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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Dec 08. 2019

이래서 사랑이 질리지 않나 보다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역시 한국 드라마가 한국 시청자의 마음을 제일 잘 안다. <멜로가 체질>은 사실 보기 전부터 장범준이 부른 OST 덕분에 제목만 굉장히 익숙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샴푸 향이 느껴진다니. 좋은 향기 속에서 느껴지는 더 좋은 향기. 얼마나 로맨틱한가. 뭐 암튼, 오랜만에 한국 드라마가 보고 싶어서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가 봤는데 3일 만에 16화 끝까지 정주행 해버렸다. 잔잔하면서도 유쾌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사 하나하나가 정말 흔해빠진 에세이 뺨 후려치게 공감되고 진솔했다(작가들 칭찬해). 빨리 대본집이나 냈으면 좋겠다. 

<멜로가 체질>의 주 플롯은 신인 작가(천우희)와 잘 나가는 드라마 PD(안재홍)의 좌충우돌, 알콩달콩, 스릴만점 드라마 제작 과정이다. 메인 캐릭터가 모두 드라마 제작과 연관되어 있다 보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드라마의 작은 부분들을 패러디한 장면들이나 대사가 등장한다. <미생>의 대사를 인용한다든지, <스카이 캐슬>의 대사를 인용한다든지. 또 주연 배우가 안재홍이다 보니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가 은근히 많이 언급되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소한 부분도 이해가 되는 나 자신을 보니 나름대로 성공한 작품들은 잘 챙겨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꽤 뿌듯했다(문찐 아님).

사실 드라마 제목부터 참 기똥차다. 멜로가 체질이라니. 우린 각자 저마다 다른 사랑을 해왔다. 누군가는 말 못 할 짝사랑을 해봤고, 누군가는 직장 내 동료를 사랑해봤을 것이고, 누군가는 10년 지기 절친을 몰래 사랑해봤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방식은 다르지만 멜로가 체질이다. <멜로가 체질>은 이런 빛나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정말 보기 좋게 한 곳에 모아둔 크리스마스트리다. 더 나아가 그 사랑의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만 담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의 아픔, 또는 오해로 인해 흔들리는 사랑의 모습까지 담아내면서 사랑의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그런 애매한 특징을 잘 표현해낸다. 정말 사랑은 때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공상과학 소설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독하게 현실적이라 쓰라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질리지 않고 사랑하나 보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할 때는 7살 난 아이와 같은 거예요.
어련히 와 같은 느긋한 여유가 7살 난 어린이한테는 존재하지가 않는다고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다. 사랑의 깨끗함과 순진함을 7살 난 아이로 비유해서 표현한 점이 참 기분 좋았고, 곱씹을수록 따뜻하다. 

<멜로가 체질>이 사랑 타령만 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극 중 제작되는 가상의 드라마 제목이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인 만큼 사람의 성장에 대한 내용도 있다. 이런 대사가 있다. 

어릴 땐 몰라서 헤매었는데, 지금은 모른척하다가 헤매.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을 애써 모른척하다가 아예 그 순간이 영영 돌아오지 않고 길을 헤매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뭐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옛날보다 확실히 늘은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가식이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끝나가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됐고,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관계를 맺어나가게 됐다. 그리고 온전한 나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진솔하고 꾸밈없는 관계보다도 순간에 맞는 페르소나를 장착해야 할 그런 표면적인 관계의 수가 더 많아졌다. 그런 관계 속에서, 나는 내 진솔한 감정이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할 순간에 가면 뒤에서 애써 모른척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습관이 가까운 해결책을 두고 스스로를 헤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사랑을 넘어서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 <멜로가 체질>. 정말 캐릭터 하나하나 매력 넘치고 입체적이라서 보는 재미가 있었고, 안재홍과 천우희의 케미 역시 더할 나위 없었다. 아니, 사실 모든 극 중 인물들의 케미가 잘 맞았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시청률이 안 나왔을까. 쇼미더머니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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