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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Aug 03. 2017

"군함도에서 6년을 살았습니다."

군함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구연철 씨 인터뷰


구 선생님은 군함도 일반 노무자인 아버지와 함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군함도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 고등과 4년제 약식 학부(중학교)를 다녔죠. 군함도 생환자가 기억력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80대인 구 선생님의 말씀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구연철 선생님께 인터뷰를 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처음에는 머쓱했는데 곧 괜찮아졌습니다. 바다가 넓다지만 만날 인연은 만나거든요. 만남이 성사되면 '인연이구나', 그렇지 않으면 '인연이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올해 3월 구 선생님께 연락드린 뒤에는 마냥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6월 초에 다시 연락드렸습니다. "군함도를 '자세히' 취재하고 있다"라고 허풍을 떨었습니다. 이번에는 승낙하시더군요. "군함도 이야기라면 하겠습니다. 다른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요. 만날 인연, 맞지요?


6월 중순. 버스를 타고 5시간 동안 내리 잤습니다. 일어나니 부산 해운대였습니다. 잠시 전시관(이 얘기도 전해드리겠습니다)에 들렀다가 밥을 후다닥 먹었습니다. 구 선생님께 연락했더니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기에 콩나물해장국을 포장했습니다.**역 *번 출구. 아담한, 강단진 노인이 서있었습니다.


오후 1시쯤, 세미나실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식당이 있기에 선생님을 그곳으로 모셨습니다. "시장하지 않다"라고 하셨지만 강권했습니다. 저는 다른 방으로 갔고, 선생님을 기다렸습니다. 20분이 지났는데도 오시지 않아, 식당 문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은 식사하지 않은 채 벽을 보고 계시더군요.


예의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례가 됐습니다. 그렇게 인터뷰는 3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 기사를 쓰려면 말을 글(정제된 문장)로 정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말로 옮기고 싶습니다. 멍 때리느라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게다가 구 선생님 기사경향신문(2017년 7월 26일)에 실렸습니다.


6월 중순에 메일 한통을 받았습니다. 일본 **신문 기자가 '군함도 등을 유네스코 산업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일본 ***씨가 구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구 선생님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본인이 만남에 응하면 강제징용자보다 일반 노무자가 부각될 거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구 선생님의 아버님은 일반 노무자입니다.  


다음은 구 선생님과 돌고래의 대화입니다.  


-안녕하세요. 꼭 뵙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군함도에서 보내셨으니 군함도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 텐데요.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인터넷에 올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 기획안입니다.

=(기획안을 보며) 하나 수정해도 됩니까. 내 나이가 잘못됐네요. 80이 아니고 86입니다. 1931년생.


-아 예 선생님 고칠게요. 이제 녹음도 하고, 영상도 촬영하려고 합니다. 영상을 편집해 인터넷에 올릴 건데요. 다른 나라 사람들도 영상을 보고 군함도의 실상을 알면 좋겠습니다. 괜찮으신가요.

=군함도에 관한 것이라면 상관없습니다. 내 생애 전체에 대해 얘기하는 건 생각해봐야 합니다. 군함도는 다녀왔습니까. 오카마사하루기념관(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에는 갔습니까.


-네 다녀왔습니다. 오카 마사하루 기념관을 만드신 다카자네 야스노리 선생님 추모식에 갔습니다.

=다카자네 선생님과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훌륭한 분이던데... 금년에 갔다 왔습니까.

-네, 다카자네 선생님이 올해 돌아가셨거든요.

=아... 난 그분을 작년에 만났는데...


2017년 5월 8일 촬영한 군함도


-(군함도 관련 영상을 보여드리며) 이걸 보면 옛일이 생각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거기에서(군함도에서) 6년을 살았는데, 어릴 때는 민족문제라든가 평화문제라든가 인권문제라든가 이런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곳인데... 작년에 3박 4일인가 다녀왔습니다. 여기에 오면 일본에 대한 첫인상을 좀 얘기하고 싶더라고요. 참고가 될라나 모르겠는데.


-말씀해주세요.

=내가 9살 때... 할머니하고 어머니 하고 내 밑에 동생 둘을 데리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까지 가는 관부연락선에 탔습니다. 배 맨 밑에 홀 같은 곳에, 배가 제일 흔들리는 곳에 다다미가 쫙 깔려 있었습니다. 조선 여자들이 많더라고요. 봇짐 짊어지고 남편 아들 찾아가는 여자들. 배가 밤새도록 요동을 치니까 전부다 멀미할 것 아닙니까. 토하라고 이런 깡통 하나씩 줬는데 사방에서 밤새도록 고생을 하니까 전부다 파김치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 주소만 들고 이래 찾아가는데...


영화 '군함도'의 한 장면. 조선인들은 관부연락선의 가장 밑에 많이 탔다. (출처 Daum 영화)


-주소만 들고 찾아가신 건가요.  

