심을 가볍게 걸으면서 건축물만 탐구해도 즐겁다. 그리고 소비에트 시절의 감정이 배제된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 폐허 그리고 버스 정류장이 남아 있다. 심지어 사진작가들의 작품집이 나올 정도이다. 동방 정교회의 성당, 사메바, 시오니 성당과 자유광장, 루스타벨리 그리고 나리칼라 요새, 오페라 극장, 조지아 국립박물관, 조지아 미술관은 꼭 방문해야 한다. 건축과 함께 공공 조각도 함께 발달하여 곳곳에서 멋진 조각****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파브리카에서 주관하는 원도심 건축 워킹투어에 참가해도 좋을 듯하다. 니체의 오래된 건축물에 대한 글을 인용해 본다. 트빌리시의 건축을 볼때 느껴지는 감정을 대변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완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속자이자 꽃이자 열매로서 성장해왔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
-니체
*화레즘의 트빌리시 지배에 관한 부분은 좀더 사실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직접적인 식민통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마르코폴로(1254~1324)의 여행은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이다. 길위에서 7년, 원나라에서 17년을 보냈다.
***스페인/포르뚜갈의 이베리아와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어 연관성에 대해 궁금할 수 있다. 실제로 논란이 많다. 조지아인 스스로 이베리안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두 곳 모두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 원주민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 아니다. 그리스 문명의 지중해 연안 스트립 진출과 관련되 보이지만 직접적인 두 개의 연관성을 말하기 어렵다. 단 두개의 지역에 그리스인들이 진출해 처음으로 이름이 지어지고 원주민 그룹에 의해 발전된 경우로 봐야할 것 같다. 두곳 모두 광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명성이 있었으며 Oikouméne 한계선에 위치해 있다. 고대 그리스 용어인 'Oikouméne 한계선'은 거주하거나 혹은 거주 가능한 세계를 말한다.(로마 제국 시대에는 세속적이거나 종교적 황제의 문명을 나타냈다.) 두 개의 지역은 스페인의 바스크인들과도 연관되어 있다. 바스크어와 조지아어와의 연관성을 추측하는 가설 때문이다. 이베리아 뿐만 아니라 두 개의 지역을 부르던 Thubal 이라는 이름도 있다. Thubal은 야벳Japeth의 아들에서 유래한 히브리 민족이다. 고대 이스라엘 지도에 두 지역 모두 Thubal이라 표기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의 인도-유럽어족 이동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그러나 지금의 조지아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폰틱 스텝 문화Pontic steppe(얌나야Yamnaya, 마이콥Maikob문화)의 이베리아 반도 진출을 의미한다.
****트빌리시의 공공조각만을 다룬 가이드북이 따로 있을 정도.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157페이지에서 재인용
루스타벨리 대로 Rustaveli Avenue와 국민시인 쇼타 루스타벨리 그리고 '호랑이 가죽을 두른 용사'
트빌리시에 도착하며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보통 트빌리시 센트랄 기차역일 것이다. 37번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와면 이곳에서 내리거나 거치게 된다.(트빌리시의 공항의 이름은 쇼타 루스타벨리 인터내셔널 에어포트이다.) 기차역에서 리버티 스퀘어가 있는 시청으로 가는 대로의 이름이 쇼타 루스타벨리(카버 흑백사진과 우측)이고 시청 좌측으로 원도심의 골목이 이어진다. 한국으로 치자면 광화문 앞의 세종대로인 셈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수도 공항의 이름이 누군가의 이름을 기린다면 가장 중요한 심장에 위치한 대로의 이름이 누군가의 이름으로부터 왔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게 좋다. 대한민국에 왔다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쇼타 루스타벨리는 조지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국민 시인이다.
