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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제욱 Mar 26. 2020

[조지아 기행]메스티아 사무실의
추억

스바네티의 풍경 속에서

여행지에서 죽어라고 일한 썰
일단 F11버튼을 누르고 이 글을 읽기를 바란다.(넓은 스바네티의 풍광 속에서 이 글을 읽을 수 있다.) 어찌하다보니 근 10년간은 여행 하면서 일을 항상 짊어지고 다녔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여행이 순수한(?) 여행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작업 혹은 전시나, 프로젝트, 리서치 등으로 방문한 경우였다. 실제로 프리랜서들은 주말도 없고 퇴근시간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유롭긴 하지만 직장인보다 일을 더해야 겨우 버틴다. 결과적으로는 몸은 그 곳에 가 있지만 영혼은 계속 온라인에 접속해 한국에 두고 온 혹은 짊어지고 온 업무를 지속적으로 하는 신세였다. 누군가는 팔자 좋은 인생이라 부럽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좋은 곳에 몸은 왔지만 제대로 여행에 파묻혀(?) 보지 못하는게 항상 한이다. 그런데 한편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세상이 좋아져 업무를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도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스바네티 같은 오지에서도 쓸만한 인터넷 속도가 나오고 구글 드라이브 같은 사무실과 비서를 통째로 들고 다니는 것 같은 환경을 제공해 주는 솔루션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90년대의 여행에 비하면 천지개벽이다. 그때는 여행을 하다 가는 도시마다 집에 엽서나 편지를 보내는게 고작이었다. 살아있다고. 워낙 엽서가 늦게 도착해 귀국을 해서 내가 그 엽서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이 운명을 받아 들이기도 했다. 이 여행기는 조지아의 곳곳을 다니며 그곳의 풍경을 병풍으로 한국에서의 업무를 계속한 한 작가, 기획자 혹은 프리랜서의 이야기다. 2016년에 바투미의 사진축제에 마법처럼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방문한 후 계속 기회를 엿보다 2018년도에 트빌리시의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할 기회를 얻고 운좋게 아르코의 기금까지 수혜를  받게 되어 경비를 마련하여 방문하였다. 제안서에 적어낸 작업을 진행하고 사진축제 업무, 여행을 병행했다. 그해 10월 말에 수원국제사진축제가(수원포토) 열리기 때문에 8월말-9월 셋째주까지의 조지아 출장 스케줄은 정말 한마디로 정신 나간 짓이었다. 바투미 사진축제에도 들러서 관계자들 만나고 협의도 하고 조지아 일정 이후에 수원포토 개막 이전에 공공외교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예술과 재난 팀의 네팔 프로젝트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아와 네팔일정 사이의 추석연휴에는 광주를 다녀와야 했다. 조지아-수원-광주-수원-카트만두-수원. 정말 카트만두에서 다녀온지 일주일만에 기적처럼 수원사진축제 개막식이 열렸다. 전시 마지막날 작품 철수하고 다음날 태국 스텝들을 한국에 남겨두고 6주 일정으로 대만 출장을 떠났다. 이게 과연 가능은 할까? 거의 기적같은 스케줄이었다. 한 15년 전엔가 어느 미국의 잡지사 편집장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티비에서 본 적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태평양의 어느 휴양지에서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태평양의 아름다운 바닷가의 풀빌라에서 야자수와 푸른 바다를 창밖으로 보면서 꽃무늬 셔츠를 입고 모히또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이 바꾼 이 시대의 상징이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떠밀리다 보니 나도 어떻게 보면 비슷해 졌다. 그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그런 삶에도 불구하고 월급이 잘 나왔겠지. (사장이거나) 그렇기에 주목을 받은 것일테고 말이다. 그러나 나의 예술가의 안정적이지 못한 여유와는 한참 거리가 먼 삶은 항상 불안하기만 하다. 대충 비슷한 것 만으로 만족하자.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 가는 길

