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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 Apr 08. 2021

음주 철학

우화


이 술집에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있었던 걸까.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이 술집에 앉아있었다. 텅 빈 거리에 존재하는 외딴 술집에, 내 앞에 유리잔 하나를 두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유리잔을.


평생에 걸쳐 이렇게나 술을 많이 마셔왔으니, 나에게 '음주 철학'이랄 게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테다. 그리고 이 '음주 철학'을 표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잔에 무슨 술이 담겼건, 잔 앞에 앉은 사람은 최대한 빨리 잔을 비워야 한다. 모쪼록 그것이 술에 대한 예의인 법.'

그렇게 한 잔을 다 들이키고 나면... 얼굴을 크게 찡그린 후에... 이렇게 외치곤 했다.


"이봐, 바텐더 여기 한 잔 더."

그러면 검은색 양복을 입고, 한 손에는 술병을, 뒷짐 진 한 손에는 흰색 천 쪼가리를 걸고 있는 바텐더가 각 잡힌 태도로 빠르게 걸어와, 잔 속에 독주를 한 가득 부어주었다. 생각해보면 태초에서부터 바 뒤에 존재해 온 이 이상한 놈의 존재를 나는 거의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항상 그곳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그가 운명이나 신 같은 추상적인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아주 가끔이었다. 왜냐면 이놈의 술을 마시다 보면 생각이란 걸 도무지 하지 않게 되니 말이다. 그것도 아주 독한 술을 마시다 보면.


그렇다. 지금까지 내가 마셔왔던 술이란 모두, 맛도 잘 느낄 수 없는 독주들 뿐이었다. 하지만 술을 한 번에 털어 넣는 걸 도무지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앞에 놓인 빈 잔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빈 잔을, 달리 말하면, 잔 속에 빈 공간을 지상 최대의 적이라도 되는 듯 노려보았다. 가파른 아치를 그리는 잔의 곡선... 그 곡선은 마치 사악하게 웃는 괴물의 입모양 같았다. 그 괴물은 이렇게 말했다.


'권태롭지 않아? 공허하지 않아? 네가 앉은 이 쇠락한 술집을 봐. 테이블 보는 좀먹었고... 모든 것에 기름때가 가득하지. 이런 곳에선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차라리 술이라도 들이켜. 잊어. 잊기 위해선 뭐든지 해 봐.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 뒤질 거야?'


"그래!"

나는 괴물에게 대답했다. 그러고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 얼마간은 그 빌어먹은 지루함을 잊을 수 있었다. 빈 공간 속으로 독주를 퍼 넣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존재 방식이었으니.


가끔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내 옆으로 남자들이 추근거리며 다가오곤 했다. 그러면 나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틈 사이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응수했다. 그러면 얼마간은 그 빌어먹을 지루함을 잊을 수 있었다. 무용한 말들이 오갔고 끈적하고 더러운 목소리가 축축하게 고막을 적셨다. 어느 순간은 사랑받는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방치된 생명체였다. 운명이란 놈에 의해서건 혹은 신이라는 가식적인 뭔가에 의해서건. 결국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눈을 떠 보면, 무시무시한 중력의 악마에게 이끌리듯 어김없이 텅 빈 거리의 외딴 바에서 내 눈 앞에 놓인 빈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빨리 잔이나 채워. 술집 서비스가 왜이렇게 좆같아?"

다시 잔을 채웠고, 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젠장.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해도, 잔은 결국에는 텅 비고야 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대리석 조각상이나 잡지 속에나 나오는 완벽한 여자 따위가 아니라, 이른바 몸뚱아리라는 것의 소유자였다. 불타는 독주의 혓바닥이 위장과 내장을 거칠게 쓸어내릴 때, 나는 가끔 술집 바깥으로 뛰쳐나가 젖어있는 텅 빈 뒷골목에 마신 것을 모두 게워냈다. 그러곤 다시 바 앞에 앉아 외쳤다.


"이봐, 한 잔 더."