조지아 르네상스 시대인 12세기의 대표 서사시 '호랑이 가죽을 두른 용사 ვეფხისტყაოსანი The Knight in the Panther's Skin '를 썼다.(아랍왕자의 모험이야기이다.) 무려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수민족인 오세티야계 조지아(당시 그루지아) 출신인 스탈린(본명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 이오시프를 영어식 표기로 하면 조지프가 된다. 어릴 때는 소소 Soso라고 불렸고 혁명 동지들은 코바라는 애칭을 사용했다. 알렉크산드레 카즈베기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ყაზბეგი의 소설 '아버지 살인მამის მკვლელი'의 주인공 코바კობა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이 슬라브인 중심의 거대한 구소련연방의 위대한 지도자 자리까지 올라서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정적인 트로츠키에 의해 야만인 오세트족이라는 공격을 많이 받았다. (물론 오세트인에 대한 슬라브인의 야만으로 보는 반감을 이해는 하지만 황금기 조지아의 왕실은 당시 알란왕국과의 혼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왔다. 타마라 여왕의 남편이 알란왕국 왕자 출신의 다비드 소슬란이다. 알란왕국은 흉노의 침략으로 남하하였으며 지금 오세트인의 조상이다. 지속적으로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받았던 슬라브 민족으로서 마치 우리가 오랑캐라고 국경 너머의 민족에 대한 편견을 갖은 것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해는 하나 오세트공화국의 전신인 알란왕국의 알란인은 엄연히 야만인이 아니다. 대등한 문명이었다. 알란인의 조상은 사마르티안이며 사마르티안의 조상은 스키타이인이다. 스키타이인들이 앗시리아를 정벌할때 오세티아 지역을 통해 진출하였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스탈린에게 시베리아 초원은 낯선곳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조상의 영토이다. 그래서 짜르 푸틴에게 남오세티아는 양보할 수 없는 영토이다. 시베리아 영토 운영의 역사적 정당성을 위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날의 남오세티아 침공은 필연적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출신성분이 조지아인의 문화유산인 '호랑이 가죽을 두른 용사'를 전 소련 인민의 시로 만든 이유였을 것이다. 야만인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조지아인의 문화적 우수성을 전 연방에 알리는 수단이 된 것이다. 원래 스탈린은 시인을 꿈꾸며 문학을 사랑하던 청년예술가였다.
조지아의 서사시를 소련연방 인민 전체가 가장 사랑하는 문학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조지아어->러시아어 번역을 지휘했다. 러시아어로 번역이 완료된 이 위대한 서사시는 소비에트 전역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암송하였다. 아마도 1991년도 이전에 구소련 연방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한 구절 정도는 최소한 암송할 수 있을 것이다. 트빌리시 외에도 우크라이나를 비롯 구소련 연방국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로가 있다. 이 시는 황금기 조지아 왕국의 위대한 군주인 타마라 여왕과 다비드 대왕에게 바쳐진 영웅 서사시이다.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 Homeros/Homer(B.C. 800? ~ B.C. 750)의 전쟁 서사시 일리아드 Illiad와도 공통점이 많다. 시간이 된다면 인류 공통의 기록문화유산인 이 세 서사시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면 참 좋을듯하다.
다시 루스타벨리 대로로 돌아와 이야기를 해보자면 트빌리시에 갈 때마다 숙소를 인근으로 잡아 매일 이 길을 걸어본다. 미술관, 성당, 박물관, 원도심 거리 등이 위치해 있기도 하고 주로 현지인들이 가는 괜찮은 카페들도 많다. 갤러리아 백화점도 2018년에 생겼고 기념품 가게, 어학원들도 있다. 특이한 것은 오래된 중고 책들을 파는 길거리 상인들이 이 길에 많다. 이런 중심가에서 웬 중고책? 조지아 문자로 된 책들이 대부분이라 아쉽게도 읽을 방법이 없다. 국회의사당과 시청 앞에서는 시위가 자주 열린다. 2018년에는 정교회 수사들의 반마리화나 시위도 열렸다. 조지아는 마리화나가 합법화되어 종교계에서 큰 반발을 했다. 과거 세바르드나제를 축출한 민주화 시위도(장미혁명, 2003년) 이 곳에서 열렸고 2019년 연말에도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시끌했다. 이 길엔 관광객들이 꾸준히 있지만 원도심 여행자 거리처럼 북적이는 정도는 아니다. 여행자들에게 이곳은 한두 시간 지나쳐가는 곳이다.
