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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 Mar 18. 2021

초콜릿 은박지 로맨스

<초콜릿 은박지 로맨스>


심연 속에서 라틴 댄스 음악이 울려 퍼진다. 아무도 없는   공간. LP판이 끝없이 돌아가며 신나는 자비에르 쿠가트의 음악을 울리고 있다.  소름 끼치는 강당에, 인간의 흔적이나 온기라고는 찾아볼  없는 지하의 외딴 방에, 열정적인 맘보 댄스의 선율이라니. 경쾌한 실로폰 소리는 해골들의 뼈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인가? 아니다. 이곳에는 해골도, 유령도, 먼지도,  무엇도 없다.  무엇도 춤추지 않는다. 오로지 음악뿐이다.  무슨 수를 써서도 멈출  없는.


아주 오래전. 먼 옛날, 이곳에도 한 때는 발걸음이 울려 퍼졌었다. 그리고 어떤 길다란 손가락은 LP판의 바늘을 들어 올렸다가, 툴툴대며 돌아가는 검은색 회전판에 지긋이 눌렀다. 그때부터였다. 이 텅 빈 공간에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은. 사실 그전까지는 그런 공간이 있으리라는 사실조차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이 음악소리에 이끌려, '나'는 놀란 발걸음으로 이 강당에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춤을 추고 있었다.


열띤 밤. 열대. 걱정 없음. 금요일 밤. 순간적으로 지나갈 뿐인 그런 순간들이 음표 속에 포획되어 아름다운 비눗방울처럼 떠 다녔다. 오, 기꺼이 그 순간들을 몇 날 며칠이고 묘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을 테니까. 일단 무언가가 읽히기를 바란다면,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기술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이 신문물 수입자는 담배를 폈다.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핑크색 와이셔츠와 연두색 넥타이) 오래된 시계를 찼으며 (오래된 가죽이 얼룩져 고풍스러웠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긴 다리에 매끄러운 정장이 촤르르 떨어져 내렸다). 옆을 바라보았으며, 곁눈질로 나를 살폈다. 그러면 나는 흠칫 놀랐다. 마치, 초콜릿 은박지를 통해 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기에. 흐릿흐릿하고 굴곡진, 얇은 은박지 말이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나도 담배를 폈으며,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가죽 시계를 찼으며 자주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곁눈질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은박지 속의 모호한 상에 현기증이 돌았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고.... 그런데 젠장. 초콜릿을 쥐고 너무도 오랜 시간 들여다본 것이 틀림없었다. 물컹해진 초콜릿에, 판판하던 은박지도 구부러지고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 강당은 좀 음울하군."

MS. 초콜릿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답했다.

"창문은 없고...."

"하지만 전처럼 답답하진 않아."

"왜지?"

"네가 음악을 틀었잖아."

그러자 ms. 초콜릿은 씨익 웃어 보이더니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진짜> 음악이 들리는 곳으로 가보는 게 어때?"

그렇게 우리는 그 어두침침한 강당으로부터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강당의 문은 닫혔다. 영원히.


우리는 뜨거운 곳으로 갔다. 늘어선 야자나무. 내일의 슬픔 따위는 모르는 불 밝혀진 거리. 놀랍게도, 거리엔 음악이 가득했다. 삼바. 룸바. 맘보. 거대한 스피커가 지지직거리며 경쾌한 음악을 토해냈다. 모두가 시끌벅쩍하게 둘러앉아 떠들고, 대책 없이 취하고, 신나게 먹어댔다. 그러곤 춤을, 춤을 췄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이 거리를 신나게 달려, 녹슨 가로등을 잡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면, 마치 은박지에 비춰 본 세상처럼, 평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로등 빛은 더 은은하게 어른거렸고, 어둠은 한 조각도 비치지 않았으며, 우리의 형상은 길쭉했다.


모든 것이 초콜릿처럼 달콤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한 연기자였다. 스포트라이트 온! 그러면 ms. 초콜릿은 베레모를 눌러쓰고, 광 낸 구두를 또각이며 어설픈 탭댄스를 따라 했다. 나는 오른손엔 술잔을, 왼손엔 ms. 초콜릿의 손을 들고 한 바퀴 돌렸다. PERFIDIA. 우리가 춤을 춘 음악의 이름이었다. 배신. 하지만 누가 배신을 씁쓸하다 했던가. 내가 아는 한 가장 달콤한 멜로디였다. 초콜릿은 내가 멋들어진 예술가 같다고 속삭였고 나는 초콜릿에게 영화 속 주인공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휴가 중> 푯말을 영원히 걸어둘 수 있겠는가. 문제는 날씨가 너무도 뜨거웠다는 데에 있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처럼, 우리들의 열띤 밤들이, 잠 없는 나날들이, 두 손 안에서 녹아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움켜쥐고 있던 초콜릿처럼.


