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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Nov 11. 2022

32.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내가, 우리가 어떻게 버텼는데...

엄마에게 도저히 얘기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는 12월 방학 전에 장학금 선정 여부가 발표됐지만 여름방학 때(12월) 한국에 나가서도 말을 하지 못하고 아직 발표가 안 났다고 둘러댔다. 엄마는 없는 돈에 반년치 학비만이라도 마련해서 학교에 송금했고 나는 방학을 끝으로 다시 호주로 돌아와서 10학년을 시작하게 됐다.


매번 전화할 때마다 장학금 발표 언제 나냐, 다음 반년은 돈이 없다는 얘기를 하셨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에 계속 얘기를 못하다가 1학기가 지나가는 시점에서야 정말 더 이상 늦출 수 없을 것 같음을 느꼈다.


전화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차마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지 못하다가-


“엄마, 나 장학금 못 받았어…”


“… 뭐? 왜???”


“동점인 애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호주인이라서 그 아이한테 주고 나는 못 받게 됐대…”


“어?? 미친거 아냐???? 그러게 왜 동점을 만들어!!!! 네가 월등히 잘해버리면 동점이 없잖아!!!!!! 이제 어떡하라고!! 당장 짐 싸서 들어와!!!!!!”


엄마는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눈물도 안 났다. 숨 쉬기도 힘들었다.


나더러 어떡하라고? 엄마한테 실망 한번 안 시키려고 밤새서 리포트 쓰고 자료 만들고, 그 상태로 하키 훈련 가서 스테이트 챔피언 트로피까지 받고 마칭밴드며 오케스트라 연주까지 하고… 그것도 음악가의 딸이 어딜 감히 두 번째 줄에 앉냐며 퍼스트 클라리넷이 아닌 걸로 핀잔을 주길래 전공자도 아닌데 입술에 이빨이 박혀 피가 나도록 연습을 하고… 나는 언감생심 쳐다도 안보는 엄마의 그 ‘하버드’ 욕심 때문에 얼마나 내 몸을 내가 깎아내며 두루두루 잘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데.


엄마는 그동안 내가 줄곧 받아오던 내 A+들을 모두 당연하게 여겼다. 어쩌다 플러스가 달리지 않은 A를 받아오면 ‘어디서 이런 부끄러운 성적을 들이미냐, 정신이 있냐 없냐’고 말하며 그때마다 짐 싸서 귀국하라고 했었는데, 그해에는 진짜 짐을 싸게 됐다.


더 이상 다닐 수 있는 학비가 없었다. 장학금이라는 마지막 빛 한 줄기는 차갑게 사라졌고 나는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다 싫어. 그냥 다 하기 싫어. 그냥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못된 생각만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엄마의 그늘에 사느니 그냥 국제미아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 숨통을 꽉 쥐고 있는 엄마 곁에서 살고 싶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인생의 절반을 살던 곳을 떠나야 했고 이제는 많이 잊혀버린 한국어를 써야 했다. 사춘기 어린 그때는 그게 그렇게도 힘든 일이었다. 내 모든 세상을 등지고 이곳으로 왔고 겨우 살만한 세계를 만들어놓았더니 다시 새로이 시작해야 했으니.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마음으로 나를 대해준 엘렌, 진정한 아버지의 역할을 맡아준 찰리, 일탈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큰오빠 라이언, 그리고 모니카와 티파니까지. 툭 치면 터질 것 같은 눈물 때문에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던 저녁식사를 마지막으로 나를 품어주었던 곳을 떠나게 되었다. 세상 험난하고도 행복했던 유학생활도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끝까지 서포트 못해줘서 미안하다…” 엄마는 내 마지막 비행기 티켓 값을 송금했다며 처음으로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그 눈물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자식을 위한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중도 포기해야 하는 패배자 같은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을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엄마의 눈물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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