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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 Aug 23. 2017

고장 난 피아노

밴쿠버 섬, 빅토리아의 외딴 해변가에서.

나는 고장 난 피아노, 고장 난 건반. 조율이 오랜 시간 되지 않아 먼지 낀 채 방치된 현악기. 하여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건 어딘지 기이하고 냉소적이고 뭔가가 빠진 듯한 슬픈 멜로디일 뿐. 


그럴지라도, 이 파도치는 바다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보석처럼 박힌 보라색 꽃들은 나를 연주하게 하니, 대지는 광막하고 바다는 위대하며 그 위에선 수천만 가지 생물들이 제각기 조잘대며 <세계>라는 음악을 연주하듯, 나 역시도 현이 나가고 고장 나고 곳곳의 건반이 부숴졌어도 나름대로 한 곳을 차지하고 앉아 계속, 그리고 계속- 내가 들은 리듬과 은밀한 음악과 피부의 따사로움과 바람의 선뜻한 비린내를 연주한다.


그것이 기이한 음악일지라도 말이다. 사실, 아무도 듣지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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