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윤아 Jan 05. 2019

80년생 저신다

'민폐' 안 되려고 발버둥 치다 탈진했을 때  

  뉴질랜드에 '저신다 아던'이라는 총리가 있어요. 80년생 여성이죠.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6일 만에 총리가 됐고, 취임 8개월 만에 딸을 낳았어요. 6주 동안 출산 휴가를 다녀왔고요. 현직 총리가 재임 중에 출산 한 전례는 있었지만(1990년 파키스탄) 출산 휴가까지 다녀온 건 세계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에요.      

 여기까지만 보면 '역시 뉴질랜드!'라며 엄지척 하겠지만 '80년생 저신다'도 마냥 꽃길만 걷고 있는 건 아니에요. '82년생 김지영'이 걸어왔고 여전히 걷고 있는 흙길을 그 역시 먼지를 뒤집어쓰며 걷고 있어요. "총리에게 출산 휴가를 줘도 될까요?" 취임 전엔 TV토론회에 나설 때마다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고요.( 그땐 임신하기 전이었으니, 단지 가임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질문을 받은 거예요.) 취임 후엔 '자기 애 때문에 혈세를 낭비한다'는 눈총에 시달렸어요. 모유 수유를 위해 '당일치기 순방'을 다녀오려다 비행기 값 5680만원을 더 썼거든요. 한 때는 그의 '순산'을 기도하며 아기 모자를 뜨는 뜨개질 운동까지 벌였던 국민들도 세금 얘기가 나오니 냉랭해지대요. 그때 느꼈어요. 아주 작은 피해만 발생해도 출산은 축복에서 민폐가 되는구나.      

 작년에 친해진 친구가 한 명 있어요. 저보다 한 살 어린데 벌써 아기가 여섯 살이에요.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진짜 야무지다' 싶은 사람. 아무도 안 봐도 누가 보는 것처럼 일하는, 책임감이 완전히 학습된 사람. 그녀의 완벽주의에 겁먹고 멀어지려는 찰나 이렇게 귀엽게 저를 당기 대요. "같이 밥 먹고 싶어요, 윤아님"     

 뜨끈한 갈비탕을 넘기면서 몇 마디 주고받아보니 그 친구도 한때 '경단'이었더라고요. 저렇게 일 잘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 왜 일을 놓았을까. 궁금했죠.      

"임신하고 다짐했어요. '절대 폐 끼치지 말아야지.' '여자는 이래서 안 돼' 같은 소리 듣기 싫어서 야근 한 번 빼 달라고 안 했어요. 새벽 한 시에 퇴근하고, 대여섯 시에 일어나 어제 못한 일 마저 하고… 그렇게 일하다 배가 너무 당겼던 어느 날 울면서 퇴사했어요. 도저히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 말라'는 말, 자라면서 참 많이 듣죠. 절대 민폐 끼치지 않으려는 태도는 사회인에게는 기본적인 소양으로 직장인에게는 프로다움으로 추앙받아요. 그러나 저는, 미덕으로 여겨지는 이 '민폐 결벽증' 때문에 주저앉는 여자들을 너무나 많이 봤어요. 그래서 ‘절대 폐 끼치지 않으리라’ 다짐이 외려 위태롭게 보일 때가 많아요.      

  임신과 육아를 하나의 업무라고 생각해 보자고요. 그만큼 돌발 변수가 많은 일도 없죠.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내던져진 연약한 한 인간을 키워내는 일이니 오죽 신경 쓸 게 많나요. 그런 일을 직장 생활에 조금의 지장도 주지 않고 완벽하게 해내는 건 따져보면 애초에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어쩌면 목표부터 잘못됐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예요. 가장 현명한 기도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분별력을 달라"는 거라고 하잖아요. 할 수 없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리면 그 목표는 노력이 아니라 포기를 종용해요.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 인스타그램(@jacindaardern)

 만약 저신다 아던 총리가 '절대 민폐 끼치지 않겠다'는 프레임에 갇혀 모든 걸 결정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일찌감치 총리직을 사임했을 거예요. 

 '출산하고 회복하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릴 거야. 한 나라의 총리가 그렇게 오래 관저를 비워도 되나? 순방도 잦을 텐데 임신 중 비행기는 어떻게 타고, 모유 수유는 또 어떻게 하지? 오 마이 갓. 역시 안 되겠어. 너무 민폐야'

하면서요. 그랬다면 뉴질랜드 여성들은 간절히 원해왔던 일을 출산 때문에 포기하고 마는 한 여성의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봤겠죠. 열패감과 좌절감을 느끼면서요.  

 그러나 저신다는 ‘민폐’ 프레임 대신 ‘기여의 프레임’으로 사안을 바라본 것으로 보여요. 그러니 임신 사실을 알고도 예정대로 총리에 취임했겠죠. ‘재임 중 출산한 총리가 과연 마이너스이기만 할까? 반대로 여성이 임신·출산 때문에 더 이상 뭔가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어쩔 수 없이 빈틈은 생기겠지만 그 빈틈을 메우고도 남을 기여를 할 수 있을 거야.’ 모르긴 해도 아마 이런 고민 끝에 총리직을 맡기로 결심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절대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 대신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까’ 질문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사고의 회로를 바꾸는 거죠. 남성이 절대 다수인 회사에서 일했던 제 친구는, 육아휴직을 쓰고 편한 부서에 자원했다는 이유로 갖은 비난을 다 받고도 여전히 회사에 남아 일하는 한 여자 선배에게 이렇게 말했대요. “선배, 버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성이 드문 분야에서 여자 선배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후배에게 희망이 되어주거든요. 당장의 민폐에 함몰돼 버리면 이런 ‘장기적 기여’를 고려할 여유가 사라져요.        

 “언제 출산을 할지는 여성의 선택이고, 일자리를 얻거나 일자리를 찾는 데 있어서 미리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어서는 안 됩니다.” TV 토론회에서 ‘출산 공격’을 받을 때 저신다는 이렇게 말했어요. 한 국가의 예비 수장이 이렇게 단호하게 ‘차별의 선’을 그어주면, 이 선 앞에서 조심하는 고용주는 늘어나겠죠. 한 국가에서 가장 긴급하고 주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총리가 출산 휴가라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면, ‘당장 급하다’는 이유로 이 권리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도 줄어들 거고요. 그러니까요, 우리 발 앞에 놓인 '민폐'를 피하는데 급급해 가야 할 '방향'을 놓치지 말자구요. 우리가 걷고 있는 흙길엔 돌멩이가 너무 많으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말하자니 두렵고 참자니 괴로울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