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보내고 새해를 함께 맞으려고 딸과 아들 내외, 그리고 손주까지 모였다. 애들이 오기 몇일 전부터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고 분주했었다. ‘무엇을 만들어놓으면 아이들이 맛있게 먹을까...’고민하며 ‘역시 집밥!’이라며 좋아라하는 그들을 기대하며 나도 들떴다. 모인지 3일째 저녁이 되니 온 몸이 으슬거리고 목이 따끔거린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아픈 내색 안하려고 조용히 앉아 있었더니, 딸이 ‘엄마 화났어?!’라고 한다. 나는 앉아있기 힘들만큼기운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인데, 딸은 그 표정이 신경이 쓰였나보다. 딸아이는 어릴때 자주 아팠다. 어쩌면 그때 딸아이는 걱정하는 엄마의 표정을 화난 표정으로 읽은 모양이다.그리고는 쭉 엄마가 웃지않을때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거라 여기는 모양이다...
‘엄마, 어디 아파? 아파보이네...’라고 물어주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지쳐있는 나를 보고 ‘엄마, 화났어?’라고 해석하는 딸이 야속해서, 나도 모르게 ‘엄마도 아플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그 말에 저녁 식탁의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러다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딸이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그런 힘없는 표정을 지으면 엄마가 화가 난 줄 알았어’. 며느리도 한 수 거들며, ‘저도 어릴 때는 엄마들은 아프지도 않는 존재인 줄 알았어요’라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명절이 되면 '엄마들'은 미리 장 봐놓고 음식도 준비하고 자식들 편히 잘 수 있도록 이불도 빨아놓고...그렇게 해주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엄마들의 ‘밑작업’이 있었기에 온 가족이 모여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연휴가 끝나고 각자 자기네 집으로 돌아가고 텅빈 집에 홀로 남았다. 손주가 여기저기 던져놓은 인형들, 아들네 가족들이 썼던 침구류, 가득 쌓인 수건들, 냉장고에 수북한 먹다 남은 음식들...집안이 온통 엉망이다. 연휴는 끝났지만 엄마에게는 여전히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몸살기운이 있어서 몸이 천근만근이면서도 누워서 쉬질 못한다. ‘엄마’는 쉴 수 없다. 진통제를 먹으며 묵묵히 뒷정리를 하고 있다. 텅 비어버린 집만큼이나, 텅 비어버린 마음을 일거리로 채우는 느낌이기도 하다.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고, 빨래를 세탁기에 넣으면서 지난 3일간의 일들을 회상한다. 냉장고를 비우며, ‘이것도 해먹이고 싶었는데, 이거 해주면 좋아했을텐데...’하며 아쉬워한다. 몸은 고되지만, ‘자식들이 엄마 집에 와서 편히 쉬다갈 수 있었다면 감사하지...’, ‘세상에서 지친 몸을 잠시라도 뉘이고 갈 수 있는 곳이 되어 줄 수 있음이 감사하지...’하며 마음부터 회복한다.
엄마라는 ‘등대’
어른이 된 뒤에도 우리 모두에게 돌아가 푹 쉴 수 있는 ‘그곳’이 있었으면 한다. 앞이 잘 보이는 ‘낮’동안에는 등대 불빛이 필요없지만, 앞이 캄캄한 밤이 찾아와 길을 잃었을 때, 더 이상 항해할 힘이 남아있지 않을 때, 등대 불빛은 돌아가 쉴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항구로 돌아온 ‘배’는 닻을 내리고 편히 쉴 수 있다. 그렇게 충전하고서 다시 거친 항해를 떠날 수 있다...
어쩌면 ‘엄마는 아프지 않는 존재’이길 바라는 아이의 마음은 ‘등대불빛’이 희미해질까 두려운 마음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