자유광장 თავისუფლების მოედანი Freedom Square/Liberty Square
루스타벨리 차도(대로)를 동쪽 끝까지 걸어가면 자유광장이 나오고 그곳에는 원조 '차도'남(아재개그) 성 게오르기우스의 번쩍이는 황금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조지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조각상을 자세히 보면 긴 창을 들고 용감하게 용을 무찌르고 있는 장면임을 알 수 있다. 남오세티야 전쟁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 5 Days War를 보면 조지아 군인이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주인공에게 성 게오르기우스의 펜던트(?)를 선물하여 마지막까지 주인공을 살아남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 게오르기우스에서 조지아 국명의 어원을 찾으려고 하지만 요즘에는 학계에서 부정되며 페르시아 시대의 지명인 고르간(Gorgan)에서 왔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말의 어근인 gurğ 는 늑대를 의미한다고 한다. 뒤엔 시청이 위치해 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Erivanskskaya ploshchad라고 불렸고 소련연방 시절에는 레닌 광장 Lenin Square이었다.(소련 시절에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자리에 거대한 레닌 조각상이 위치하였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의 몰락과 함께 독립하여 처음으로 자유광장으로 이름을 붙였다.(2018년에는 조지아 공화국 성립 100주년 행사가 열렸다.)
푸쉬킨, 카잔차키스
광장의 한쪽에는 한국인에게도 사랑받는 푸쉬킨의 흉상이 위치해 있다. 트빌리시는 푸쉬킨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 곳을 방문해 '그루지아 언덕에서'라는 작품(시)을 남겼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Первая Любовь>에도 등장한다. 푸시킨은 외증조부가 아프리카 출신으로 당시로는 드문 흑백 혼혈이었다.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차드 호수가 있는 카메룬 지역 출신으로 보인다. ) 연인과 동행하는 여행자라면 그루지아 언덕 밑에서 아래의 시를 직접 낭송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루지아 언덕에 밤안개 걸려있고,
발아래 아라그바강 굽이쳐 흐르네
내 마음 서글피 가라앉아 있고
나의 슬픔 빛나, 온통 너로 가득 차 있네
너와 더불어, 너만이라도, 내 참담한 가슴이여
이제 그 무엇도 고통스럽고 심란케 하지 않으니,
내 심장 또다시 불타고 벅차오르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푸쉬킨
1829년 푸쉬킨은 조지아에 머물며 조지아 음식과 와인 그리고 유황온천에 관한 멘트를 남겼다. 그의 멘트는 오늘날 까지도 조지아 여행을 이야기할 때 자주 재인용되곤 한다. 유명한 말은 "그루지아 요리 하나하나는 한 편의 시와 같다."가 있다.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러시아 기행*'을 보면 조지아 여행기 '모스크바에서 바툼**까지'가 수록되어 있다. 콜린 윌슨은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촙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여행기를 통해 혁명 초창기의 기대와 낭만적인 이상으로 넘쳐나는 젊은 소련의 들뜬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이며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주인공의 친구가 코카서스 지역에 가서 활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버질의 친구가 캅카스 지방에서 러시아 혁명으로 처형 위기에 놓인 그리스인 이주민 50만 명들을 구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한다.