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만 해도 에너지의 99퍼센트를 수입했던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반세기도 안되는 세월 만에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있다.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에서 얻은 전력은 80%에 달하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10배가 넘는다. 이 나라는 심훈이 쓴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들이 농촌 혁신 사례의 모델로 삼았던 북유럽의 ‘덴마크'이다. 지금은 복지국가와 행복 순위 상위 국가로 유명한 덴마크지만, 불과 얼마전 19세기 유럽의 최빈국중 하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덴마크를 지금의 복지국가와 재생에너지 강국을 만든 원동력에는 ‘공동체'가 있었다. 특히 지금의 재생에너지 강국이 되기까지는 공동체에서 시작한 풍력발전 프로젝트가 그 기틀을 마련했고, 그 풍력발전의 시작에는 깨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시작한 담대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1970년대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던 덴마크는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1973년 당시 유가는 4배로 치솟았고, 옆 나라 스웨덴 처럼 원자력 발전을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치가들과 에너지 회사들은 국민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덴마크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정부는 에너지 수요를 맞추기 위해 원자력을 도입할 계획이었고, 이미 5곳의 원자력 발전소 부지가 확정된 상태였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대안은 거의 없었다. 상황은 지속 불가능해 보였고, 1974년 크리스마스 때 트빈(Tvind)스쿨의 교사 그룹은 풍력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한다. 학교 캠퍼스가 위치한 서부 유틀란드에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풍부한 자원인 바람을 활용하자는 것이 아이디어의 출발이었다. 그들은 트빈스쿨에 필요한 전력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풍력발전기 건설을 통해서 다른 길이 있음을 증명해 보기로 했다. '에너지는 스스로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트빈스쿨은 이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사람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해결책을 제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폴케호이스콜레의 교사들이 풍력 발전소를 만들겠다는 대담한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풍력 발전 역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그 누구 하나 풍력 발전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큰 풍력발전기 건설은 처음 시도되는 일이라 전문가들은 대부분 회의적이었다. 결국은 공동체의 힘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폴케호이스콜레>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Folk high school)는 1800년대 중반 덴마크의 폴케호이스콜레 선구자였던 니콜라스 그룬트비의 교육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특별한 형태의 비형식 성인 교육을 지칭한다. 오늘날 덴마크 전역에는 80여 개의 독립적인 폴케호이스콜레가 있는데, 이 학교들은 삶의 깨달음(life enlightenment), 대중의 깨달음(public enlightenment), 민주적인 교육(democratic education)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폴케호이스콜레는 단순한 개인의 안위를 넘어서 삶 그 자체를 위한 교육을 목표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폴케호이스콜레는 17.5세 이상의 학생들을 위한 기숙 학교로, 위로는 나이 제한이 없다. 입학을 위한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도 않다. 정해진 커리큘럼도 없고, 시험도 없고, 그래서 성적도 없다. 이 내용은 또 법으로 정해져 있다.
<사진 1> 트빈스클 프로젝트 팀의 회의 모습 ⓒ tvindkraft.dk
트빈스쿨의 교사들은 신문에 "풍차 제작자를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내고 다양한 사람의 참여를 기다렸다. 광고가 나간 이후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고, 풍력 발전기 제작을 위한 풍차 팀이 탄생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젊고 열정적인 지원자들이 모였고 그들의 평균 연령은 21세였다. 1975년 당시 많은 젊은이가 색다른 교육, 공동체 생활,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도전의 기회를 찾고 있을 때였다.
이전에도 풍차의 고대 기술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실험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풍차 팀은 에너지 독점에 맞서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풍력 발전기를 만드는 최초에 도전하고 있었다.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세계 최초의 메가와트(MW) 풍력 발전기가 되는 도전적인 프로젝트였지만 풍차 팀은 풍력 발전기 제작에 대한 경험이 없었고, 조언을 구할 전문가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도전적인 프로젝트였지만 공동체의 참여가 어느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참가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 모두의 풍차이기 때문에 처음 땅을 팔 때 모두 함께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삽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은 숟가락이나 다른 물건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저는 땅을 파기 위해 더러운 셔츠를 입고 숟가락을 들고 바로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 엘스 쇠렌센
<사진 2> 풍력발전기의 터를 잡기 위해 참여한 자원봉사자들 ⓒ tvindkraft.dk
풍차 팀은 설계와 건설 작업 프로젝트를 담당했으며, 도면 작업과 계산 작업을 도와줄 전문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재정은 교사들이 비용을 충당했다. 풍차 팀은 경험이 부족했지만 겸손했고, 경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기초 다지기, 철골 공사, 콘크리트 메우기, 재료 조달, 이 모든 과정을 학생과 교사가 하나가 되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풀어갔다. 안전기준도 스스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웃던 전문가나 언론들도 풍차가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보고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덴마크 전역에서 학생들과 청년들이 매주 적어도 500명씩 돕겠다고 찾아왔다.
