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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Aug 24. 2021

아프간의 죽음을 담은 사진들

신문은 참상을 얼마나 전해야 할까

신문에는 시신 사진을 싣지 않는다. 죽은 몸 자체는 물론, 피가 낭자한 현장처럼 죽음을 암시하는 사진도 금기시된다. 시신의 발끝만 나온 사진도 웬만하면 피한다. 일차적으로는 희생자와 유족의 초상권을 비롯한 인격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본질과 동떨어진 자극적인 사진을 불필요하게 쓰지 말자"는 생각 때문에 웬만하면 간접적인 사진을 쓰곤 한다. 반드시 써야 할 경우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강하게 하거나, 흑백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런 우리 신문에 얼마 전 실린 사진은 내가 봐도 이례적이었다. 그것도 1면에 실린 사진이었다.


주로 지방에 배달된 19일 자 첫 번째 인쇄본(위 사진)과 모자이크 처리된 최종본(아래 사진)




사진의 힘은 당연히 글보다 강하다

글은 이해해야 하지만, 사진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 눈이 닿는 순간, 느끼기 싫어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날의 1면 사진 한가운데에는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가 있다. 하지만 초점은 뒤에 있는 다른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머리가 온통 피에 젖어 있고, 눈은 허옇게 뒤집어 뜬 채 축 늘어진 남자아이. 고작해야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작은 몸집이 재킷을 입은 어른의 품에 안겨있다. 사진상으로는 아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사진은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카불 국제공항 인근에서 17일 찍힌 사진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을 게티이미지코리아에 등록한 것으로 보인다. 계약기간 동안 정액을 내고 쓰는 통신사 사진과 달리, 게티이미지의 사진은 1장당 얼마의 비용을 지불하고 사용한다. 통신사들의 사진으로는 도저히 느낌을 살릴 수 없을 때, 기사 열 장이 게티 사진을 대체할 수 없을 때에만 종종 사용하는데 이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기사에는 사진이 이렇게 설명돼있다. 

"이곳엔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탈레반은 갑자기 총, 채찍, 칼, 곤봉 등을 꺼내 들고 여성과 어린이 등 시민들을 폭행했다. (중략) 한 성인 남성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서 있었다. (중략) 시민들이 채찍질당하는 모습을 보며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는 남성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를 잡아끈 아이의 얼굴

내부 회의용으로만 만드는 첫 번째 초판에 저화질로 들어갔던 이 사진은 다음 버전, 즉 주로 지방이나 인쇄소에서 먼 지역에 배달하는 버전의 첫 인쇄본에 고화질로 선명하게 들어갔다. 모두들 현장의 참상이 고스란히 담긴 이런 사진을 1면에 모자이크도 없이 넣는다는 점을 걱정하면서도, 허옇게 뒤집어지는 아이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끔찍한 사진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소름 끼치지만 계속 보게 되는 것이다. 중간중간 편집부 밖의 기자들이 물어보기도 했다. "정수 네가 보기엔 저 사진이 어떠니? 저걸 쓰는 게 맞냐? 너무 무섭지 않아?" 나는 대답했다. "현실이 끔찍한데 어쩌겠어요." 그게 내 생각이었다.


원본을 그대로 쓴 건 거기까지였다. 다음 날 우리 집에 배달 온 최종판에는 아이의 얼굴이 모자이크로 지워졌다. 알고 보니 처음에 인쇄한 회의용 저화질 흑백 지면은 그다지 적나라하지 않아 보여서 편집회의 참가자들도 문제를 몰랐다고 한다. 나중에야 실제 인쇄본을 본 각부 부장들과 1면 편집자 등등이 깜짝 놀라 최종판과 온라인에선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고 들었다. 의도한 충격요법이 아니라 일종의 실수였던 셈이다. 


아이의 눈을 볼 수는 없게 됐지만, 사진은 이미 충분히 이례적이며 충격적이었다. 가운데 보이는 남자아이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이미 말해주지 않는가. 온라인에서도 해당 기사에는 독자들의 분노한 댓글들이 하루 종일 줄을 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아이의 얼굴이 우리를 이끌었으리라.


다른 신문들은 예상했던 대로 온건한(?) 사진들을 주로 실었다. 총을 든 채 거리를 활보하는 탈레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피켓시위를 하던 아프간의 여성들처럼 간접적인 사진들이었다. 그나마 가장 강도 높았던 것은 '부르카를 쓰지 않았다고 총살당한 여성'이 쓰러진 모습을 1단으로 아주 작게 쓴 것이었다. 사람들이 몸을 가리고 있어 사실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모자이크 처리된 피가 참상을 충분히 보여준다. 




때론 금기와 원칙도 깨야 하지 않을까

신문에 끔찍한 사진을 쓰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건 당사자들의 권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선 일종의 방어선이기도 하다. 강심장 독자들도 있겠지만, 어떤 참상을 보는 순간 끔찍한 트라우마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볼 장 다 본 독자들도 있지만, 폭력적 장면에 함부로 노출되고 싶지 않은 독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두를 위한 보도사진은 가능한 온건한 것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게 맞긴 하다. 현장을 담되, '너무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 사진 말이다. 매체들 간에 선정성 경쟁을 막기 위한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을 때, 단순한 일회성 범죄가 아니라 전쟁에 준하는 일이 벌어질 때는 조금 고민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 이곳 한국에서는 관심을 끄고 싶으면 얼마든지 꺼버릴 수 있는 끔찍함일 땐 그 원칙들이 제약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세계 시민이니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에 관심을 가지시라고 글로 아무리 써봐야 훈계질에 지나지 않는다. 글로 쓰는 현장 스케치는 길면 길수록 본질적인 내용을 언급할 공간만 까먹는 셈이다. 하지만 사진은 다르다. 이래라저래라 긴 말 없이 보는 사람을 단 한 번에 낚아채 현장으로 데려갈 수 있다. 당신 눈으로 보라고,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되는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노라고.


재난보도준칙 등에는 선정적 보도를 막기 위해 "피해자 가족의 오열 등 과도한 감정 표현, 부적절한 신체 노출, 재난 상황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 흥미위주의 보도 등은 하지 않는다"와 같은 여러 원칙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진은 과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흥미가 아니라 재난 상황의 본질과 직접 관련됐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자극적 보도가 아니라,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으로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죽음이 담긴 사진,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을 기록한 사진,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모자이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때론 그런 한 장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블러 처리 하나 없이 원본 사진을 적나라하게 펼친 LA타임스의 사진 기사는 누군가에게 조금 과한 장면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연한 것을 선명하게 보고, 느끼기 싫은 것을 절감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커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온라인. 8월 17일 자 기사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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