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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왕 Apr 17. 2019

라인업에서 만나요

직장을 옮기고 1년 반 만에 휴가를 받았다.

일주일이란 시간, 고민에 빠졌다. 갑작스러휴가인 탓에 함께 갈 동료가 없었기에 홀로 떠나야 했다.


혼자 가서 뭐하나란 생각에 집에서 책이나 읽을까란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럴 거면 휴가 반납하고 출근해 병신아'란 선배의 애정 어린(?) 조언에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직은 추운 날씨 탓에 따듯한 곳을 가고 싶었고 바다가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서핑도 즐기고 싶었다.

그렇게 떠오른 곳이 '발리'다.

일본 가마쿠라와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일본은 가까우니 조만간 기회가 오겠지란 계산을 했다.

바다와 따듯한 날씨, 거기에 서핑까지. 혼자 가서 허세 부리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얼마 전 친구 녀석이 발리에서 서핑을 하다 만난 분과 결혼했다는 소식이 떠오른 것은 그저 우연이다.


휴가지를 발리로 결정하고 나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바다에 나가 혼자 물 위에 떠서 다가올 파도를 기다리며 여유 있게 서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어찌 됐든 발리에 도착했고 머무는 7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서핑을 했다. 떠나기 전에 목표로 했던 사이드 타기를 보기 좋게 실패하고 돌아왔지만 다시 한번 서핑의 매력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제법 서핑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발리에서 패들부터 테이크 오프 자세까지, 기초부터 다시 다지는 시간이었다. 해서 나의 서핑 실력에 대해서는 더 할 얘기가 없다. 다녀오면 자연스레 파도가 어쩌고, 보드가 어쩌고 하는 허세를 부릴 줄 알았는데... 몇 년뒤 기대해본다.


7일 동안 머물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감탄사가 날 정도로 잘 타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와 비슷하게 이제 막 서핑에 눈을 뜬 사람들도 있었다.

참 신기했던 건 그 사람이 잘 타든 지 못 타든 지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선 자연스럽게 어떤 파도가 좋았고 오늘 자세는 어땠는지, 라이딩은 어땠는지 편하게 얘기하게 된다는 거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색했던 사람들도 같이 서핑을 즐기고(사실 난 즐기진 못했지만) 나오면 편하게 바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서핑을 통해 친해지고 나면 같이 식사도 하고 이후엔 같이 여행도 다녔다.

그러다가 여행을 마치고 떠나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라인업에서 만나자'라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라인업'은 서핑을 하기 위해 들어오는 파도를 기다리는 지점을 가리킨다. 서핑을 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해변이 아닌 라인업 지점까지 나가서 다가올 파도를 기다린다.

한국에도 수많은 서핑 포인트들이 있고 서핑을 하러 가는 사람들마다 찾아가는 바다도 각자 다르다. 그런 사람들에게 헤어지는 인사가 '라인업에서 만나자'라니.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라도 한국 가서 봅시다'라고 인사치레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처음 이 인사를 듣고 떠오른 생각이다.


그렇게 몇 팀을 보내고 그럴 때마다 서로 라인업에서 보자는 인사를 몇 차례 들었다. 그러던 중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 생각하니 '라인업에서 만나자'라는 말은 정말로 낭만적인 것 같았다.

굳이 어디서 보자는 약속을 정하지 않고 '라인업'에서 만나자는 말, 우리가 계속해서 서핑을 하고 바다에 온다면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란 말 같았다. 서핑이란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게 언제가 됐든 어느 바다가 됐든 다시 만날 것이고, 라인업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파도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인사 같이 느껴졌다.


'라인업에서 만나요'


이 인사가 꼭 서핑에만 해당되는 건 아닌 듯싶다.

어떤 일을 하고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일이 끝나는 순간이 있을 것이고 만남 뒤엔 헤어짐이 있을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비슷한 분야에 있고, 비슷한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 만남은 언제가 되더라도 분명 다시 이어지지 않을까.


발리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같이 7일 동안 서핑을 한 형님이 나에게도

'한국에 돌아가면 같이 라인업에서 만나자'란 말을 건네주었다.(다른 사람들이 돌아간다고 했을 때 모두가 나와서 라인업에서 만나요라고 인사를 해줬는데, 유독 나에겐 다들 쑥스러움이 많으셨나 보다)

처음 발리에 오면서 많은 기대를 했다. 서핑 실력은 당연히 늘 것이고, 어떤 보드를 살지, 숏을 탈지 롱을 탈지, 어떤 로맨스가 펼쳐.....


처음 한국을 떠날 때 기대했던 것들은 거의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핑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고 누군가 처럼 휴가지에서 꿈꿨던 로맨스 역시 44세 형님과 깊은 우애를 다지는 브로맨스로 마무리됐다.


그래도 이번 휴가에서 얻은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라인업에서 만나자'라는 인사다.

찰나의 인연이지만 같은 생각, 같은 취미, 비슷한 일상을 공유하는 누군가라면,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라고 할지라도 다가올 파도를 기다리며 다시 만나게 되겠지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우연 같이 들리지만 필연들이 녹아있는 한마디,

라인업에서 만나요


앞으로도 시간이 나면 서핑을 하러 나갈 것이다. 보드를 타고 라인업에 들어갈 때 이젠 파도뿐만 아니라 그때 같은 바다에 있던 사람들이 혹시나 있지는 않을까란 기대를 더 해보며 서핑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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