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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Feb 10. 2019

'결혼 적령기'가 숨통을 조여올 때

스물아홉 봄, 모든 것이 싹을 틔우던 그때, 그는 처음으로 제 손을 놓았어요. 우리는 오래 만난 커플이었어요. 오래 연애하고도 여전히 서로를 귀여워하던 봄 같은 연인이었죠. 

손을 놓은 건 그였지만, 손을 '놓게 만든 건' 저였어요. 당시 저는 '서른'에 쫓기고 있었거든요. '이제 곧 서른인데 이 정도 만났으면 결론을 내야지.''남친은 아직도 결혼 얘기 없어?' 만나는 사람마다 약속이나 한 듯 제게 '서른'과 '결혼'을 상기시키는데, 이 남자는 결혼에 ㄱ도 꺼내지 않았어요. 마음이 타들어갔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데이트 전날 전화로 비장하게 최후통첩을 날렸어요. "나와 결혼하지 않을 거면 나를 놔줘." 

다음 날 그의 눈을 보고 저는 철렁했어요. 무(無)커풀 그의 눈에 폭 1.5cm의 쌍커풀이 만들어져 있었거든요. 그 갑작스러운 쌍꺼풀에서 저는 우리의 끝이 코앞에 당도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편의점에서 함께 라면을 먹다(마지막 식사로는 너무 소박했네요) 갑자기 뛰쳐나간 그는, 길가에 세워진 트럭 뒤에 숨어 눈물을 훔치다가 제게 발각됐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국 이별을 통보했어요. 

지하철 개찰구 앞. 이제 손을 놓고 각자 갈 길을 가야 하는데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고 둘 중 누구도 손을 놓지 못하고… 그런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때에 맞춰 결혼하기 위해서 사랑을 포기하는 게 과연 맞나. 주객전도 중에서도 상 주객전도가 아닌가.' 저는 백기를 들었고,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엔 그가 완전히 항복했어요. 우리는 끝내 놓지 못했던 그 손을 꼭 잡고 어두컴컴한 예식장을 함께 걸어 들어갔어요.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스틸 컷.

노오란 빛이 공기에 조금씩 스며드는 봄의 초입이 되면 아직도 그날이 떠올라요. 그때 헤어졌다면 어땠을까, 상상하죠. 그러면 아찔해져요.

 만일 결혼 적령기에 쫓기다 그와 헤어지고 부랴부랴 다른 남자와 결혼했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행하다면, 누구한테 따질 수 있었을까요? 만날 때마다 '남자 친구는 있냐, (결혼이) 더 늦으면 안 된다'고 재촉하던 삼촌에게요? '서른 넘은 여자는 남자를 소개받을 기회 자체가 없다'고 은근히 위협하던 회사 선배에게요? 그것도 아니면 소위 '노처녀'를 히스테리로 가득 찬 불행한 실패자로 그려서 모든 여자를 조급하게 만든 미디어에게요?  제 숨통을 조여왔던 '결혼 적령기'라는 데드라인은 분명 타인이 던진 그 모든 무성의한 말들이 점점이 연결되어 그어진 건데, 막상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면 이렇게 말하겠더라고요. '난 그냥 작은 점 하나를 찍었을 뿐이야. 그 점을 연결해 선을 그은 건, 너 자신이잖아.' 

 이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여자를 조급하게 만들어요.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이다. 서른 넘은 여자는 상장폐지와 다를 바 없다'는 등 갖은 비유를 들어 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빨리 '주인'을 만나야 한다고 부추기죠. 그 말들에 세뇌당한 여자는 마음에 시한폭탄을 들입니다. 폭탄에 달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를 끊임없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죠. 문제는 조급하면 판단력도 흐려진다는 거예요. 연습할 때 여유롭게 맞췄던 토익 문제도, 시험 시간에 쫓기다 보면 틀릴 때가 있듯이요. 그렇게 여자의 판단력을 떨어뜨려서 이익을 얻는 쪽은 과연 누구일까요. 

 엊그제 '여자의 결혼'을 주제로 인터뷰를 했어요. 결혼 4년 차인 제가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어서 참고가 될까 하고 서재를 서성이다 <결혼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꺼내 들었어요.                                          

 스물다섯 성급하게 결정한 첫 결혼이 생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느라 로마에서는 '먹고', 인도에서는 '기도하고',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다시 '사랑한'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작가죠.) 다신 결혼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지만, 발리에서 만난 애인 펠리페가 미국에서 추방되면서 함께 지내려면 결혼을 해야 하는 신의 장난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돼요. 결혼을 해야만 사랑을 지킬 수 있는 그녀는 10개월간 동남아를 떠돌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연구합니다. 책 말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요. 

결혼은 약속에 대한 약속이다.  

결혼은 '배우자를 평생 사랑하겠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1차)을 꼭 지키겠다고 한 번 더 사회와 약속(2차)하는 행위죠. 스스로의 다짐은, 연인 간의 맹세는 흔들리기 쉬우니 사회적 시선, 법, 제도로 한 번 더 잠가두는 거예요. 말하자면 이중 잠금 같은 거죠. 이중 잠금장치는 엄밀히 필수는 아니잖아요. 있으면 심적으로 조금은 더 안심이 되겠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거 하나 더 있다고 도둑이 안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죠. 결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1차 약속을 지키겠다는 자기 확신, 연인 간 신뢰만 있다면 결혼제도라는 이중 잠금이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 어쩌면 결혼을 대할 때 가장 위험한 태도는 결혼 적령기에 맞추느라 '쫓기듯' 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장 기본인 도어락은 제대로 설치하지도 않고, 2차 잠금장치인 안전 문고리부터 성급하게 달아두는 셈이니까요. 그런 엉성한 법적 약속이 연인의 단단한 약속을 대신해줄 수 없죠. 

 45년 차 부부인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님은 <결혼해도 괜찮아>(공교롭게 두 책의 제목이 같아요)에서 남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결혼하지만 않았다면 평생 그리워했을 사람

누가 정한지도 모르고, 실체도 모호하며, 심지어 '여자'에게만 유독 선명하게 그어지는 요상한 데드라인 '결혼 적령기'. 그 선을 앞에 두고 초초함에 손톱을 깨물 있을 그녀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어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그 망할 선 때문에 '평생 그리워했을 사람'을 놓치지 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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