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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Jun 27. 2021

에세이 클래스 첫번째 날

마포구 망원동 xxx-x번지의 글쓰는 남자

한없이 미적대고 싶은 일요일 오전,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휴식을 핑계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웅이를 껴안고 허리가 아파올 때까지 뒹굴댔을 테지만 오늘은 갈 곳이 있었으니까.


'아~ 다음 주에는 꼭 머리 염색도 하고 기장도 잘라야지... 매번 말리기 귀찮아 죽겠네.' 치렁치렁한 머리를 대충 말리고 평소 입는 오피스룩이 아닌 편한 고무줄 바지와 땅에 끌릴 것 같은 로브를 꺼내 입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충동적으로 손가락이 움직여 신청해버린 한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 첫날이다. 들뜬 기분만큼이나 맑은 하늘에 감사하며 네비에 '마포구 망원동 xxx-x번지'를 찍었다.


'평소 글 스타일도 그렇고 인스타 라방에서 보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낯 엄청 가리실 것 같은데... 다들 입 꾹 다물고 글만 주구장창 쓰고 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글쓰기 수업 자체도 기대가 되었지만 평소 인스타에서 눈여겨보던 작가님을 직접 만나려니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초창기에 아무런 장식 없는 밋밋한 크래프트 쇼핑백에 삐뚤빼뚤 어린아이 같은 글씨체로 따뜻한 위로의 글을 남기고, 한 번씩 서프라이즈 이벤트라며 지하철 짐 보관소에 꽃을 숨겨두고 가는 모습을 쭉 보아온 터라 내 머릿속 그는 낭만적이고, 살짝은 우울함이 밑바닥에 깔려있고 자신의 세계가 강한 전형적인 비주류 예술가 느낌이 강했다.


이 모든 생각은 그저 기우였다. 작업실에 도착해 짧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거기엔 내 마음대로 그린 작가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건강하게 루틴적인 삶을 살고 유쾌한 화법으로 더 이야기 나누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전 모든 것이 다 슬프게 보여요. 집에 들어설 때 꼬리 치는 우리 집 강아지도... 건강에 전혀 이상 없이 출산한 누나와 조카도... 행복이 최고치에 다다르면 어느덧 슬픔으로 바뀌어요.'

...라고 그는 말했다. 본인이 말하는 디폴트 설정값은 비록 '슬픔'일지라도, 그건 우울하고 차가운 그늘 같은 슬픔이 아니라 인생의 작은 조각들까지도 챙겨보는 세심함이 동반된 복합적인 슬픔같이 느껴졌다.


아... 귀국 후 지난 10여 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강한 겉모습만 보고 나를 멋대로 정의 내린 사람들을 정말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랬던 내가 오늘 그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틀에 나를 맞추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해외파', '문과생', '어린 여자'.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지극히도 평범한 단어들이지만 그 기저에 깔린 사회의 잣대와 숨어있는 감정들은 훨씬 더 독하고 썼다.


그들은 '해외파'에 개성 강한 옷차림을 한 나를 유교사상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람일 것이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문과생' 출신이라 IT 업계에서 기술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고생할 것이라 했으며, 시간이 흘러 남들보다 높은 직급을 달고 이직하자 '어린 여자' 주제에 남초 업계에서 어디 40, 50대들 관리를 하냐며 혹시 낙하산 아니냐고 뒤에서 신나게 소설을 써댔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다행히 그런 사람들은 나를 더 겪어가며 생각이 바뀌었고, 나도 웃으면서 내게 달려있던 꼬리표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편견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나 잘 알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작가님에게 프레임을 씌우고 있었다니... 그래, 우리는 생각보다 남들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이 많다. 내가 겪은 그 사람의 일면만 보고 각각의 이미지 조각들을 이어 붙여 하나의 상을 만들어 낸다. 그게 좋은 이미지면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다며 실망하는 날이 올 수도 있고, 실체보다 부정적인 이미지였다면 '어? 이 사람 생각보다 괜찮네?' 라며 시각을 달리해 한번 더 기회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쪽이건, 서로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가 될 수 있으니 이제는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이번글은 첫수업에서 (백만년만에) 노트에 연필로 쓴 습작을 옮겨 적었습니다.

제한된 시간안에 쓴 글이라 미흡하지만 브런치에도 남겨놓고 싶어 기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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