*** 이 친구의 영향으로 주인공이 책상머리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 갈탄 광산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러시아 기행'에서 카잔차키스는 모스크바에서 트빌리시 행 기차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종단하며 하리코프에 도착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눈 덮인 러시아가 우리의 좌우를 지나갔다. 밀알들이 땅속에서 슬쩍슬쩍 꿈틀거리며 자라고 있었다. 육체의 양식이 될 밀과 영혼을 살찌울 또 다른 밀이. 푸슈킨, 고골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빵이다. 그리고 이제 이 기름진 땅에서 새롭게 거둔 수확물이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다. 지칠 줄 모르는 비옥한 땅, 피로 물을 대고 깊이 갈아엎은 고랑에는 이제 씨앗이 가득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푸쉬킨이 칭찬하였던 트빌리시의 유황온천에 대한 이야기는 쿠르반 사이드의 소설 '알리와 니노'에 잠깐 등장한다.(P.158) 결혼을 앞두고 트빌리시를 방문한 예비신랑인 알리에게 니노의 친척인 산드로가 마이단 지역의 유황온천에 함께 가자고 설득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어느 왕이 여기로 사냥을 왔다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꿩을 찾으러 간 매가 돌아오지를 않았다지. 그래. 왕이 직접 찾아 나섰다가 유황빛 냇물을 발견한 거야. 매와 꿩은 모두 그 물에 들어가 있었어. 그렇게 유황 온천을 발견한 왕이 티플리스를 세우게 되었지. 그러니 지금 우리는 꿩의 목욕탕에 들어와 있는 셈이야. 마이단 바깥쪽에는 이 시내가 흘러 가는 작은 숲이 있지. 티플리스는 유황과 함께 시작되었고, 결국 유황과 함께 최후를 맞을 거야.
주인공 알리는 매일 계속되는 연희로 초죽음이 된 몸을 겨우 이끌고 유황온천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금방 몸이 회복 되는 경험을 하게된다. 몸이 회복되자 연희는 유황온천의 별실에서 다시 시작된다. 아제르바이잔의 투르크계 무슬림인 알리의 눈에 의해 생경한 그 풍경은 이렇게 묘사된다. 이 묘사로 인해 그루지아의 온천이 라는 공간이 과거에는 치유와 위생을 넘어 귀족들의 사교 공간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희는 계속 커졌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포도주 병을 들고 자꾸만 합류했던 것이다. 귀족들, 귀족이 모시고 온 손님들, 온천단골들, 하인들, 현자와 시인, 산맥에서 온 영주들이 사이좋게 함께 않아 있는 모습은 그루지야 특유의 평등을 나타내는 즐거운 풍경이었다. 그곳은 온천이라기보다는 클럽, 카페, 혹은 행복한 모임장소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근심걱정 없는 눈빛으로 웃어댔다. 하지만 가끔씩 불길한 예감을 담은 심각한 얘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트빌리시에 가기 전 '그리스인 조르바'와 '러시아 기행'을 한번 책으로 접할 기회가 있다면 좋다. 당대 베스트셀러였던 그리스인 조르바는 흑백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유튜브에서 오디오 북으로 들으며 코카서스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다. 아쉽게도 1990년대 이후에는 모스크바에서 트빌리시 가는 기차를 (카잔차키스처럼) 탈 수 없다. 단선되었다. 그런데 아쉬운데로 버스는 있으니 카잔차키스의 책을 들고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에게도 이스트라티 같은 좋은 길동무가 있다면!