어느 날, 문득 느껴진 정적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축제 시즌은 이미 끝나 있었다. 거리는 텅 비었다. 바닥 위에 축축하게 늘러붙은 종잇조각들만이 지나간 축제의 나날들을 추억했다. 마치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듯이. 그럼에도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문을 연 술집을 찾아 텅 빈 밤거리를 해멨다. 그 음악을, 그 환호성을 다시 한번 듣고 싶었기에. 물론 단 한 군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은박지는 벗겨졌다. 세상이 좀 더 또렷하고 제정신인 곳으로 보였다.


우리는 결국 허름하고 텅 빈 선술집에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우리 둘 뿐이었다. 간혹 가다 빈 잔만이 떨그럭거렸다.

"이제 강당으로 다시 돌아가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말도 안 돼. 뭔가가 더 있겠지."

"아냐. 이제 다 끝났어. 다 문을 닫았다고. 그래도, 상관없어."

"뭐가?"

"너와, 나와, 쿠바 음악만 있다면."

"그 답답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은데. 게다가 난 이제 쿠바 음악이라면 진저리가 나."

MS. 초콜릿이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

"답답하다고? 네 발로 걸어 들어올 때는 언제고. 게다가 쿠바 음악을 먼저 튼 건 <너>였다고."

그러나 초콜릿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의 만남이 그랬듯, 이별도 예술적이길 바라."

그리고 나는 이 어이없는 대사에, 눈물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으로 악수를 했고,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내가, 혹은 초콜릿이, 초콜릿의 손을, 혹은 나의 손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는 한때 처음으로 강당의 문을 찾아 열어젖히고 걸어 들어왔을 때처럼, 그 똑같은 걸음걸이로 내 눈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그 모습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회색 정장을 입고, 헐렁한 양복바지를 껄렁하게 휘날리며 사라졌을 것이다. 한 손으로 머리 위의 모자를 받친 채. 뭐, 아닐 수도 있다.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결국 그가 떠났다는 사실 외에?


모든 여행은 결국 끝이 나기 마련이다.

혼자 남겨지자, 나는 곧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와버렸으며, 이곳이 얼마나 낯선 곳이었는지. 이제는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돌아가고자 했다. 우리가 떠나왔던 그 <텅 빈 공간>으로 말이다. 그곳으로 돌아가, 우리가 듣던 음악을 틀고,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로 결심했다. 그래야만 이 개 같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하지만 아무리 내가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가도, 우리가 떠나온 강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길을 잃고 헤맸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을 찾아냈다. 그곳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혼자 보냈다. 한때 Ms. 초콜릿과 들었던 노래들을 들으며 말이다. 그러면 내 눈 앞에는 초콜릿이 찾아 떠난 신기한 세상의 이미지들이 넘실거렸다. 이제는 탱고에 빠졌겠지. 그리고 누군가의 손을 <다시> 잡았을 테고, 다시금 쏟아지는 조명 아래서 춤을 추고 있으려나.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셔츠에 곧이곧대로 넥타이를 매겠지. 세상이 비웃을지라도, 자기만의 멋에 취해서 말이다.


쓸쓸했다. 하지만 점점, 이 방이 싫지는 않아졌다. 적어도 그때 우리가 함께했던 텅 빈 강당보다는 훨씬 더 아늑했다. 어쩌면 초콜릿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 강당은 좀 쿰쿰하고 답답했다. 하지만 여기엔 엉덩이가 푹 꺼지는 소파가 있다. 내가 나온 사진들도 있었고...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음악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귀를 울려대는 쿠바 음악 대신, 조용한 피아노 소나타를 틀었다. 내 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 피아노 건반 소리를 들으며 다리를 쭉 뻗고, 그대로 잠들었다.


또 언젠가는 우연히 마주친 사람의 외딴 방에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그곳의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는 듯. 그곳에 놓인 LP판의 바늘을 들어 올려 음악을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어쩌면은 이 텅 빈 공간에 어울릴 것만 같은 음악을. 그 소리를 들은 낯선 이가 곧 이곳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금까지 이러한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는 표정으로. 거기서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춤을 췄다. 여전히 난 멋들어지게 차려입었고, 셔츠 윗단 추를 풀었으며, 오래된 가죽 시계를 찼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내가 <원래>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먼 옛날. 초콜릿 은박지에 비친 ms. 초콜릿을 보고, 그가 틀어준 음악에 춤을 추다 생긴 습관인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난 항상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보다는 얇고 긴 잠옷을 좋아했다. 각이 잡혀있지 않고, 축축 늘어지며 살결에 부드럽게 감기는.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나는 손목시계를 들어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어져 다시 그 방으로부터 걸어 나왔다.


나중에 <우리>가 우연히 만났을 때, 그는 아직도 어디선가 그때 내가 틀었던 음악이 어렴풋이 들려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입구는 찾지 못했기에, 그저 어딘가에서 그렇게 음악이 울려 퍼진다고 말했다. 나 역시 무심하게 대답했다. 나도, 누군가가 틀어놓고 끄지 않고 간 음악 소리를 계속 듣는다고.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무도 입구나 출구를 더 이상 찾지 못하는 곳에서, 그 음악소리들은 울리고 있다. 만약 그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마음은 깨나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니 일단 오늘은 맘보를 듣는다. 심연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자비에르 쿠가트의 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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