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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Jul 02. 2021

[잡지 기고글] 우리 동네 이야기

'남해에는 투박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이 차린 밥상이 있다'


브런치를 통해 모 잡지사에서 기고 요청을 받아서 쓴 글입니다. 완성된 책을 받아보니, 사전에 논의한 것과 달리 마지막에 바뀐 지면과 디자인 상황에 맞추어 글을 멋대로 자르고 덧붙이고 짜깁기 해놓았더군요. 남해 한 달 살기의 추억을 담은 하나뿐인 기념품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응했던 건데, 한번 쭉 훑어보고 남이 쓴 것만 같은 글에 속이 상해서 책장 한구석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아쉬워서 사진 몇 장과 함께 원문을 올려놓아요. 앞서 쓴 글과 내용이 많이 겹치는 점은 양해 바랍니다 :)




'남해? 여수, 통영, 거제... 남쪽 지방이 다 남해 아니야?' 

지난 10년간 국내여행을 숱하게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 남해는 특정 지명이 아닌 남해바다를 끼고 있는 모든 곳이었다. 심지어 어느 곳은 전라도, 어느 곳은 경상도 소속(?) 인데도. 


언젠가부터 소셜미디어에서 보이는 독립서점을 운영한다는 글, 인도에서 들여온 패브릭 제품을 파는 상점의 이야기, 진로를 걱정하는 청춘들의 한 달 살기를 지원한다는 정부 프로그램까지... 눈길을 끄는 특이한 콘텐츠를 클릭해보면 모두 다 남해 소재지였다.


‘대체 남해에 뭐가 있길래?’ 궁금증이 일었다. 마침 전셋집을 정리하고 연말에 호주 본사로 나가기 전까지 부모님 댁에서 임시로 머물기로 하여 모든 짐을 옮겨둔 터였다. 비록 재택근무 중이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곳에도 묶여있지 않은 지금이 딱 한 달 살기를 하기에 적격인 타이밍 같았다.  


주변 지인들은 크게 걱정하며 제주도, 강릉, 부산 등 편한 곳으로 가라고 만류했지만, 이미 남해 두 글자에 꽂힌 자에게는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하룻밤 만에 숙소 예약을 마치고, 가고 싶은 곳들 목록을 만들어 내 인생 최고 장거리 운전 루트 파악까지… 그 모든 것을 끝냈다.



남해 미조면 작은 어촌마을 안에 자리 잡은 빨간 벽돌집. 덩굴장미가 피어있는 울타리 넘어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집 뒤에는 나지막한 산이 둘러싸고 길을 건너면 몽돌해변길을 따라 산책을 할 수 있는 집이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이곳이 한 달간 내 몸을 뉘일 곳이구나 직감했다. 평생 고질병인 허리디스크 때문에 딱 중간지점인 전주에서 하루 자고 천천히 이틀에 걸쳐 남해로 내려왔다. 주인 잘못 만나 초보 시절 주차하다 앞에 폭 파인 보조개가 생긴 내 아반떼와 함께.
 
 도착 후 주린 배를 쥐고 맛집을 검색하다 보니 뭔가 이유 모를 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평생에 걸쳐 축적되어온 먹방러의 빅데이터가 나에게 위험 감지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아… 남해엔 멸치쌈밥 빼면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대기업에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영업을 하셨던 아버지 덕에 나는 어릴 때부터 맛집이란 맛집은 참 많이도 다녔더랬다. 거기에 해외에서 10년 동안 살았던 덕에 온갖 독한(?) 향신료에도 면역력이 생겨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는 것에 겁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요리를 좋아하는 남동생이 차리는 다양한 국적의 음식 앞에서 ‘맛있다 맛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함께 수다 떠는 주말의 저녁시간을 참 사랑했다. 


이렇게 기준치도 높고 ‘국내 여행은 먹방이지!’ 라며 음식에서 낙을 찾던 내가 남해에 도착한 지 딱 이틀 만에 맛집 검색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인스타 맛집도, 현지 맛집도, 그 어느 것 하나 흡족한 곳이 없었다. 지난 10년간 열심히 다닌 국내외 여행지 중에 음식에 대한 기대가 이렇게까지 떨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엄마가 "쉽게 상하는 거 아니니까 오이지 무친 것 좀 챙겨가~"라고 할 때 들고 올걸. 귀찮아서 두고 온 오이지가 눈앞에서 아른거릴 줄이야...




