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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Oct 09. 2019

가장 눈이 부시는 순간에 산다는 것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노인을 공경하라. 


사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반박하진 않겠지만 몸소 실천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노인을 보더라도 자리를 선뜻 양보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빈자리가 생기면 눈치를 살짝 보는 정도가 요즘 ‘노인 공경’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나도 ‘요즘’ 젊은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노인에 대한 약간의 반감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 첫 문단을 쓰면서도 은근한 죄책감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노인 하면 내게 떠오르는 기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특히 그런 기억의 배경은 주로 지하철이다. 새치기를 하고,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올라타고, 자리 양보를 강요하는 그런 노인들. 사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테다. 날이 갈수록 노인 인구 비율은 늘어나는데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더 커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눈이 부시게>는 올해 초 JTBC에서 방영됐던 12부작 드라마이다. 김혜자, 한지민, 남주혁이 주연으로 등장하고 그밖에도 연기력이 훌륭한 조연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을 보면 알겠지만 이 드라마는 내가 살면서 본 드라마 중 출연진 평균 연령이 제일 높은 드라마다. 25살 혜자(한지민)가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마법의 시계를 과하게 사용하다가 하루아침에 78살 혜자(김혜자)가 되면서 발생하는 당황스러운 에피소드들이 이 <눈이 부시게>의 주 플롯이다. 

뭐 알고 보니 25살이 78살이 된 게 아니라, 78세 할머니가 치매가 와서 25살인 줄 알았다는 게 하나의 반전이다. 반전이 밝혀지기 전까지의 내용은 할머니의 과거에 있었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재조합된 상상과 현실의 절묘한 조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이 부시게>는 그런 반전을 통해 시청자에게 재미를 주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인공이 노인이고 주인공 주변 사람들도 노인 들인 만큼 노인에 대한 이슈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노인의 신체 능력 저하 문제부터 노인 소외, 그리고 치매 문제까지. 그리고 이러한 노인을 둘러싼 가족의 시선도.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내가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눈이 부시게>에서는 ‘일몰’이 꽤 중요한 장치이다. 아름다운 해를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은 해가 뜨는 일출 때와 해가 지는 일몰 때일 것이다. 시계만 보지 않는다면 일출과 일몰은 똑같다. 우리의 삶을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비유를 하자면 일몰은 아마 노인으로 설명될 수 있을 테다. 해가 마지막으로 가장 아름다운 시간, 일몰. 하지만 우리는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고 경이로워 하지만, 생명의 끝자락엔 무관심과 냉소, 그리고 귀찮음을 대신 던진다. <눈이 부시게>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시 아기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무’로 돌아가는 시간. 잡념 없이 맑은 빛을 볼 수 있는 시간. 일출과 일몰이 닮았다는 점은 노인이 아기로 돌아가는 모습의 훌륭한 비유다. 

<눈이 부시게>는 일출과 일몰에만 초점을 맞추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해는 일출 때와 일몰 때 맨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가장 눈이 부시는 순간은 해가 떴을 때이다. 우리가 바로 그 가장 해가 눈이 부시는 시간에 살고 있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어도 가장 눈이 부시는 순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살 가치가 있고 눈이 부시게 살 이유가 있다. <눈이 부시게> 말미에 김혜자 선생님의 담담한 말투의 내레이션은 시청자의 눈을 붓게 만드는 데엔 부족함이 없었다. 

<눈이 부시게>는 SKY캐슬 이후로 오랜만에 본 한국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니 지하철에서 본 노인들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뀐 거 같다. 물론 며칠 지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예전보다는 노인 공경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 점에서 <눈이 부시게>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청자들의 눈물을 쥐어짜기 위해 설치된 수많은 장치들과 김혜자 선생님의 신들린 연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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