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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su Sep 29. 2023

그 해 겨울의 연수, 웅, 지웅에게

드라마 ‘그 해 우리는’ 후기





평소에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영상을 통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감당하는 게 벅차서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펜촉 너머에서 한 박자, 쉬었다 만나는 책 속 인물들이 목소리를 얻은 듯했다. 물 밀려오듯 쉴 틈 없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버거웠다. 나는 늘 가상의 인물들을 너무 쉽게 애정했다.


오랜만에 ‘그 해 우리는’을 보며 배우의 얼굴로 인물들을 만나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행간에서 상상하지 못한 마음들을 화면을 통해 깨닫게 되던, 연기가 섬세한 드라마였다.



“그게 너한텐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지웅이 연수에게 10년 전 기억을 꺼내며 다큐멘터리를 찍자고 설득하던 이 질문은 드라마 내내 주인공들에게 던져졌다.


‘전교 일등과 전교 꼴찌의 공부 일지를 담은 다큐 출연진의 10년 뒤 근황’이란 배경에서 10년, 어쩌면 그 이상 미뤄두었던 대화를 시작할 용기를 보여준다.

지웅, 웅, 연수가 질문에 답하는 동안 그 해 여름의 기억은 겨울을 보내고 있던 그들을 덥혀버렸다. 스스로도 모른 채 진심을 숨겨버린 29살의 이들에게 19살 초여름의 열기를 상기시켰다.


열기는 감추지 못한 외로움을 드러냈고, 카메라는 그 찰나의 외로움을 좇는다. 각자가 외로울 때 누구를 바라보는지를. 외로운 자신을 마주 볼 용기를 어떻게 내는가를.



연수는 어려운 캐릭터다. 미워하기 쉬운 성격이면서 사랑스럽다. 이런 걸 보면 연수는 이야기가 사랑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인물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이 모습을 알아달라고 해주는 시선이었다. 지웅이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도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마음을 표출할 여유마저 없어서 그랬을까. 독한 말을 내뱉는 얼굴이 일말의 감정조차 흘리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어린 연수의 얼굴이, 환해지고 무너지고 간절해지는 걸 보며 이 드라마가 왜 연수를 ‘차가운 사람’이라 쉽게 정의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게 됐다.


연수가 한 말 중 나는 이미 살고 싶던 인생을 살고 있었다고, 내 인생을 불쌍하게 만드는 건 나 자신이었고 지금을 누려보고 싶다고 한 게 인상 깊다. 현재에 머무르게 된 연수가 기특했다고 해야 하나. 지금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기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연수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웅은 이 이야기가 가장 안아주고 싶던 사람인 것 같다.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싶어서 사람들을, 연수를 계속 보내준 것 같다.


웅이의 그림 속 외롭게 선 건물들은 외로움을 가둬두는 공간이자 때로는 그 안에 들어올 사람을 기다리는 장소 같기도 했다. 마지막 화에 처음 반한 연수의 어릴 적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며 웅이의 그림 세계에 연수가 들어왔구나, 아니 돌아왔구나 싶었다.


웅이의 도망감, 피함이라는 성격이 인상 깊었다.


잠수를 타고 도망가는 사람들은 늘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 사람을 이해 못 할 때가 있었는데, 작중에 나온 ‘최대의 방어’라는 말에 동감하게 됐던 기억이 몇 년 전에 생겼다. 도망가야 숨이 터 살 수 있었던 기억이었다.


도망갈 수 있고, 피할 수도 있고, 그리고 넘어설 수도 있다고 말하는 캐릭터였다.


웅이의 말 중에서는 네가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난 나의 모든 것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게 기억에 남는다. 외로운 자신을 두고 가버린 연수를 오래오래 미워해버리게 된 말을. 사실 연수는 웅이가 눈을 감았을 때 대답했지만.



다큐 주인공인 연수와 웅 말고도 10년 전엔 카메라 뒤에 있던 지웅이가 이야기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결국 이 커플의 연애 서사엔 들어가지 못했지만, 무대 위로 나와 이런 사람이 카메라 앵글 밖에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서사를 썼다.


지웅은 자신을 피디의 길로 이끈 다큐멘터리의 10년 후 다큐를 메인 피디로 제작하게 된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감정에 온전히 빠지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지웅은 이 이야기가 비추고 싶어 한 사람이다. 여기 이런 아이가 있다고, 모두가 단면만 보는 아이는 이런 힘듦을 가지고 있다고. 어른들에게 싹싹한 모습도 차가운 직장에서의 모습도,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가 종종 미운 모습도 다 지웅이인 평범한 사람이 있다고.


지웅의 외로움도 촬영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종종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때론 심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다.


카메라에 담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면, 내가 잘 아는 그 다정한 눈빛 끝이 내 친구에게 향해 있다면, 그 친구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라면. 그리고 난 그 시선 끝을 좇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지웅이처럼 할 수 있었을까?


못된 사람 되는 기분 싫다던 지웅이가 기억 속에 남아있다. 웅과 연수를 둘 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못된 사람이 되어야 했던 사람이다.



연수와 웅이가 사랑했던 그 해에 말하지 못한 마음은 미움으로 남았고, 얼굴을 보니 앙금이 녹아 반짝였다가, 여름 햇빛에 말라 자국으로 남았다. 들여다본 자국은 결국 그리움이었다. 연수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던 웅이의 말처럼.


드러난 상처에 무너지기도 하는 그들 곁을 그 해를 함께한 친구처럼 지켰다.


그들이 풀어내는 숙제들을 내 일인 마냥 지켜보며 화면 너머에서 같이 슬퍼하고 축하했다. 웅이와 연수의 10년 뒤 근황 다큐멘터리를 볼 드라마 속의 다큐 시청자가 곧 이 드라마를 보는 나였다. 다큐멘터리 밖의 편집되기 전 웅이와 연수,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있던 지웅이의 얼굴을 만나며 아끼는 연작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려가고 내려가듯, 결말이 난 애정하는 영화 시리즈를 보듯 16편을 한 편 한 편 아껴서 보았다. 편집 전 원본들을 보며 정리를 고민하듯이 어떤 감상을 골라 쓸까 하는 마음으로 쓴다. 다큐 촬영을 시작하기 전 웅이와 연수의 학생 시절 원본 영상을 돌려보던 지웅의 마음이 이랬을까.


외로움을 각자의 방법으로 안고 사는 그들이 덜 외롭기를 바랐다.

 


전반적인 이야기는 큰 사건 사고를 동반하지는 않는다. 포스터와 배우의 얼굴이 보여주는 이미지 그대로, 소소한 사건들이 껴든 조금 주목받는 일상의 인물들의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16부작 동안 지루함 없이 끌고 갔다는 것, 16부작 동안 평범하다고 보일 수도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선과 생각들을 이해하고 미운 모습들을 사랑하게 만든 이야기의 흐름이 좋았다.


마을 골목길과 촬영장, 놀러 간 장소 정도가 촬영지의 배경이지만 그 속에서 기억하고픈 일상의 단편을 촬영해 낸 게 이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가 마음속에 맴도는 이유이자 찬찬히 사랑하게 만드는 방법인 것 같다.



사랑하는 지금의 우리들을 기록하고 싶게 하던 이야기였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 후에도 웅이와 연수, 그리고 그 해 그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듯 나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이어가고 싶다. 결론이 없는, 편집 전의 다큐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랑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잊힌 시간 속에도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인, 행복한 기억들이 있다는 걸 잊지 않으며 현재를 사랑하고 싶다. 지금을 더 사랑하고 싶다던 연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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