그러면 다시, 바텐더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고, 종류도 모를 독주를 한가득 쏟아부었다.


"사랑이 필요해. 사랑. 나를 뜨겁게 욕망해 줄 누군가가. 그것도 아니라면 절대적인 것이 필요해."

나는 혼잣말을 지껄였다. 그러곤, 또다시, 독이 깃든 잔을 들이켰다.

나는 오로지 갈망밖에는 몰랐다.


"하지만 술맛이 좆같기는 매한가지구먼."

바텐더는 가끔 나에게 맞장구를 칠 때가 있었다.

"원래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원래 인생이 좆같은 거면 이 좆같은 술이라도 마시고 취해야지, 별 수 있겠나."

바텐더가 술을 따라주었다.

다시 마셨다.

다시 골목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항상 텅 비어있던 골목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거렸다. 뭐, 딱히 상관은 없었다. 나에게는 좀 더 갈급한 육체적 욕구가 있었으니. 그래서 평소와 같이 차가운 건물의 외벽에 불타는 듯한 내 이마를 대고,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구역질을 해댔다. 우웩. 우웨엑.


그러자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잠시 멎었다. 내 뒤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어떤 여자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봐요, 괜찮아요?"

"제가 괜찮아 보입니까?"

"완전히 그 반대죠."

그가 내 등을 토닥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떠들던 여자의 친구들이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 완전히 맛이 갔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이렇게 추운데 저렇게 종잇장 같이 입질 않나."

"구두 때문에 발 뒤꿈치가 다 까졌어. 안쓰러운걸. 발가락이 꽝꽝 얼어붙었겠어."

"도대체 뭘 얼마나 마신 거야?"

"누가 저렇게 될 때까지 술을 준 거야 도대체 왜?"


여자가 내 어깨를 잡아 날 똑바로 일으켜 세우더니, 말했다.

"정신 차려요. 기억해봐요. 당신이 누구인지를.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기억하고 싶을 거라 생각해요? 난 잊기 위해서 마시는 거라고요. 모르겠어요?"

"사실 그건 당신의 진짜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죠.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나도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다고요. 하지만 난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걸 누가 바꿀 수가 있단 말이에요!"

여자는 약간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모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어요."

여자는 그렇게 말해주고는, 곧 웅성웅성하는 무리들과 함께 걸어가 버렸다.


나는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더러워진 입가를 입고 있던 블라우스의 소매 깃으로 한 번 쓰윽 닦아냈다. 그러곤 젖은 휴짓조각처럼 이마에 늘러붙은 덕지덕지한 머리카락을 억지로 쓸어 넘겼다. 눈을 따끔하게 찌르고 있었기에. 그러고선, 침을 한번 탁, 뱉고는 말했다.

"지랄하네. 말이야 쉽지. 내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책임감도 없이 몇 마디 던지고 가 버리잖아."

나는 고개를 한번 저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분노의 감정이 치솟았다. 세상에서 완전히 버려지고 거부당했다는 분노,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사실은 너무도 불만족스러워 급작스레 치솟는 분노 말이다. 당신도 이런 분노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분노. 그것이 나를 고래고래 외치게 했다. 이미 모두가 사라지도 없는 텅 빈 밤거리에다 대고.

"다시 와! 뱉은 말에 책임지는 사람이 되라고! 다시 와서, 나를 끌어내 봐. 이 빌어먹을 술집으로부터. 말만 하는 것들아! 다 똑같아!"

그렇게 텅 빈 거리에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자니, 나 자신이 무척이나 추레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비틀비틀, 또각, 또각 걸어 다시 내가 평생을 보내왔던 나만의 술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꿈치가 무척이나 아리다는 것을 깨달으며.


"어이 바텐더. 여기, 한 잔 더."

나는 바에 앉아 다시 손짓했다. 평소처럼, 바텐더는 그림자같이 다가와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자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 술집은 "왜" 이 맛도 더럽게 없는 독주만을 술이랍시고 내어놓는가? 내 평생 동안 술을 마셔왔는데, 내놓을 술이란 게 정녕 한 종류밖에 안된다는 말인지? 왜 나는 술을 마셔야만 하는가? 왜?

