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인천공항 게이트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 안거나, 손을 부여잡지 못했다. 둘 다 서로에게 죄인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누구의 탓도 아니었지만 그때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차에서의 침묵은 집에서도 깨지지 않았다.
엄마의 차는 지난 방학 때 지냈던 아파트와는 다르게 다시 이전에 살던 동네로 향했다. 엄마는 혼자 작은 원룸에 살고 계셨고 그 후로 우리는 서로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변명이든 설명이든 어떻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스스로 그림자처럼 살기를 원했다.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고 필요한 말만 하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앉아만 있었고 엄마는 새벽부터 밤까지 나가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엄마는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공부를 하라던가, 집안일을 도우라던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순간 우리는 둘 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던 때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멍하니 일주일, 이주일, 한 달이 지나자 엄마의 일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매주 월요일이 되면 악보집을 펼쳐 그 안에 꽂힌 만원 한 장을 꺼내 그걸로 일주일을 버텼다. 돈이 생기면 악보집 사이에 한 장 한 장 끼워놓았던 돈이었다. 그 돈 조차도 사실상 바쁜 스케줄 사이에 엄마의 발 대신 뛰어주는 오래된 싼타페의 주유비였다.
주유를 하고 나면 수중에 남은 돈이 없어서 끼니때가 되면 절에 가서 무료로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을 얻어먹었다. 절에서는 엄마를 선생님이라 불러주며 엄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도들이 절에 기부한 과일이나 떡, 공양미 등을 나눠주셨고 나는 그걸로 배를 채웠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과분한 양질의 식량이었다.
소프라노였던 엄마는 공연이나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컴컴한 밤공기 속에서 탁상용 스탠드를 켜고 밤이 새도록 구슬꿰기를 했다. 작은 크리스탈 비즈로 반지, 목걸이 등을 만들어서 차고 수업을 가면 주변의 부잣집 사모님들이 비싼 돈을 주고 산다고 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아서 아직은 호주에 남아있는 동생의 유학비를 보태야 했다.
왜 동생은 남고 나만 귀국했을까 묻고 싶었지만 그 또한 불필요한 대화의 시작 같았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 끝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장학금만 받았어도…’, ‘네가 돈을 좀 덜 썼어도…’ 그런 질책을 듣고 싶지 않았고 결국 동생도 반년만 더 다니고 귀국하게 되었다.
엄마의 집에는 더 이상 돈 될만한 것은 없었다. 값비싼 금붙이나 보석들, 비싼 가방들과 가장 아끼던 엄마의 피아노까지 모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는 한순간에 껍데기만 남아버린 것 같았다. 투명한 듯 불투명하고, 텅텅 빈 허물같이 손 만대도 바스러질 것 같은 그런 모습이 되어있었다.
나는 17살이었고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중퇴자에 불과했다. 중학교 학력은 호주에서의 기록이 있으니 중졸이었으려나. 중졸이 한국에서 살아가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엄마도 나도 망망대해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평생 스스로 선택을 해보지 않았던 나와, 모든 꿈이 깨부수어진 엄마에게는 어떠한 방향성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동생 둘만 집에 있던 여느 오후, 갑자기 현관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문을 쾅쾅쾅 내리치는 남자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