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할 때가 많아요. "살림하며 다니기엔 이 부서가 나을 거야"라는 말로 원치 않는 부서 이동을 제안받았을 때. 그렇게 억지로 간 부서에서 '양파를 오래 보관하려면'으로 시작하는 리빙 포인트를 쓰고 있을 때. 면접 초장부터 '아이는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희는 합의된 딩크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우렁차게 답했을 때. 그러면서도 손톱 옆 거스러미를 피 날 때까지 뜯고 있을 때. 내가 남자였다면, 정말, 그래도 이랬을까. 상상하고 또 상상해요.
그러나 이내 멈추죠. '내가 여자라서' 이 모든 거절과 좌절을 겪었다고 단정 짓는 건 자기 검열의 화신인 제게는 게으른 정신 승리처럼 느껴지거든요. 내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여자' 핑계를 대는 건 아닐까, 원한다고 남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여자'에서 찾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렇게 한 차례 '현자타임(현실 자각 타임)'이 지나가면 본격적으로 '커리어 역주행'을 시작해요. 지나 온 커리어를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제가 거절당할 수밖에 없던 이유, '기스'를 찾아내는 시간이죠. '아, 남들은 검찰 기사를 쓸 때 나는 트렌드 기사를 썼구나. 아, 남들은 국회의장을 인터뷰할 때 나는 여행작가를 만나고 있었구나. 아, 그래서 나는 밀릴 수밖에 없었구나.' 사회를 향해 쏘아 올렸던 비난의 화살은 순식간에 휙 고개를 돌려 제 마음에 꽂힙니다. '다 내 탓이다'라는 외마디 비명이 입에서 흘러나오죠.
그런데 말입니다. 며칠 전 '네 탓 아니니까 그만 좀 자책하라' 고 말해주는 책을 만났어요. 여성 최초로 월스트리트저널 부주필 자리에 오른 조앤 리프먼이 쓴 <제가 투명인간인가요?>(문학동네)예요.
가장 눈길을 끈 부분은 '내가 남자라도 정말 이랬을까'라는 제 오랜 궁금증을 실제 실행에 옮겨 본 사람들의 후일담이었어요. 쉽게 말해, 여자로 살다 남자가 된 사람들이죠. 논문 여섯 편을 쓰고도 달랑 한 편만 쓴 남자 동료에게 하버드대 연구직 자리를 무력하게 내어준 미국의 여성 신경생물학자 '바버라'는 마흔둘, 남은 생을 '바레스(男)'로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네이처'를 통해 그가 받는 대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밝히죠.
사람들은 여자였을 때만큼 나의 권위에 자주 의문을 품지 않았고 대화를 할 때도 귀를 기울여 주었다. (…) 이래서 여성들이 학계의 여러 직책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의 케이스도 물론 있어요. 프로 언론인인 작가가 크로스체크를 안 할 리 없죠.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생태계 이론학자 조너선(男)은 반백살에 조앤(女)이 됩니다. 그녀는 말해요.
남성들은 무능하다고 증명될 때까지 실력이 있다고 간주됩니다. 반면 여성은 능력을 증명할 때까지 무능하다고 간주됐죠.
이들은 증언합니다. 여성이 되자마자 사람들은 내 말을 자르고(맨터럽트), 무시했으며(맨스플레인) 더 많은 것을 보여줘야 예전만큼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요.
덜 존중받으니 더 쉽게 비난의 표적이 되는 건 자연스럽죠. 뉴욕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기업 가치가 1% 하락할 때 여성 CEO의 연봉은 63% 낮아지는데 반해, 남성 CEO 연봉은 그 절반만 줄었대요. 또 직장에서 남성이 화내면 영향력이 더 확대되는데, 여성이 화를 내면 영향력이 되레 줄고 '감정적'이라는 딱지만 붙는다는 연구결과도 있고요.
저자가 나열한 이 방대한 연구를 한 줄로 꿰어내면 이런 거예요. '여성이라 덜 존중받고, 덜 존중받으니 기회가 적고, 잘못하면 훨씬 심한 비난을 받고, 비난을 못 견디다 화내면 공격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아끼느라 조심조심 몰았던 차 여러 곳에 기스가 나 있는 걸 어쩌다 발견했어요. '어디서 긁혔을까.' 그동안 지나온 길을 필사적으로 헤집게 되죠. '좁다란 주차장에 진입할 때 긁혔나, 버스랑 살짝 닿았을 때 긁혔나.' 그러고선 자책해요. '내가 부족해서, 내가 미숙해서, 내가 감정적으로 운전해서 기스를 냈구나.'
그러나 만일 우리 사회와 조직이, 낡고 거친 기계식 세차장에 가깝다는 게 진실이라면 어떨까요. 엉성한 기계식 세차장에선 그 어떤 고급 차도 '기스'를 피할 수 없듯, 여성을 덜 존중하고, 덜 기회를 주고, 더 비난하는, 더 좁고 낡고 꽉 막힌 통 안에선 아무리 날고 기는 커리어우먼이라도 기스 하나 없이 매끈하긴...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요.
'엄마의 이력서는 누추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한 마디로 누더기였다.' 오래 팬심을 갖고 지켜봤던 한 선배가 언론계를 떠난 후 '우먼카인드'라는 잡지에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기고한 글을 읽었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이 악물고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내 커리어가 기스 투성이라는 걸 걸 알게 됐을 때의 그 허탈함, 이 누더기 커리어로 버텨봐야 결국엔 조직의 '잉여'가 되겠구나 싶은 비참함. 제가 한 때 끌어안고 끙끙 앓았던 그 감정들이 빳빳한 지면 위에 날카롭게 묘사돼 있었어요. 2년 전 저도 그 선배처럼 너덜너덜해져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좀 달라져 보려고요. 기스를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않으려고요. 기스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반성하고 자책하다 끝내는 나 자신을 할퀴는 짓 더는 안 하려고요. 거대한 기계식 세차장 같은 사회고 조직이잖아요. 이런 곳에 발을 들인 이상,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여기저기 기스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납득하려고요.
대신 달릴 거예요. 여기저기 긁힌 차도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잖아요. 이 책을 쓴 작가도 아이 낳고 회사로부터 느닷없는 '편집기자' 발령을 받았고요( 원하지도 않았는데 취재기자에게 편집을 맡기는 건 좌천이라고 봐야겠죠) 스스로 마미트랙(mommy track·비전은 없지만 부담도 없는 업무만 맡는 일)을 달렸다고 자조할 정도로 '한직'을 전전했어요.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았고(학자금 대출이 많이 남았었대요), 계속 달리다 보니 그 탁월한 성능이 회사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던거죠.
'군데군데 기스 난 자동차일수록 도로 위에 있어야 그 짱짱함을 증명할 수 있다.' 저는 이 말에 지탱해 결코 순탄지 않을 올해도 달려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