처음으로 물었다. 짙은 어둠 속에 잠겨있는 바텐더의 얼굴을, 그 검게 빛나는 눈을, 제대로 보기 위해 내 눈을 비비적대며.

"어이, 그런데 말이야."

"네."

"왜 항상 같은 술이지?"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께 항상 같은 술을 내오다뇨! 지금까지 얼마나 다양한 술을 내 갔는데요. 그 다채로운 맛을 정녕 못느꼈다는 말입니까?"

바텐더가 매력적으로 웃으며 변명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차갑게, 제정신이 되어갔다. 아마 독주를 모두 게워냈기 때문이겠지.


"그래! 이 자식아. 지금 어디서 약을 팔아. 나도 처음에는 다른 줄 알았지. 그런데 마셔보니 하나같이 목이랑 위장을 태울 듯 긁어대는 독주 밖에는 없더란 말이지. 여기 서비스가 왜 이래? 다른 술 없어? 네가 명색이 바텐더면 말을 좀 해 봐라 이 말이야."

"이런, 손님!"

바텐더는 모욕적이고 경망스러운 말을 들었다는 듯 반응했다.

"손님은 지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온 세상에 물어보세요! 손님이 기대하는 <다른 맛>의 술이라는 건 지구 상에 단 한 방울도 존재하지 않아요. 사실 다들 몰라서 그렇지, 사람 사는 건 비슷비슷하다고요."

"왜지? 왜냔 말이야!"

"원래 인생이 그런 거니까요. 모르시겠습니까? 가령, 저기 구석에 앉아계신 분이 보이실 겁니다. 저분은 지금 무엇을 마시고 있을까요. 궁금해요? 놀랍게도 말이죠, 당신이 마신 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가질 수 없는 것은 항상 아름다워 보인다.' 수천 년의 선조들이 이렇게 말해오지 않았겠습니까.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삶이란 놈을 악덕 주류도매상이라고 생각해 봐요. 그놈이 야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적어도 누구에게나 모두 같은 술을 공급하고 있다고요.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맛이지요."

"정말이야? 그러면 그 삶이라는 악덕 업주에게 물어봐야겠군. 왜 이 좆같은 술만 내오느냐고 말이야."

"그래요. 그놈을 탓해요. 애꿎은 내 멱살을 잡지 말고. 자. 내가 더 맛있게 타 줄 테니까."


나는 잠시 잡고 있던 바텐더 놈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나 제정신이 되어서 그런지, 그놈이 새로운 바틀을 찾는 척 등을 돌릴 때 그놈의 입가에 스쳐 지나가는 비웃음의 단서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한담?'

분노가, 마치, 독주처럼 내 위장을 쓸고 내려갔다.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들을. 기름때가 찌든 나무판자들. 기만하듯 전시된 화려한 술병들. 내 앞의 깊고 텅 빈 잔. 귓가에 꽂히는 싸구려 사랑 노래들. 그리고, 이 빌어먹을 악마, 바텐더.

그래. 생각해보니 이 바텐더라는 놈은 평생을 바 뒤에서 서성이며, 더럽게 맛없는 독주로 내 잔을 넘치게 채우고는, 인생이 다만 이 비루한 술집 뿐이라고, 그 외에 다른 그 어떤 선택지도 없노라고 말하며 내 눈을 멀게 만들어 온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믿을 것 같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도대체 <왜>인지. 넌 누구고, 여긴 어디인지."


그러곤... 주방과 실내를 가로막고 있는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원래는 이러한 통로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둘러보자니 이 허름하고 작은 술집의 전경이 너무도 잘 보였다.) 역시 바텐더는 만만치 않았다. 감히 손님에게 발길질을 해 대기 시작한 것이다. 내 종잇장 같은 블라우스에 발자국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피를 퉤 뱉었다. 시건방진 바텐더는 웃음기를 거두더니 말했다.