원인은 모르겠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조지아 철도청 싸이트에서 카드 결재 승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전날 트빌리시 중앙역에 나가 줄을 서서 미리 표를 사 놓았다. 원도심 근처 숙소에서 10분 밖에 안걸리니 가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기차역 매표 창구의 직원이 너무 불친절해서 번호표를 뽑고 삼십분을 기다려 표를 사는게 고역이다. 트빌리시에서 유일하게 이 곳이 과거 구소련 연방 국가였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머 그렇게라도 옛 역사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 있다는 것에 긍정해야 할까? 난 정말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와 밤 중에 갑자기 동행한 P선생님이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보더니 어? 침대칸이 있네. 침대칸을 꼭 타야한다고 표를 바꿔야 한단다. 다시 기차 역에서 줄을 설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몇시간 먼저 기차역에 나가서 보니 다행이 그 기차엔 침대칸 밖에 없었다. 너무 일찍 역에 도착해 시간이 남아 투르키쉬 커피도 마시고 P선생이 어디선가 마법처럼 사온 맥주도 몇병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오래간만의 기차 침대칸이다. 어라. 기차에 오르고 내 컴파트먼트를 찾아 가면서 보니 어디선가 본 굉장히 익숙한 침대칸이었다. 1997년도 여름에 탔던 북경-모스크바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같은(콤파트먼트가) 기종의 열차였다. 20년전의 추억들이 갑자기 밀려온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는 막 신형으로 나온 현대적인 새 기차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그 신형 기차가 20년의 세월만큼 낡아 있었다. 나도 벌써 그만큼 구식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동안 나는 뭘 한걸까. 잘 살아온건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보통 밤에 트빌리시에서 기차를 타고 새벽 해뜰때 즈음에 주그디디에 도착하는 야간열차를 이용한다는 것만 알고 탔다. 그 뒤의 길은 내려서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생각하고 편안 마음으로 기차를 탔다. 미리 알면 재미 없지 않은가? 윗층 침대에 자리를 잡는다. 확실이 이층이 독립적이라 마음이 편하다. 아랫층은 다른 손님들과 친해지기 위한 소통의 공간이다. 차분히 침대시트를 깔고 베갯잇을 입혔다. 큰 짐칸이 입구 윗쪽에 다락방처럼 따로 있어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다.(아랫층 침대는 매트를 들어 올리면 짐칸이 나온다. 짐 위에 눕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 열차는 짐을 잃어버릴 걱정이 없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식 열차가 서유럽 열차보다 안전하다.) 책을 볼 수 있는 독서등도 있고 누워있기 지루하면 복도에 앉을 수 있는 접히는 의자도 있다. 난 기차를 좋아한다. 어릴때부터 차멀미가 유난히 남들보다 심했다. 차만 타면 마치 차를 처음이라도 타본 것처럼 그날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곤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차를 선호하게 되었는데 기차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기차는 특유의 리듬이 있다. 진동이 있다. 덜컹덜컹 기차 특유의 그 리듬감이 내가 기차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여름철의 소낙비, 열대우림의 스콜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기차에 앉아 창 밖을 보면 마치 영화관에 온 것 같다. 차창 밖의 풍경을 좋아한다. 창 밖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이 펼쳐진다. 기차가 출발한지 30분이 지나니 벌써 도심의 느낌이 지워지고 완연한 시골풍경으로 바뀐다. 마치 빠르게 수십년의 시간을 거슬러 간 듯한다. 