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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 Jan 20. 2021

가면 뒤에서

소녀, 여자가 되다


어떤 소녀는 자신이 왕이 될 거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자리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가면을 집어 들어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가면이,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처음으로 말한 건, "아니야."였다. 다음으로 한 말은 "감히!"였다. 이 작은 여자애가 하는 말을 그 누가 비웃지 않으리? 그러나 곧 가신들은, 도사리는 뱀처럼 소녀를 나꿔채려는 자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가면이 <왕>의 권위를 가지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면 뒤에는 벌벌 떠는 소녀가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것을, 이 험한 세상을, 이 혼자 남겨진 아이 혼자서 어찌 다 감당하리! 어찌 살아갈 수 있으리? 이끌어줄 아버지도, 보듬어줄 어머니도, 손 잡아줄 친구도 없는데? 하지만 아침이 되면 소녀는 눈물 자국을 닦아내고, 머리를 올리고, 군주의 옷을 걸쳤다. 그리고 허름한 비단 카펫을 밟으며 망토 자락을 휘날렸다.


소녀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두 손으로 빚어낸 가면에게 무척이나 놀랐다. 가면은 검도 들 줄 알았다. 원래는 꽃을 돌보던 흰 손바닥에 물집과 흉터가 자라났다. 원래는 아주 아담한 정원만을 면해야 할 흰 얼굴이 이제는 고개를 돌려 삭막하고 광활한 황야를 멀리까지 내다보았다. 어느 날 소녀는 폭력의 가능성에 몸을 한번 떨었다. 모두가 정답게 손을 잡고 춤을 추던 동요 속의 낙원. 그 멜로디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녀는 얼마나 멀리까지 왔단 말인가? 부모님이 허용하지 않는 곳까지, 그저 부드러운 벨벳 밑에 잠자코 덮어두려 했던 곳까지. 몽롱한 선잠을 자고 있던 소녀를 삶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일으켜 깨웠던 것이다. 그러고는 나가라고.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라고. 너만의 삶을 살라고 외쳤다. 그래서 소녀의 어깨는 탄탄했고 여리여리한 팔뚝에는 근육이 솟아났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흉터와 물집과 슬픔과 저항의 시간들이, 소녀의 몸을 거친 날개로 문지르고 갔던 것이다. 짭짤한 눈물의 흔적들을. 아마 그 흔적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라.


가끔 소녀는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가면극!"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영원히. 이 가면을 써야 하겠지. 그렇지 아니한가? 모든 것이 정녕 다 헛되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다음날 아침이 밝아오면 다시 무슨 정갈한 의식을 치르듯, 두 손으로 가면을 받쳐 들고 얼굴에 얹었다. 가면이, 눈을 떴다. 그리고 가면이 말했다. 가면을 쓴 소녀는 억센 손으로 검을 들고, 칼집에 다시 꽂았으며, 황야를 일궜고, 무너진 돌을 들어 올려 세웠다. 잃어버린, 아니, 사실은 한 번도 가진 적 없었던 낙원의 초석을.


그렇게 가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결국에는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세상을 다 채워갈 만큼.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가면을 쓴 채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있었다. 알고 보니, 줄곧 말하고 있었던 것은 <가면>이 아닌 <자신>이었다. 그렇게 소녀는 여자가 되었고, 여자는 소녀들에게 이렇게 말해 줄 줄 알았다.


"네 자신이 되지 않는 방법으로 네 자신이 되어라."

왜냐면 인생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쓰린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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