=그렇죠.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을 다녀서 일본어를 말할 정도가 되니까 가족들을 인솔했습니다. 어머니는 40살 가까이 됐고, 할머니는 60, 70살이고. 일본에 다섯이 간 거지. 기가 막힌 과거다 참... 시모노세키 선착장에 내리니까 여기로 치면 포장마차가 있어서, 주먹밥 하고 우동을 사 먹었어요. 다 먹곤 길가던 사람한테 주소 적힌 종이를 보여주면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하니까 길을 알려주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알려준 곳으로 가도 가도 허허벌판만 나옵디다. 할머니는 지쳐있고, 어린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동생 하나는 내가 손 잡고 걷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니까 플랫폼이 바로 있대요.  


-그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신 건가요.

=그렇죠. 그때 그 기차에서 일본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느꼈습니다. 처음에 우리에게 거짓으로 길을 알려준 사람도 미웠지만. 아직 (그 일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일본 가다가 먹으라고 떡 하고 엿을 만들었어요. 조선 사람들 인정이란 (것이 있어서) 옆사람을 옆에 두고 혼자 먹지 못하잖아요. 할머니가 떡을 옆에 좀 나눠주라고 해서 일본 여자한테 갖다 주니까 "더러운 조선인들"이라면서 내 손을 탁 칩디다. 바닥에 음식이 널렸을 것 아닙니까. 그걸 주워 먹는 애들도 있었고, 나도 민망해서 주섬주섬 주었지. 참 그때 내 가슴에 아... 같은 민족인데... 같은 사람인데 왜 저럴까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서 일본 사람들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됐습니다. 어린 내 인격, 우리 가족, 조선인의 인격을 모욕한 것 아닙니까.  


-어린 나이에 상처가 컸겠네요.

=그래도 뭐 아버지를 만났으니까. 부산에 계신 외삼촌이 전보를 쳐줬는가 봐요. 나가사키역에 가면 아버지가 나와 계실 거라고 했는데 아버지를 진짜로 만나니까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얼마 만에 만나신 건가요.  

=거진 2년 만이죠. 중간에 한번 집에 오셨거든요.

-아버지는 하시마에서 언제부터 일하셨나요.

=내가 군함도에 가기 5, 6년 전부터 군함도에 계셨다고 기억해요. (아버지께) 물어보지 않아서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 본사의 현재 모습. 나가사키항에서 고속여객선을 타고 가자 조선소와 군함이 보였다.


-군함도를 찾아가던 일도 기억하시나요.

=아버지가 나가사키 시내를 보여주는데, 건너편을 보니까 큰 건물을 포장해 가려놨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가 군함을 건조하는 미쓰비시 조선소더라고요. 아버지하고 같이 나가사키항에서 연락선을 타고 한 시간 이상 갔지 싶은데, 처음에 나오는 것이 다카시마, 그다음이 나카시마(나카노시마)라는 무인도, 그 옆에 하시마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연락선이 접안을 못했습니다. 연락선에서 작은 배로 내렸다가 다시 작은 배에서 섬으로 올라섰어요. 그런데 지난해 가보니까 접안 시설을 해놨더라고요. 섬에 들어가니까 바로 그 문이 보입디다.   


 섬 출입구였던 '영광의 문'(지옥의 문)은 현재 들어갈 수 없다.

                                                                          

-'지옥의 문' 말씀인가요?

=그렇죠. 해방된 이후 누가 '지옥의 문'이라고 고쳐 놨는데, 처음에는 '영광의 문'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제방을 뚫어 만든 동굴이었는데, 그 문이 하시마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였어요. 출입구가 이 정도(양팔 너비)밖에 안 되는 크기였어요. 작년 10월에 가니까 거기에 아무런 표식도 없고 딱 막아버렸더라고요. 대신 계단을 새로 만들어놨습디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그 출입구가 길었습니다. 그 길을 지나서 보니까 하시마 탄광 노무자 관리사무소가 나타났어요.  


-섬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새로운 천지에 온 것 같았지요 뭐. 농촌에서 산, 들 보고 살다가 콘크리트 방파제 이런 걸 보니까. 건물도 굉장히 높고, 크레인 두 대가 막 돌아가고. 하나는 노무자들 실어내리는 크레인이고, 저짝에는 석탄을 실어내리는 크레인이고. 식수 같은 걸 공급하는 크레인이 따로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졌더라고요. 아파트 지하는 전부다 강제 징용 온 노동자들 수용소였습니다. 내가 살던 집 앞이 바로 징용 온 청년들이 수용돼 있는 곳이었어요. (요즘에는) 거긴 들어가지 못하게 해놨더라고.


-건물이 붕괴될 수 있어서 사람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던데요.

=강제징용 사실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겁니다. 붕괴 위험 때문이 아니라.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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