농가의 풍경, 텃밭, 노인들, 시골길, 농기구들, 시골 아낙들, 식물성의 공간들. 나에게 자유만 있다면 바로 기차를 세워 내리고 싶다. 시골길을 따라 걷고 싶다. 기차역과 기차역 사이에는 여행자가 접근하기 힘든 진솔한 삶이 있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여백이지만 삶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로 여전히 꽉차 있는 곳이다. 초등학교때 광주서 살던 마을이 비둘기호가 지나가는 철길과 가까웠다. 집 안쪽 마당의 담벼락에 올라가면 기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들은 어떤 세상으로 향하는 것일까? 저 너머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이 곳과는 다를까? 시골과 남광주역을 느리게 오가는 주로 시골아낙네들이 주로 애용하는 지선이었다. 어머니는 절대로 철길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모르게 동네 형들과 철길에 자주 놀라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같은 이 조그만 동네에, 동네 사람과 좁은 골목길이 세상의 전부인 이 아이들에게 기차가 지나가는 것은 정말 큰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기차가 정해진 시간대로 운행된다는 사실도 몰랐다. 어차피 손목시계도 없었으니까. 하루에 몇대가 지나가나 세어 보다가 포기하곤 했다. 그저 범접할 수 없는 경이롭고 위대한 무서운 혹은 신적인 생명체 같았다. 항상 철로에 대한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떠돌이 개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비교적 자주 있었고 진짜인지 모르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행색이 남루한 술에 취한 아저씨였다거나 혹은 젊은 처자가 자살을 했다거나 그런 내용이었다. 아이들에게 떠도는 마고 할멈 이야기처럼 너무나도 무섭긴 했지만 기차는 아이들을 끌어 당겼다. 무지막지해 보이는(인간이 만든 것으로는 안보이는) 금속 덩어리가 낯선 사람들을 싣고 번개처럼 지나가면 뛰어가 손을 흔들곤 했다.(지금보면 아주 느린 속도지만 그때는 감각이 달랐다.) 우리를 발견하고 함께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날은 아이들과 함성을 지르며 조그만 돌을 기차를 향해 던지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동네 형들이 10원짜리 동전을 올려 놓으면 납작해 진다고 했다. 진짜? 우와. 그래서 한번은 동전을 올려놓고 몇 시간을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떻게 변할지 상상이 쉽지 않았다. 드디어 저 멀리 기차가 보인다. 귀를 틀어 막고 땅에 업드려 있다가 동전이 불꽃을 내고 튀기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땅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차가 저 멀리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철도에 뛰어가서 동전을 찾기 시작하였다. 튕겨 나가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우와 그런 사물은 처음보았다. 기차의 바퀴가 일초도 안되는 시간에 동전을 아주 얇게 황금처럼 반짝이는 새것으로 변형시켜 놓았다. 경이로웠다. 아주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진귀한 보물로 변한 것 같았다. 다음에는 낡은 못을 올려 보았다. 동네 형들과 그렇게 기차길에서 노는게 재밌었다. 친형은 기찻길에 놀러갈때 나를 데려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혹시 사고가 날까봐 불안해서 그랬다. 한번은 철로를 따라 하루종일 걸어다니며 금속으로 된 것들을 주워 고물상에 팔기도 했다. 딱히 돈이 필요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고철보다는 그저 형들과 한번도 가본적 없는 세상 끝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는게 즐거웠다. 가장 먼 곳에 가 깃발을 꽂았다. 나중에 중학교에 입학해서 알게된 것은 그때 걸었던 세상 끝이 겨우 버스로 두,세정거장 거리였다. 어느날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데 깃발을 꽂았던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세상 끝을 느리게, 또 넘어섰다.   