하루는 숙소 사장님께 "사장님~ 왜 편의점이랑 마트에 살게 없어요?"라고 징징대며 급히 온라인 마트에 주문을 넣어놓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요즘 유행하는 모양만 흉내 낸 레트로 스타일이 아니라 수십 년간 영업해온 찐 레트로 가정식 백반집이라는 곳에.



 두시를 이미 넘긴 애매한 시간이라 혼자 열심히 살짝 튀겨진 듯한 가자미구이를 발라먹고 있는데, 주방에서 사모님이 나오셔서 “손님~ 뭐 모자란 거 없어요?”라고 말을 거셨다.


"생선도 맛있고 반찬도 다 맛있어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내 수다쟁이 바이브를 감지하신 건지 맞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고는 본격 인터뷰를 시작하셨다. 

다랭이 마을 출신으로 타지에서 지낸 5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고향인 남해에서 보내시며, 20년 넘게 이 식당을 운영 중이라는 58년 개띠 사모님은 혼자 차 끌고 서울에서부터 한 달 살기 하러 내려왔다는 말에 기함하셨다. 

"아니, 혼자 있으면 먹을 건 있어요? 김치 좀 싸줄까? 겉절이 어때 겉절이!"라고 크게 김치를 외치셨다. 

여긴 젊은이들은 읍내 나가서 먹고, 인스타 맛집은 비싸기만 하고 째~깐한거 주며, 어르신들은 밭에서 길러 자급자족한다며.


"괜찮아요~ 여기 와서 먹으면 되죠. 생선구이 맛있어서 저 또 올 거예요"라고 손사래를 치며 여러 번 실랑이 끝에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사장님, 사모님, 둘째 아드님 모두에게 양손을 흔들며 바이 바이를 한 뒤에야. 



그제야 남해의 인심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철저히 교육된 세련된 매너의 서버들로 무장한 파인 레스토랑은 없지만, 이곳에는 진심으로 나의 삼시 세끼를 걱정하는 따뜻한 이들의 작은 공간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 들린 항구 근처 복국 집에서 노부부 내외가 투박한 손으로 내어준 작은 초밥 두어 개와 ‘이건 우리가 먹으려고 만든 건데 한번 드셔 보세요.’라고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미처 감춰지지 않는 정겨운 말투가 있었다.
 
 연이은 화상 회의 때문에 끼니를 놓치고 세시가 넘어서야 아점저를 한 번에 해결하러 간 양식집에서 브레이크 타임임에도 불구하고 열흘 만에 다시 찾은 나를 알아보고 과일과 커피까지 챙겨주신 사장님 내외도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작은 피자 하나를 추가 포장 부탁했더니 또 내색 않고 캔 콜라를 슬쩍 넣어주었다.


하루는 장을 보다가 어디선가 리뷰를 본 것 같은 낯익은 반찬가게에서 생각지도 않던 명란젓을 한 팩 고르고, ‘사장님~ 김치는 뭐가 맛있어요?’라고 물었더니 서울에서 내려와 장사 중이라는 남자 사장님이 대답 대신 ‘물김치 좋아하세요?’라고 되물으며 몸집만 한 김치통을 꺼내 어머니가 동치미 국물에 담근 갓김치라며 통 크게 한 봉지를 퍼주었다.





어느덧 남해에 내려온 지 2주가 된 지금 작은 부엌을 돌아보다 실소가 터졌다. 보리암에서 받은 떡과 두유, 숙소 옆집에 머물던 분이 초면에 건네준 바나나 두 개와 허니버터칩, 식당 사장님들이 챙겨주신 김치와 밑반찬들, 마을 텃밭에서 따온 상추까지… 따뜻한 이들의 마음이 옹기종기 다양한 형태로 모여있었다.


 그냥 대충 끼니 때워도 죽지 않는데, 맛있게 먹고살겠다고 맛집 정보 검색하고 여기저기 마트 찾아 장 보러 다닌 나도 참 나다… 싶어서 웃기고, 또 징징대는 나를 챙겨준 이들이 귀여워서 웃었다. 서로 짠 것처럼 같은 레퍼토리로 "아니, 혼자 있으면 먹을 건 있어요?"라고 말할 때 그 걱정 어린 얼굴들이 하나같이 엄마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해에 특출 난 맛집이 없는 건 확실히 맞는 것 같다. 그래도 평소와 달리 크게 아쉽지가 않은 건 처음 보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이겠지. 잠시 머물다 가는 나에게도 보여준 진심 덕분에 그저 찍고 가는 여행지가 아닌 또 하나의 기억할 만한 ‘우리 동네’가 생겼다. 


나만큼이나 밥과 김치에 진심인 동네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오늘도 소소한 저녁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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