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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Jan 09. 2019

"이번 회사에선 틀렸다" 싶을 때

"이번 회사에서는 틀린 거 같아."

직장인 셋이 모이면 꼭 이런 말이 나와요. 그러면 저는 한 없이 그 친구가 가여워져요. 친구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다짐하고 무너지고 또 다짐하고 무너지고. 그 슬픈 반복을 저 역시 너무 오래 해봤거든요.

저는 '관심 병사'였어요. 입사할 땐 온갖 총애를 받으며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 됐더라고요. "기획 기사 안 써 봤니?" 기사를 송고하면 돌아오는 힐난을 숨긴 질문. 뒤통수가 화끈화끈 했어요. 회사 사람들이 다 저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남편 런닝 셔츠를 다 적시며 펑펑 울고, 다음 날 붕어가 된 눈에 아이라인을 그리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보여줄 거야. 보여줘야 해.' 그러나 끝내 못 보여줬어요. 예전엔 어렵지 않게 했던 일이었는데도 매번 손을 달달 떨 정도로 긴장했거든요. 심지어는 이런 적도 있어요. 취재를 위해서 어떤 카페에 꼭 가입해야 했는데 자동가입 방지 문자(왜 숫자랑 영어랑 섞여 있는 그거 있잖아요)가 읽어지지 않는 거예요. 본 대로 입력하면 되는 걸 제가 몇 번을 실패하고 있더라고요. 와 정말 미치겠대요. 자꾸 못한다 못한다 소리를 들으니까 정말 무능력자가 된 것 같았어요. '이번 회사에선 망했다'라는 소리만이 텅 빈 마음에 무한 메아리쳤어요. 그렇게 외롭고 초라하게 회사를 나왔어요.

mbc '자체발광 오피스' 방송화면 캡처. 남자화장실에 도기택(이동휘 분)이 있었다면 여자화장실엔 제가 있었어요.

퇴사하고 한 동안 누워만 있었잖아요. 몸은 침대에 있는데 영혼은 매번 혼나던 그 시간, 그 장소로 갔어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였던 것인가 집착적으로 복기했죠. 그렇게 과거를 한 땀 한 땀 해체하다 보니 문득, 한 때 흘려들었던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너 못하지 않아. 아니, 잘하고 있어. '그분'이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거야."

당시엔 매번 혼나던 저를 보다 못한 선배가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치 적선하듯, '옛다 인정이다'하고요. 자기 검열이 심한 제게는 그 말이 가짜 칭찬으로 들렸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선배의 말이, 그리고 그 말에 박힌 '여유'라는 단어가 질문의 방향을 돌려놨어요. '가만, 그때 '그분'은 어떤 상황이었지?'

 이곳에서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당시 '그분'은 저보다 몇 배는 더 조급했어요. 커리어가 멈추느냐 마느냐에 기로에 있었거든요. 그런 만큼 저보다 훨씬 더 무거운 '자기 증명'의 압박을 받고 있었죠. 만약 제가 그 상황이었어도 몸이 바짝 달았을 거예요. 아니, 타버렸을지도 몰라요.

 그제야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죽어라 나만 들여다본 것.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게서만 찾은 것. 습관적으로 반성만 한 것. 선배가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도, 저는 고개를 들어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어요. 쥐 잡듯이 내 잘못만 찾다가 피해의식과 억울함에 사로잡힌 채 도망쳐 버렸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자신을 무능력자라고 낙인찍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체크리스트를 만들었어요.  첫째. '상대의 '여유 잔고'를 확인하자.  그럴 때 있잖아요. 쥐어짜고 있는데도 지적만 받을 때. 그래서 '일의 본질'이 아니라 '상사의 지적'이 더 신경 쓰이는 수준까지 갔을 때. 그때는'내'가 아니라 '상대'를 봐야 해요. 조급한 상대방이 필요 이상으로 요구하고, 지적하고, 닦달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받아내는 상사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의 조급함으로 생긴 불순물인지 아니면 정말 내 부족함 때문인지 구별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면 유능감을 잃게 되고 결국엔 정말로 무능해져요.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요.

 두 번째 체크리스트는 '내 기준이 있느냐'는 거예요. 내 기준으로 따져봐도 내가 무능한지 점검할 필요가 있어요. '관심 병사' 시절, 저는 '내 기준'이 없었어요. 매일 타인에게 지적을 받으니까 저조차 제가 무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취업을 하기 위해 제가 썼던 기사들을 다시 읽는데, 세상에. 그 연차에 그 정도 썼으면 잘했다 싶더라고요. 실제로 관심 병사 시절 가장 많은 상을 타고, 가장 많은 기사를 썼고요. 만약 당시 제가 타인이 들이대는 기준을 거부하고 내 기준에 집중했다면 그렇게 심한 내상을 입지는 않았겠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세상이 신경질적으로 휘두르는 평가에서 살아남으려면 '내 기준'이란 방패가 필요하다는 걸. 내 기준이 없으면 내 인생도 없다는 걸.

 이미 항복했으나 계속 공격당할 때 무기력을 넘어 수치심까지 체험 할 수 있고 그때 인간이든 동물이든 급격히 위축되며 죽기도 한다.                                                           책  <어쨌거나 회사를 다녀야 한다면>


그래서 생각해요. 모두가 쫓기듯 살기에 모두의 여유 잔고가 제로에 수렴하는 시대, 우리에겐 '무력한 반성'보다 '현명한 반격'이 필요하다고. 코너에 몰린 쥐가 반성만 하면 영원히 구석을 빠져나오지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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