이런저런 추억에 빠져 들었다가 어느새 시간이 늦어 침대에  눕는다. 독서등의 불을 끄고 덜컹거리는 기차의 침대에 누우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 자면서도 내몸은 자동으로 누군가의 땅을, 삶을 가로 질러 여행중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내가 어딘가로 멀리,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더이상 바랄게 없다. 유년기의 세상끝과는 비교도 안될 거리의 어딘가로 말이다. 아 그런데 오늘밤 나 때문에 많은 분들이 괴롭겠구나. 걱정이 된다. 다음날 새벽이 되었다. 올 것이 왔다. 이제 내릴 준비들을 한다. 지난 밤에 나 때문에 밤을 설쳤을 같은 콤파트먼트의 객들에게 큰 죄를 지은 마음으로 일어났다. 아. 어떻게 해야하지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겠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 콤파트먼트는 우리 일행 외에 젊은 엄마와 개구쟁이 딸이 있었다. 그때 사교성이 좋은 P선생이 순식간에 모녀와 친해지는 것이었다. 엄마의 표정이 무표정해 보여 말도 못 걸고 있었는데 특유의 유머로 다가서고 아이에게 과자도 주니 금방 다들 표정이 밝아진다. 마법 같았다. 역시 사람은 내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다 나 하기 나름이다. 그들도 처음보는 나이 찬 동양 남자들과 같이 하루밤을 지내는게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전날부터 용기를 낼껄.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여행자 간의 언어의 장벽을 넘는 우정이 생겨난다. 의사소통에 한계는 있지만 마음은 의지만 있다면 주고 받을 수 있다. 다행이 그렇게 급 반전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주그디디 역에 도착하였다. 안녕. 

주그디디
조지아엔 네 글자로 된 지명이 많다. 트빌리시, 주그디디, 스바네티, 메스티아, 우슈굴리. 기차에서 막 내렸을때는 아직 어둑어둑 했고 사물들의 형태가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다.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빠져나오니 여러대의 마슈루까가 서 있다. 여름 성수기가 지나 차가 없을 수도 있다하여 걱정을 했으나 호객을 하는 차장들 때문에 기차역 주변이 정신이 없다. 메스티~아, 메스티~~아. 메스티아? 메스티아! 오케. 흥정엔 그리 많은 언어가 필요치 않다. 성수기 만큼은 아니지만 다행히 메스티아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차에 짐을 싣고 불안한 마음으로 좌석에 앉아 있는데 실루엣만 보이던 사물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형체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처럼 외국에서 온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여행객이 많았다. 어둠 속에서는 표정이 굳어 있다가 아침햇살이 드리우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다들 표정이 밝아 진다. 이렇게 낯선 곳에서는 기사가 사기꾼이 아닐지, 가다가 어딘가 나를 버려두고 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기 마련이다. 과장하자면 어디 인간시장에 혹은 노가다 현장에 끌려가는 어두운 분위기였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을 기다렸다. 빛은 사람의 감정을 바꿔놓는다. 마음의 의심을 몰아낸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이 다 차야만 출발한다. 햇빛에 얼었던 몸을 녹이면서 기다렸다. 주그디디는 어떤 곳일까 한편 궁금했다. 여기서 시내 버스를 타면 압하지아 국경으로(다리) 한번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기차는 주그디디가 종점이 아니었다. 우리가 타고 온 기차는 또 어딘가로 급하게 떠난다. 내가 탄 마슈루까는 시내를 돌아 메스티아로 향하는데 국경은 아닌듯하지만 폐쇄된 다리와 군인들이 보였다. 그런 곳에서는 분쟁지역의 국경도시 느낌이 났다. 도시 외곽으로 나와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니 주그디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마음 같아서는 내려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일단 기억해 두는 것으로. 차가 한참을 달리다 중간 즈음 산 속에 있는 카페에 멈춘다. 화장실 갈 사람은 가고 식사 할 사람을 하란다. 삼십분을 쉬어 간단다. 커피를 주문하니 성의 없는 인스턴트 커피다. 카페에서 내려다 보이는 저수지 풍경이 장관이었다. 그런데 우리 차에 탄 손님 중에 기사와 우연히 동향인 사람이 있었나 보다. 갑자기 러시아어로 시끄럽게 떠들더니 식당에 함께 들어가 흥겹게 먹고 마시기 시작한다. 오늘 안에는 출발하는 걸까? 메스티아로 가는 길은 위험한 산길이었다. 그런데 기사 일행들은 테이블을 들여다 보니 맥주는 이해를 하지만 독주 차차까지 본격적으로 들이 붓고 있다. 하하. 그렇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이제 무감각해졌다. 내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냥 신경을 안쓰는게 상책이다. 점심 시간이 지나니 술에 취한 기사가 기분이 최고다. 다시 차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하였고 기사가 기분이 좋은지 경치가 좋은 뷰 포인트에서 차를 세워서 기념사진 찍으라고 한다. 사진까지 직접 찍어준다. 어. 갑자기 패키지 여행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다들 내려서 스바네티의 설산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기사는 나를 보더니 축구선수냐고 어깨를 무쇠같은 주먹으로 툭 친다. 내 셔츠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몸매는 절대 아니지만. 머 그렇게 즐겁게 관광객이 되어 사진 찍으며 지루하지 않게 메스티야에 도착했다. 