"이런 시건방진 년을 봤나. 네년이 프로메테우스처럼 나에게 반항을 해 보겠다는 거야? 네가 자연의 준엄한 법칙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태어나고서부터 배워오고 마셔 온 술맛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계란 같은 개인의 몸으로 장대한 운명의 암벽에 부딪혀 보겠다는 거야? 유한한 여자의 몸뚱아리를 지니고 무한한 신성에 도전하겠다는 것이야?"


이 자식의 장광설은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이 입만 살아있는 놈이 뭔가 멋진 대사를 생각해내려고 머뭇거리는 틈을 타, 나는 내가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서 차 버렸고, 종잇장 같던 블라우스를 뜯어서 손에 감았으며,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제대로 한 방 갈겼다.


퍽! 아주 경쾌한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아. 내 생에 이렇게 기분 좋은 순간은 다시는 없으리라. 나는 직감했다.


"으-."

하지만 이 한 방의 일격으로 술집의 주도권을 강탈할 수 있으리라 믿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예상대로 바텐더는 격렬하게 반격했다. 각 잡힌 셔츠와 양복이 뜯어질 때까지 우리는 싸웠다. 아주 처절하게. 그런데 놀랍게도, 그림자 속에 푹 잠겨있던 그 그럴싸한 옷가지가 뜯어지자, 바탠더는 그저 한 명의 남성일 뿐이었다. 운명도, 신도, 혹은 악마도 아닌.


우리의 지리한 싸움의 기록을 여기에 일일이 기록하지는 않으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겨우 이겼다. 바텐더를 완전히 쫓아냈다거나, 죽였다거나, 입을 완전히 닥치게 만들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는 이제 바 한쪽의 기둥에 묶여있다. 각 잡힌, 신사적인, 권위의 향취가 깃든, 모든 너절한 옷가지들은 이제 그를 포박하는 족쇄가 되었다.

"으으.... 으..."

이 바 한쪽에서는 언제나 이 신음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싸움에서 얻은 내 상처들과 멍들은 흉터로 남을 테고-. 

왜냐면 나 역시 바의 안쪽에서, 모든 옷을 잃고 발가벗고 서 있었기에. 구두. 블라우스. 브라자. 따위의 모든 것들이 지난한 싸움의 과정에서 모두 찢겨 나갔기에.

대신 내가 얻은 건 술 보관장 앞에 설 <자유>였다.


거대한 오크나무 진열장 안에, 수많은 주류들이 늘어서 있었다. 세상의 모든 책이 담겨있다던, 무한한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과거에 쓰였고, 지금 쓰이고 있으며, 미래에 쓰일 책들이 담겨있다던 그 무한하고 두려운 보고를. 이 진열장도 그와 같았다. 나는 진열장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삶이란 농담을 위해선 술이 필요했으니.


맛을 찾아내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전과는 달리, 내 앞에 수많은 선택지들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제 나의 잔에 액체를 부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었으니. 가끔은 구석에 묶인 바텐더를 발로 몇 대 차며 이토록 꽁꽁 숨겨 둔 ‘좋은 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는데, 그 역시 별다른 지식은 없었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잔을 엎어버렸다. 이유는 뭐, 예상할 수 있다시피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맛이 없다는 건, 모쪼록 음주 철학에 어긋나는 일이지 않겠는가. 사람이 가진 음주 철학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쓰기만 한 독주 따위를 털어 넣는 건 술에 대한 모독이다. 모쪼록 맛있는 술을 음미하며 마시는 것이 술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음주 철학에 경건히 따르며 술 창고를 뒤적거리자니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도무지 맛있는 술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질러보지 않은 건 아니다. 무정한 운명에게, 신에게, 혹은 그 누군가에, 외쳤다. "도와줘!" 물론 대답은 없었다. "내가 정말이지 불가능한 것에 도전한 거야?" 때로는 절망했다. “이것이 당신에 반역한 대가란 말인가? 거기, 듣고 있는 그 누구 건 말이야!”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하지만 아무리 허공에 팔을 내젓고 주먹을 휘둘러 보아도 오로지 <나> 뿐이었다. 그리고 기둥에 묶인 바텐더 한 명과. 결국 이 술집의 주인은 오로지 나였던 것이었고, 술을 만들고, 따르고, 마실 사람도 오로지 나 자신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간 왜 술을 섞어 마실 생각은 못했던 것인지. 어느 날은 오렌지색 리큐르와 사파이어 색 리큐르를 섞어보았다. 시고 단 맛이 색다르게 뒤섞였다.

