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c Jul 08. 2023

배고픈 아이

예술가란 어떤 존재일까?

옛날 옛적 한 배고픈 아이가 텅 빈 집에 살았다. 곳간은 항상 비어있었고 식탁에는 먼지와 거미줄만이 가득했다. 아주 오래전, 이 먼지 쌓인 식탁 위에도 한때는 따스한 음식이 놓였던 적이 있었다. 맛도 기억나지 않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였다. "착하지, " 그리고 "착하지." 스튜를 든 손은 허공으로부터 솟아 나와 아이의 눈앞에 접시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맛있게 먹으렴," 그리고 "착하지."


그러나 어느 순간, 신은 기별도 없이 죽어버렸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고아'라고 부르곤 했다. 그때부터였다. 식탁이 텅 비게 되고, 온 집이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이게 되고, 아이의 배가 고프기 시작했던 건. 그렇다. 아이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허기에 시달린 아이는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요. 밥 좀 주세요.' 그러나 배고픈 아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았기 때문에 그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했다. 어쩌면 텅 빈 집 안을 배회하던 유령들만이 그 기어 나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허기를 버티고 버티던 어느 날. 아이는 드디어 집 밖을 나섰고, 눈에 보이는 문이라면 모두 두드리며 외쳤다. '저기요, 배가 고파요. 밥 좀 주세요.'


그러자 한 대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넌 왜 이렇게 맨날 배가 고프냐. 그리고 징징대냐. 옛다 여기 밥이다. 먹어라.’ — 배고픈 아이는 그 밥을 먹었다. 흰쌀밥에 미역을 푼 평범한 한 끼 식사였다. 아이는 먹으며 말했다. '이것이 치욕의 맛이구나.' 그러니까, 요청한다는 게 때때로 얼마나 구질구질한 일인지 아이는 깨달아버렸던 것이다. 아이는 말했다. '강해져야 해. 이제는 나 혼자 뿐이야.'


그때부터였다. 배고픈 아이가 스스로 밥을 짓기 시작했던 것은. 우선, 아이는 식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굴러다니는 낱알, 마당에 떨어진 도토리, 어딘가에서 훔쳐 온 말라비틀어진 오리 다리, 쓰임을 알 수 없는 향신료, 누군가가 버린 오렌지 조각들이었다. 그 재료들로 아이는 세상에 없던 요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왜냐면 요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달리 몰랐기 때문이다. 고로.... 아이는 주워온 낱알을 얄팍한 오리 다리에 콕콕 박아 넣었고, 도토리를 빻아 금가루처럼 뿌렸으며, 오렌지 조각들로 그릇을 만들어 오븐에 넣고 구워냈다. (아이는 직관에 충실했다.) 오븐에서 <배고픈 아이 특제 정식>을 꺼내자 툭 튀어나온 다리뼈 부분과 붙인 낱알, 그리고 도토리 가루가 묻은 껍질 부위가 모두 검게 불 타 버렸다. '음... 아름답군.' 아이는 생각했다. 그러더니 타지 않고 남아있던 일부분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이렇게 아이는 요리사가 되었다. 쓸 수 있는 재료라면 모두 긁어모아 요리를 하기 시작하니, 이제는 실력이 출중하여 온갖가지 현란한 요리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강강술래 하는 아이들 모양의 라비올리, 혈관 파스타, 바닷가재 손과 악수하는 굴로 만든 손 같은 요리들이었다. 배고픈 아이의 카탈로그는 끝도 없었다. 단 한나절도 지속될 수 없는 진기한 요리들이다. 누군가가 먹지 않고 호기심의 캐비닛에 넣는다면, 물론, 며칠 지나지 않아 썩어버릴 것이다. 고객들은 드문드문 이 아이의 식당을 찾아왔다. 맛은 별로였지만 그 독창성에 모두가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옆동네 요리사가 아이를 찾아왔다. '여기가 독특한 파인 다이닝이라길래 배가 고프기도 하고, 맛도 한번 보고 싶어 찾아왔수다.' 아이는 무척이나 요령껏 사슴 고기, 토끼 고기, 오리 고기를 차곡차곡 쌓아 손바닥 모양의 고기 파이를 구워냈다. 고기 파이 손바닥 위에는 오렌지 카라멜을 입힌 홍옥 사과 하나를 올려 두어 내갔다. 요리사는 아이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후 말했다. '뭐, 그냥저냥, 맛은 괜찮은데 배가 하나도 안 채워지잖아?' 이 코멘트를 들은 아이는 물론 극대노했다. '그럼 당신이 소위 배를 채울 음식을 만들어서 한번 줘 보던가.' '그러지.' 옆동네 요리사는 소매를 걷더니, 단 30분이라는 시간만에 똑같은 재료로 평범한 스튜를 끓여 아이가 앉은 식탁 위에 내어왔다. '참으로 무엄하군. 요리는 무릇 8시간 정도는 투자해야 하는 신성한 행위라고.' 이렇게 말하며 아이는 그 스튜를 입가에 가져갔다.


물론 맛에 대해서라면 아이는 너무도 오랜 시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 그 스튜를 정확히 <맛있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스튜는.... 배가 찼다. 아이는 잠깐이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내내 속을 긁어댔던 배고픔을 잊었다. 잔인한 배고픔. 뜨끈한 스튜의 국물이 오랜 시간 주려 말라 비틀린 위장을 따스하게 감싸며 울렁였다. 이 느낌, 이 감각! 그렇다. 기억도 나기 전, 그러니까 배가 고프기 전의 어떤 기억을 연상시켰는데. '착하지,' 그리고 '착하지,'하는 목소리와 그릇을 꽉 잡고 내려놓던 길다란 손가락 같은....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음, 이 음식은 쓰레기야. 사실은 음식이라도 말할 수도 없어.' 그러곤, 익숙치 않은 음식을 모두 게워냈다. 그러자 옆 동네 요리사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저 아집에 사로잡힌 바보 같은 인간을 봐라! 넌 요리가 뭔지 몰라. 요리의 본질이란 주린 배를 채워주는 행위이지. 그게 없으면 그 어떤 인간도 살아갈 수 없어. 그러니 사람을 배고프게 만드는 네 요리는 요리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야. 그러니 네게 요리사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게나. 그러면 이 몸이 견습 요리사로 받아주마. 어떻게 생각하나?'


아이는 길길이 날뛰며 말했다. '꺼져라. 내 요리를 부정한다는 건 곧 나를 부정한다는 거지. 나는 굴종대신 주림을 택하겠다. 이 독재자 같은 놈아, 저리 가. 당장 꺼지란 말이다!' 이 폭언을 들은 옆동네 요리사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만은 다시 자신의 주방으로 돌아가는 길을 서둘러 떠났다.


그뿐이다.


아이는 계속 요리를 했다. 이 깡마른 요리사가 하는 음식점에는 역시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가끔, 우연찮게 아이의 식당에 들린 손님들은 말하곤 했다. '이 음식은... 마치 굶주림 그 자체가 굳어진 화석 같군.... 음식으로 주림을 논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야.' '맞아. 이게 바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든 음식이라네. 이 지구의 다양성이란 얼마나 무한한가!' 그러면서 굶어 죽어가는 뒤틀린 강아지 모양의 베이컨 푸딩에 숟가락을 푹 집어넣어 한 숟갈을 퍼냈다. '특별해. 특별하고야 말고.' 그러곤 젤리를 입안에 넣고 굴렸다. '그런데 솔직히 맛은 좀 없구만. 안 그런가?'

매거진의 이전글 음주 철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