메스티아
술취한 기사가 우리를 내려준 곳은 중심의 광장이었다. 떠나는 사람과 막 도착한 사람들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요란한 곳이었다. 약간 서유럽의 스위스 같은 분위기도 조금 있고 암튼 산에 왔다는 사실이 확 느껴지는 곳이었다. 도시와 달리 많은 건물들이 통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이게 너가 원하는거지 만족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광장의 한 식당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무심해 보이는 직원에게 주문했다. 이곳에는 흔해 빠진 외국인이 또 왔네?라는 표정으로 주문을 받는다. 산이라서 그런지 트빌리시와 좀 다른 메뉴들이 있었다. 송어구이도(잉구리 강에서 잡은 걸까?) 있고 버섯요리들이(스바네티산?) 보였다. 점심을 먹으며 어플로 적당한 숙소를 검색해서 예약했다. 이번 여행에 처음으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났다. 우리가 일어설 때가 거의 되자 점잖아 보이는 한국인 여행객팀이 옆 테이블에 앉는다. 학교 교장선생님(말하기 전에 이미 알 수 있었다.)이라고 했고 남자1, 여자2 팀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했다. 두달동안 코카서스3국 여행중이라고 했다. 방은 따로 예약을 하고 다니지 않으신단다. 방 구하느라 지치고 고생이 많아 보였다. 그 나이에 대단하신 분들이다. 요즘엔 이렇게 방학때마다 장기 여행다니는 선생님들을 자주 만난다. 여행 책도 많이들 내신다. 선생님들 만큼 여행 다니기 좋은 직업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은퇴하고 나서도 연금이 배낭메고 여행다닐 정도는 나온다. 이럴때면 나는 왜 교사자격증을 학교 다닐때 따지 않았을까 후회된다. 내가 학교 다닐때는 중고등학교 교사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겨우 그 지옥을 탈출했는데 누가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겠는가?) 그런데 대한민국에 처음인 IMF가 끝나고 사회에 나올때쯤 되니 교사가 결혼상대로 인기 1순위라고 한다. 예전에는 예술가들이 학교선생(보통 동문)들과 결혼을 많이 했었다. 그렇게 결혼한 선배들은 예술가로서 삶이 녹녹치 않아도 작업을 그래도 지속적으로 했는데 지금은 학교선생 신부들은 판사, 변호사 정도 아니면 거들떠도 안본다고 한다. 
