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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호 Nov 03. 2017

낫투데이 - 20171103

방사선 치료 재개

우여곡절 끝에 어제부터 새롭게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2일 차가 되겠네요. 경과를 봐가면서 결정할 예정이라 확정된 바는 없지만 대략 4주간, 주 5회니까 20회 정도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아주 환장할 노릇이죠. 


2차 수술 이후에 다시 재발된 종양이 점점 커지고 있고 그 위치가 우측 콧날개 부위라서 얼굴의 외관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 기세로 가면 아주 외관을 흉하게 망가트릴 것 같군요. 이 또한 굉장한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네요. 방사선 치료가 효과가 있어 종양의 성장세가 멈추고 조금이라도 줄어 들길 바랄 뿐입니다. 


문제는 고통입니다. 


방사선 치료는 그 자체로 굉장한 부담이 됩니다. 비용도 예전에 비해선 엄청나게 저렴해진 것이지만 그래도 부담이 됩니다. 건강보험의 지원이 늘어난 것뿐이지 원래 방사선 치료는 엄청 비싼 기계를 쓰니까요. 그 와중에 계획했던 이사도 진행을 해야 되고, 딸아이는 수능을 코앞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부담도 없다고는 말을 못 하죠. 


하루하루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문제도 꽤 심각합니다. 어제 한 번 해봤더니 치료 자체가 아니라 오가는 과정이 더 힘들더군요. 올 때에는 진짜 평생 안 하던 차멀미를 하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승용차를 가져갔다가 올 때에는 대리기사의 도움으로 왔는데, 차가 막히니 한 시간 반 이상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거든요. 이 또한 뭔가 다른 대책이 필요한데, 쉽지 않네요. 


그 모든 부담들 중에서도 역시 제일 큰 것은 고통입니다. 


통증이 멈추질 않고 있습니다. 전에는 수술 부위가 아물어 가는 과정에서 남은 통증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종양이 자라면서 발생하는 통증이라는 걸 확인한 셈이죠. 당당하게 존재 이유를 가지고 이제 왜 아픈지 알았지? 하면서 들이대는 통증인 셈입니다. 


이부프로펜 같은 단순하고 처방 없이 먹을 수 있는 진통제로 감당하는 것에는 슬슬 한계가 오고 있고, 마약성 진통제를 가끔 먹게 됩니다. 특히 밤중에는 아프면 잠을 못 자고 잠을 못 자면 컨디션이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오니까 진통제를 좀 세게 먹는 한이 있어도 잠을 잘 수 있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 막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되기도 하죠. 


나중에 이 진통제 후유증도 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방사선 치료도 아마 후유증이 있을 거예요. 담당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장기적으로 방사선 치료는 조직 괴사 등의 후유증을 유발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런 후유증을 걱정할 상태라면 종양 치료에 효과가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즉 방사선 치료 후유증은 종양 치료 효과를 논한 뒤에 하는 게 맞다.” 


이게 그냥 논리적으로는 맞는 애긴데 잘 생각해 보면 섬찟한 얘기입니다. 방사선 치료가 효과가 없다면 종양 치료를 못하게 되는 거고, 그러면 후유증을 걱정하기 이전에 당신이 죽게 된다는 뜻이죠. 죽은 사람은 후유증 걱정을 안 할 테니까요. 


암 치료 과정에는 곳곳에 이런 뉘앙스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뭔가 삐끗하면 죽게 되는 상황이니 사소한 부작용은 감수하고 가자는 방식이죠. 그런데 그 사소한 부작용들 하나하나가 환자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줍니다. 일단 뭐 많이 아프죠. 


이런 스토리에서 저는 어떤 치료가 효과가 있고 어떤 치료가 가능성이 있고 뭐 이런 얘길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전문가들이 논할 문제고 비록 제가 당사자인 환자지만 저 자신도 암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제가 할 애기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대신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그런 절차들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환자로서 제가 느끼는 것들, 제가 겪는 경험들에 대한 소감 정도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결국 제가 하는 얘기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죠. 


당해보고 느껴보니까 조금 알겠습니다. 통증과 고통의 관계 같은 것들 말입니다. 신체적으로 발생하는 통증은 당사자에게 고통을 유발하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은 무척 힘든 일이 됩니다. 그러나 진짜로 고통스러운 일은 통증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번에 진짜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통증은 고통을 유발하고 고통은 두려움을 유발하는데, 사실 제일 무서운 것은 이 두려움이거든요. 두려움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해야 할 일을 못하게 하고 동기를 상실케 합니다. 그리고 도망가고 싶어 하게 만들죠. 


일상적인 통증은 고통을 유발하고 그 고통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왜 이렇게 자꾸 아프지? 점점 더 나빠지려나? 안 나으려나?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죠. 진짜 문제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바로 불확실성이에요. 


엄청난 통증이 있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어도 이 통증은 24시간 이내에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견딜만합니다. 상황이 지금보다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면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고통도 감내할 수 있거든요. 좋아진다는데..


그러나 좋아진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 좋아질지 나빠질지 그대로 일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면 통증 자체가 주는 고통보다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두려움을 훨씬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거기다가 지금 상황은 확률적으로 봐서는 안 좋아질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단계라는 소리를 들은 암환자의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그 불확실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감으로 환자의 정신을 압박하죠. 


통증에 시달리며 한 밤중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정말로 무섭고 외롭습니다. 아파서 무서운 게 아니에요.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더해질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을 혼자서 견뎌 내야 한다는 점이 외로운 거죠. 


통증 자체는 두렵지 않습니다. 희망이 사라져 간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죠. 


물론 가족들이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두렵고 힘들 때 같이 깨어나 위로하며 통증 부위를 부드럽게 마사지를 해 주는 아내의 존재는 정말로 위대합니다. 제가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의 대부분은 그녀에게서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핵심이 되는 고통,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한 법이죠. 


제가 맨날 입버릇처럼 “근거 없는 낙관”이 역사를 바꾼다고 얘기를 해 왔는데 건방지게 그런 소릴 하고 다닌 벌을 받는 것 같습니다. 자, 이제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이 “근거 없는 낙관”인데 너는 그걸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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