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로 있는 사무실을 옮기려고 임대인에게 보증금반환을 요청했다. 계약 만료 두달전 이사계획에 대해 고지했으나, 만료이후 두달을 넘기고 있다. '나 돈 없다! 돈 생길때까지 그냥 있어라' 한다. 임대인은 전화도 안받고 문자에 답도 없다. 계약기간이 지났는데, 짐을 빼지도 못하고 새로 계약도 안한 상태로 있는 것은 '보증사고'라며 부동산 사장님이 법에 호소하라고 권한다. 고민끝에 주택보증보험사에게 보증금반환이행청구를 진행했다.
난생처음 해 보는 '법적 권리주장'이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떨린다. 두 다리가 후덜거린다. 눈물까지 그렁거린다. '내가 이런 일을 혼자 처리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내 생전에 법원에 갈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법원 입구에 서서,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엄청난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임차권등기명령을 위해 선릉-광화문-서초를 누비고 다녔다. 법원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신청서 작성이 가능했는데, 떼어야 할 서류가 많았다. 큰 법원안에서 여기가라, 저리가라...엄청난 동선을 돌아다니고 서류를 다 준비했다고 생각하고 제출을 했는데도 한가지 서류가 부족했다. 30분 안에 다시 사무실에 가서 그 서류를 가지고 와야하는 상황이다. 다음 날은 토요일...두다리에 힘이 풀린다. '아...그냥 법무사에게 부탁할껄...'
다행히 서류를 잘 구비해서 제출했고, 일주일 만에 법원에서 결정문이 내려왔다. 그것을 들고 다시 광화문으로 가서 이행명령을 신청했다. 몇달을 고민하고 몇날에 걸쳐서 준비한 서류들을 드디어 오늘 제출했다. 긴장이 한꺼번이 풀린다. 아침일찍부터 서둘렀던 터라 허기도 밀려온다. 하지만 집에 갈 때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집으로 가자!'.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매진이다.
기차표예매 사이트에서 한시간째 반복 클릭을 해보지만 표가 없다. 서서 가더라도 일단 서울역으로 가자싶어,지하철을 탔다. 서울역에 내리기 한 정거장 직전, 드디어 한자리가 났다. 그것도 일등석(?)으로...평소엔 일반석으로 오가지만, 왠지 하늘이 '오늘은 두다리 뻗고 편히가라'고 주신 선물처럼 느껴졌다. "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기차에 타려는데 한 아기엄마가 유모차를 기차에 올리느라 낑낑거린다. 달려가 그녀를 돕는다. 안본척 할 수도 있을 먼 거리였지만, 내 두 다리에 힘은 풀렸지만, 어딘가로부터 힘이 솟아올랐다. 나는 원래 그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자리에 앉고보니 그녀가 내 앞자리다. 아기는 끊임없이 칭얼거린다. 아이의 울음은 날카로왔고 나는 엄청나게고단한 상태였지만, '애기 엄마가 얼마나 난감할까...'하며, 세상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
어떤 일이 생겼을때,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해결하고 그로인해 느낀 유능감은 자존감의 좋은 양분이 된다. 나는 오늘 문제 해결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서류를 잘 구비해서 법원에 제출하고 그것이 잘 통과해서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꼈다. 자존감 잔고가 두둑하게 채워진 느낌이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 사건 앞에서 아무 대처도 못하고, 아무 도움도 못받고 그대로 얼어버렸던 경험은 '나는 못하겠어...'라는 생각에 자주 압도 되게 했다. EMDR 치료를 받고나서, 내가 내 안의 능력을 너무 신뢰하지 않고, 누군가 나대신 처리해주기를 바라는 의존적인 사람으로 살아왔음을 깨달았었다. 치료받지않았다면, 이번 일을 나혼자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동산 사장님의 권유대로 법무사나 변호사를 고용해서 일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 도와주세요...'하면서 뛰어다녔다. 그렇게 많은 서류를 침착하게 준비했고 제출까지 무사히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일이 처리되려면 적어도 3달은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그때서야 다른 사무실을 알아볼 수 있고,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나는 어제의 나를 넘어섰다. 상황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나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그래서 일까...서류접수 후 먹은 샐러드도 세상 가장 맛있는 요리로 느껴졌고, 비엔나 커피도 세상 가장 달콤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가장 행복하고 감사하다. 여기에 무엇하나 더 하지않아도 될것만 같다.집으로 가는 길이 이토록 가볍고 신나는 일인 적이 있었나싶다. 기차창밖으로 보이는 논밭이 온통 라벤더밭으로 보인다. 편안한 이완을 주는 라벤더향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창밖을 보며,'나에게 왜 이런 일이 허락되었을까...'를 생각해본다.
두달 넘는 시간동안 지혜를 구했었다. 이 나이 먹을 때까지 그런 법적인 일에 연류된 적이 없어서 서류떼는 일이 서툴렀다. 그래서 우왕좌왕 동선이 더 길었었지만, 그때마다 돕는 자를 보내주셨다. 중간중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물이 앞을 가려, 포기하고 싶었던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한번 해보자. 내 안에 그런 능력이 있으니 맡기셨을거야...'하며 한걸음씩 진행했었다. 내가 안해본 일에 지레 겁먹는 성격이라서 다른 사람보다 많이 긴장했었던 것이지내 안에 '대처능력'이 없는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일을 혼자 처리해보고나니, 내 안에는 '지레 겁을 내는 나'도 있지만, '지혜롭고 용기있는 나'도 있었다. 어제보다 한뼘 더 나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보다 더욱 겸손히 기도하게 되었다!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동행과 그 일을 내게 허락하신 그 마음도 알 것 같았다. '이 나이에...라는 핑계대지말고, 계속 자라라'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 성장하고 있으면 아직 젊은거지. 나이뒤로 숨어 성장하기를 멈추면 그때부터 노인아닐까...나는 오늘 훌쩍 커버린 느낌이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보랏빛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고, 아직 풀어야할 숙제가 많이 있지만,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이 감사하다. 이런 내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