버스내린 곳 근처 식당이라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막상 먹어보니 음식이 괜찮았다. 다음에 또 가야지 마음먹고 주섬주섬 짐을 들고 예약한 숙소로 슬슬 이동을 한다. (손바닥 만한 마을이긴 했지만)난 항상 중심가에서는 최소 5분정도 살짝 벗어난 곳에 방을 구한다. 그런 곳들이 인심도 좋고 보통 조용해 머물기 좋다. 골목 골목흙길을 지나 오르막에 오르니 숙소가 나온다. 문이 열려 있서 바로 리셉션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다. 손님도 없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한 10분간 기다리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전화를 걸어 보니 금방 어디선가 젊은 사장이 온다. 운영하는 숙소가 한 곳이 더 있다고 한다. 친절했고 3층의 방을 배정해 주었다. 삐걱삐걱하는 나무계단의 느낌이 좋았다. 방 앞에는 발코니처럼 생긴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기에도 좋아 보였다. 아쉽게도 방은  좁긴했지만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스바네티의 산들이 눈 앞에 펼쳐져 보이는 곳이었다. 겨울엔 스키타러 사람들이 많이 온단다. 1층 식당엔 벽난로도 있고 낡은 스키 용품들이 숙소 곳곳에 보인다. 아. 언젠가 한 겨울에 다시 와서 폭설에 오도가도 못하고 이곳에 발이 묶여 지내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보통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내린단다. 
한 이틀은 방에 틀어밖혀 일을 했다. 보고서, 제안서들을 보내고 한국에 들어올 스텝들 항공권, 그리고 네팔을 갈 항공권 발권을 시작했다. 전시회 참여하는 작가들과도 소통을 해야 했다.(그 작가들도 대부분 어딘가로 여행중이었다.) 수원포토 스텝들과는 화상채팅으로 회의를 하다가 어느날은 노트북을 돌려 화면 밖의 풍경을 보여주니 반응이 좋다. 우와. 다음엔 꼭 갖이 오자! 아. 그래. 방에 틀어밖혀 일만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예 작정하고 업무와 함께하는 여행 트랜드를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다음에는 맘먹고(?) 일거리 싸들고 와야겠다. 한 일,이주 한 곳에 머물며 일해도 좋겠다. 낮에는 한시간씩 산책도 하고. 필요하면 분위기 있는 카페에 노트북을 들고가고. 전에 비엔티엔에서 그런 서양인을 만난적 있다. 주민은 아니고 여행객인듯 한데 카페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었다. 보통 여행이라는 것은 모든 일을 다 끝내고 가는 것인데 보통 그 일이라는게 끝이 없기 때문에 결국 대부분 여행을 못떠나게 된다. 떠나도 몇년에 한번 그것도 고작 3박4일 동남아 혹은 무리하면 10일의 유럽여행이 전부이다. 그 짧은 기간에 본전찾을 생각으로 하루에 10군데씩 다니며 강행군을 한다. 휴가를 가서 쉬고 오는게 아니라 오히려 파죽음이 되어 돌아온다. 재충전이 아니라 더 체력이 소진된다. 그런데 생각을 달리하면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업무라면 이런 여행지를 배경으로 일을 해도 좋은 듯 하다.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면 더 자주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풍광 좋은 곳에서 일을 하다가 아침에 산책하고 식사때는 걸어나가 여유있게 식사를 한다. 저녁때는 강가에서 샤슬릭에 생맥주도 곁들이며 여유있는 시간을 보낸다. 일상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를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낮에는 평소처럼 일을 하고 식사시간과 퇴근 시간 이후에는 여느 여행자처럼 여행자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나 펍에도 가고 휴식을 취한다. 매일 점심시간, 퇴근 후(?)에 여행을 하는 셈이다.
 메스티아는 강원도의 어디 등산객들이 많이 모이는 동네에 온 듯한 느낌도 있다. 산책을 다녀보면 여행 정보에 안나오는 분위기 있는 카페나, 식당들도 꽤 있다. 조지아는 가이드 북이 없어도 여행을 다니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세차례 조지아 여행을 이미 끝낸 지금 얼마 전에서야 글에 쓸만한 자료가 있을까 싶어 로운리 플래닛 한권을 중고로 샀다. 그런데 별로 얻을 만한 정보는 없었는데 케수레티&투세티 지역에 대한 정보는 유익했다. 다음 방문에는 여기를 반드시 가야 겠다고 결심한다. 20년전 서부 티벳 카일라스 여행할 때의 감각이 다시 살아난다. 한 일주일간 캠핑을 하며 걸을 생각을 하니 겁도 나지만 벌써 기대가 된다. 오는 6월에 가려고 결심을 했으나 코로나 때문에 불투명 해졌다. 