크레인 같은 건설장비는 물론이고 발전기도 중고품으로 구입했다. 날개의 특수가공법은 배를 만드는 공장에서 견습생으로 스크류 만들기를 배운 이가 도움을 줬다. 이렇게 해서 약 650만크로네(약 14억3천만 원)라는 당시 시가의 몇십분의 일이라는 적은 비용으로 1978년에 풍차를 이용한 최초의 상업용 발전 풍력발전소를 완성했다. 50미터 크기의 대형 발전용 풍차 건설 프로젝트에 10만 명이 참여했고, 높이 50미터, 날개 직경 54미터, 최대출력 2,000킬로와트,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발전용 풍차를 건설은 비전문가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3> 완공 당시의 풍력발전기의 모습 ⓒ tvindkraft.dk
공동체가 같이 의논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들어 낸 이 풍차는 그 뒤 덴마크 정부나 유럽의 여러 기업, 일본의 미쓰비시 중공업 같은 전력회사에서 큰 비용을 들여 만든 풍차보다도 성능이 뛰어났다.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며 현대 기술로 건설한 거대 풍차도 4만 시간이라는 엄청난 가동시간과 발전 실적을 따라잡지 못했다.
트빈에서 풍차 만들기가 성공하자, 다른 폴케호이스콜레와 민간의 작은 기업들도 풍차 발전을 시도했다. 정부도 보조금으로 주고 있어서 개인이 출자하는 지역협동조합 형식으로 풍력발전기가 계속 늘어났다. 그 결과 풍력발전기로 발전한 전기를 전력회사에 팔거나, 또 소비한 전기만큼 요금을 상쇄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누구나 이익을 낳는 발전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필요에 대한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프로젝트는 덴마크에서 풍력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시작했으며 다른 공동체에서 빠르게 모방하였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법적 특허로 디자인을 보호하는 대신 가능한 한 많은 풍력발전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했다. 덴마크 국민들은 결국 1985년 정부로부터 '어떤 형태의 원자력발전 건설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받아냈다.
공동체가 어떻게 정부의 의제를 바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트빈 프로젝트는 자원봉사자와 관리인에 의해 유지 관리되면서 사회적 유산을 남겼고, 이후 트빈 기후 센터의 설립에도 영감을 주었다. 이 센터는 지역에 유기농 채소를 공급하고 폐기물을 재활용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나무를 심고 아프리카 학교에 태양열 램프를 제공하는 데도 노력하고 있다.
<풍차의 날개를 나르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 tvindkraft.dk>
트빈드크래프트 프로젝트의 성공에는 협력이 핵심이었다. 자신들이 오래된 기술인 풍차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계산과 공학 전문가들과 사람들과 논의했다. 직접 해보는 경험을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 등은 나중에 다양한 기술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공유할 수 있었다.
트빈스쿨의 공동체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들은 기존 업계의 반대를 포함한 강력한 힘에 맞서야 했다. 한 회사는 풍력 에너지 산업에 해를 끼칠 수 있으니, 프로젝트를 포기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들은 경험 부족을 철저함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든 세부 사항을 살펴보고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고, 모르는 것은 배워야 했다. 이것이 트빈 프로젝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는 주된 이유이며, 풍력 발전의 역사에서 전설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트빈 프로젝트 풍차의 현재 모습 ⓒ tvindkraft.dk>
[참고자료]
삶을 위한 학교 - 시미즈 미츠루, 2014년
https://www.tvindkraft.dk/how-it-began-the-history-of-wind-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