“흠... 이거 괜찮은데?”


그때부터 스스로를 위한 술을 아주 세심하게 제조하고 연구했다.

새로운 술을 가져오기 위해 진열장 속으로 멀리, 더 멀리 들어가 보기도 했다. 가령.... 멜론 맛이 나는 이 녹색 리큐르. 이 속에는 울창한 열대의 정글을 걸었던 기억이 담겨 있었다. 오로지 나 홀로, 훌쩍 떠나, 깊디깊은 덩굴을 헤치고, 이끼로 매끄러운 바위를 힘겹게 디뎌가며 열대지방의 산에 올라갔던 적이 있다. 비구름과 땀방울에 온 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을 때. 물안개 속에 휩싸인 세상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조각상처럼 신령스러웠다. 녹색 얼굴. 이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리라고 다짐했더니, 녹색의 술로 증류되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다가와 술병을 놓고 가기도 했다. 걸쭉한 디저트 와인. 그것은 우리가 주고받던 걸쭉한 농담들을 담고 있었다. 혓바닥에 매끌하게 감겼으며, 밤 새 떠들고 난 다음에 입 안에 느껴지는 텁텁한 단 맛을 떠올리게 했다. 이 누추한 술집에, '손님'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를 놓고 갔다. 깨진 술병. 상한 포도주. 듣도 보도 못한 레몬 리큐르. 때로는, 칵테일을 장식할 민트 잎까지. 나는 손님들을 위해 기름때가 눌러붙은 바를 행주로 박박 닦아냈다.


그러나 빈 공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잔 안의 빈 공간 말이다. 아무리 맛있는 술을 붓고, 마셔도, 웬일인지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때면 반투명한 흰색 액체를 부었다. 혼자 걷던 밤에 증류한 리큐르였다. 외딴 호숫가를 걷다가 마주한 달빛이 깃든 술이었다. 폭력과 증오와 광기로 가득한 이 세상 위를 신비로운 빛으로 감싸는. 그날 밤도 어김없이 나는 혼자됨에 외로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라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달빛은 마치 오팔같았다. 쓸쓸했다. 결국 어떤 맛을 내더라도, <홀로 됨>이라는 빈 공간은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술맛은 점점 더 좋아졌다. 하지만 한두 방울이 이 위태로운 균형을 완전히 망치곤 했다. 잘못 말해진 말, 배신당한 슬픔, 혼자 남겨졌다는 분노. 이런 것들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잔을 망쳐버리고 다시 제조하자니, 내 음주 철학 역시 맞춰서 변해갔다.


"칵테일은 삶의 기쁨이고, 칵테일 제조는 젠zen과 사뭇 비슷하다.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되, 평정심을 잃지 마라. 부지런히 손목을 움직이되 날렵하라. 그리고 항상 기억하라. 잔 안에는 언제나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빈 공간은 사실 컵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의 손잡이 부분에 있었다. 자그마한 기포 조각으로. 잔이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했던, 원초적인 빈 공간으로.


그러니, 친구들이여, 나는 지금 가득 찬 내 잔을 들어 올린다. 당신들을 위해.

건배사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슬퍼하지 말라."

너무 짧다고? 그렇다면 사족을 덧붙이겠다.

"당신만의 웃음소리와, 고독과, 슬픔과, 기쁨이 가득한 칵테일을 만들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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