P선생은 워낙 산을 좋아하는 메니아라 혼자 하루종일 이곳저곳 많은 곳을 걸어 다니신다.(이미 히말라야 트래킹을 10번 이상 다녀 온 베테랑이다. 열정 만큼은 20대이다.) 오늘은 어디를 다녀오셨나요? 물어보면 아주 즐겁게 그날 다녀온 곳들을 이야기 해주신다. 나는 숙소에서 스바네티의 전체 풍경만을 보았지만 선생은 그 세부를 직접 발로 걸으며 느껴본 것이다. P선생이 하루의 풍경을 펼쳐놓는 이야길를 듣고 있으면 나도 메스티아 곳곳을 함께 여행다닌 느낌이다. 우연히 들어간 오래된 중세의 성소에서 만난 아름다운 성화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웠다.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선생을 통해 특별히 관리인이 문을 열어준 곳이었다. 왠지 영화같은 많은 이야기가 그 곳에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저녁에 산책을 하다보니 메스티아는 생각보다 넓은 곳이었다. 버스 내렸던 곳으로 돌아나가 보니 공원과 광장이 너머에 하나 있었고 그 곳에서도 카페, 식당들이 모여 있었다. 잠시 앉아 안주 하나에 맥주 한잔 시켜놓고 사람들 구경하다가 몇군데 더 들러본다. 그러다 가장 사람들이 북적이는 산장 분위기의 야외에서 샤슬릭을 굽는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역시 손님을 잡으려면 퍼포먼스가 중요해.) 9월인데 이 곳은 벌써 쌀쌀하다. 이후 늦게 와인 두병 사가지고 숙소에 들어오는데 별이 참 아름답다. 한가하게 별을 들여다 보는게 얼마만인가? 별이 잘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에 와 있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별을 보고 좋아할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골목길이 티벳처럼 어두껌껌해 속소까지 겨우 돌아 왔다. 당연히 레드와인인줄 알고 사왔는데 따 보니 화이트 와인이다. 이런 제길. 난 화이트 와인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생선요리나 크리스마스 날 달달한 케잌을 먹으며 샴페인처럼 먹는 정도. 어쩔 수 없이 화이트 와인을 베란다 나무 의자에(해변가처럼 단계별로 제껴지는 목재 의자였다.우리집 옥상에 가져다 놓고 싶다.) 기대어 P선생과 이런저런 여행이야기 하며 마셨다. 숙소에 손님이 없어 편하게 떠들었다. 아 그러데 왠걸 정말 환상적인 화이트 와인이었다. 내가 아는 와인의 맛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넘어서는 맛이었다. 화이트 와인은 달고 맛이 워낙 밋밋해서 싫어했는데 조지아의 화이트 와인은 입안에서 무지개 처럼 다채로운 향과 맛이 터져나왔다. 와. 이렇게 다채로운 맛이 입 안에서 펼쳐지는게 가능하구나. 한국에서는 맥주한캔 살 정도의 금액에 말이다. 이렇게 조지아 여행의 즐거움이 하나 늘어났다. 여행에서는 실수와 실패에서 오히려 횡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실수와 실패를 받아 들일 정도로 마음이 열려있어야 하기도 하다. 사실 여행에서 실패란 없다. 계획되로 되지 않더라도 어차피 이방인인 나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일뿐이다.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음흉한 택시 기사가 길을 수고스럽게(?) 한참 돌아가면 도시 구경도 하고 좋기만 하다. 여행지에서 초조함은 금물이다. 어차피 그렇다고 안될 일이 되지도 않는다. 
여기까지 왔는데 떠나기 전 마지막 날 한나절 정도는 가볍게 트래킹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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