세계 각지의 대표적인 문인들과(모두 카잔차키스 급들이다.) 함께 한 카잔차키스의 트빌리시 여행 이후 약 90년이 지났다. 약 한세기의 세월이다. 그들의 이상이 어떻게 후대에 실현되었을까? 2018년 Forbes지는 가을에 다소 저돌적인 제목의 기사를 낸다. "Berlin Is Out, Tbilisi Is In: Georgia's Capital Is This Year's Most Exciting City." *****한 세기가 지난 트빌리시는 서유럽의 베를린을 제치고 2018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힙한 여행지가 되었다. 타임지Time는 트빌리시의 익사이팅한 스탐바 호텔Stamba Hotel을 100대 세계 최고의 공간World’s 100 Greatest Places*****로 선정했다. 이 정도면 죽기 전에 한번쯤은 가봐야 한다는 뜻이다. 고대문명의 폐허도 좋지만 미래의 유산도 봐야한다. 스탐바는 구 소비에트 시절의 거대한 인민의 빵을 생산하는 인쇄 공장(아마도 고리끼의 장편과 푸쉬킨의 시집도 생산했을)을 도시 재생하여 호텔로 만든 곳이다. 그런데 호텔에 온 느낌이 아니라 무슨 비엔날레 전시장을 온 것 같은 실험적이고 충격적인 인테리어다. 호텔이면서 문화공간이기도 하며 휴식/카페 공간이기도 하다. 단연 트빌리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니 꼭 기억할 것. 스탐바는 트빌리시 NOW이다. 스탐바는 지금 트빌리시 문화의 수준이다. 과거 코카서스 인민들을 위해 위대한 빵인 소비에트 문학을 찍어냈으며 21세기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모된 현재의 스탐바를 푸쉬킨, 스탈린(독재 이전의), 카잔차키스 젊은 세명의 문인들이 다시 방문해도 분명 사랑할 것이다.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여행기를 써보면 어떨까? 마지막 팁은 스탐바 내부에 있는 트빌리시 사진 멀티미디어 박물관******도 잊지 말것. 찾다가 길 잃어버리는 사람 많다는 사실에 주의.
* 카잔차키스는 1925년에서 1929년 사이에 세 번에 걸쳐 러시아를 초청 방문하여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1920-30년대 소련을 방문했던 문인들이 남긴 글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글로 손꼽힌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바투미는 바툼으로 압하지아의 수도 소쿠미는 소쿰으로 불렸다. 이는 러시아어와 조지아어의 언어적 특성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조지아하면 떠오르는 것은 코카소이드이지만 막상 언어(조지아어)는 인도-유럽피언 어족이 아니라 독자적인 코카시안 어족에 속한다.
***조르바와 마찬가지로 실존인물인 친구 야니스 스타브리다키스(Γιάννης Σταυριδάκης)를 모티브로 하였다. 이 친구는 러시아 기행에서도 다시 회상된다.
****희랍인 조르바 Alexis Zorbas, 1964년. 감독 마이클 카코야니스. 극 중 조르바 역은 무려 앤서니 퀸이다.
*****https://www.forbes.com/sites/breannawilson/2018/09/05/berlin-is-out-tbilisi-is-in-georgias-capital-is-this-years-most-exciting-city/#6a93bdbe479d
스탐바가(https://stambahotel.com/) 마음에 들었다면 파브리카도 방문할 것. 스탐바는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공간이지만 파브리카는 10-20대 중심의 젊은 공간이다. 물론 숙소 부분만 봐도 알 수 있다. 스탐바는 5성급 호텔이고 파브리카는 호스텔이니까. 파브리카는 원도심에서 좀 멀다. 가끔 광기(!)의 클럽파티가 열리는데 장관이다. 스탐바 앞 루스타벨리를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면 현지인들만 가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뜨고 있는 꽁꽁 숨겨진 보석같은 소규모의 힙한 바들이(주로 테이블에서 와인 마시는) 있다. 현지 친구가 있다면 졸라서 같이 가보면 좋다. 원도심의 관광객들이 바글거리는 유명한 00카페거리 가야하는거 아니냐고? 아서라. 그런곳은 피하는게 진리다. 만원지하철과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하고 관광객들이 항상 넘치는 곳에서는 인간대접 못받는다. 당신의 영혼도 위장도. 메뉴판만 봐도 딱 느낌이 온다. (명동의 외국관광객에게만 소문난 식당처럼) 뭐든지 다 되는 메뉴는 반문화적이다. (명동에 가면 짜장면, 삼계탕, 떡볶이, 회, 카레, 돈까스 따위가 다 되는 기네스급 식당이 있다는 사실. 맛이야 머 푸드코트 수준이지만 어차피 현지 음식은 처음일 관광객들은 그저 좋단다.) 문화따위는 상관없고 스템프 찍는 것이 목적인 여행이라면 GO. 가이드북은 때론 유용하다. 어디를 가면 안되는지 알려주니.
****** https://tpmm.ge/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