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생을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세 번째 책을 쓰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물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써?" 그런 얘길 들으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져요. 꾸준히라뇨.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는데요.
6개월 걸렸어요.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실제 책상 앞에 앉기까지지요. 책 쓰기가 싫었냐고요? 전혀요. 처음 책이라는 걸 써보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이 책은 제 마음속 1순위였어요. 나를 일으켜 세운 문장, 이 땅의 언니 동생, 친구들과 꼭 나누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제 구상을 들은 한 출판 관계자가 그러는 거예요. 누군지도 모르는 아무개의 인생 문장을 누가 읽겠으며, 누가 책으로 내주겠냐고요. 반박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이 책은 제 마음속 출간 목록에서 한 칸 두 칸 밀려났어요.
두 번째 책 탈고를 끝냈을 때 드디어 내 인생 책을 쓸 수 있겠구나 했어요. 이미 책 두 권을 냈으니 출간을 위한 최소한의 인지도는 확보했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죠. 보석함에 간직해왔던 반짝이는 문장들을 신나게 써 내려가는 일만 남았는데, 책상 앞에 앉지를 못하는 거예요. '내일은 꼭 시작하자' 다짐하고 잠들어도 일어나면 침대에서 뭉개고, TV 보고, 누가 불러주면 쪼르르 달려 나가고… 제가 제 말을 징그럽게 안 듣데요. 실컷 놀면 편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대판 싸운 자매와 한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했고요.
'갓 구운 마들렌에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 하고 오자.' 이러다 영원히 못 쓰겠다 싶어 지자 꾀를 냈어요. 일단은 카페로 나를 유인하자, 일단 앉혀만 놓자고. 버터향 3초만 맡으면 금방 천국에 가는 제 못 말리는 빵사랑을 이용한 거죠. 결과는 성공. 덕분에 마들렌이 구워지던 오후 4시, 저는 카페 한 구석에 저를 앉힐 수 있었어요.
슬슬 대화를 시도했어요. '왜 자꾸 글쓰기를 피해?' 그렇게 쓰고팠던 책인데 왜 미루고 피하는지 물었죠. '이런 책 시중에 많아서 안 팔릴 거 같아… 글쓰기에 별 소질도 없는 내가 작가로 살 수 있을까?… 또 '투고'를 해야 하는데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 주르륵 쏟아지는 이유들. 투고하고 답을 기다리는 시간, 쉽지 않거든요. 최종면접 보고 합격자 발표 기다리는 느낌이랄까요.
어르고 달랬어요. ('그렇지만 네가 가장 쓰고 싶어 했던 글이잖아.') 도끼눈 뜨고 협박도 했고요, ('회사에서도 도망쳤으면서 또 도망칠 거야?'), 회유도 했어요.('정 안되면 자비출판하면 되잖아.') 그래도 안되자 마지막으로 물었어요.
여기서 멈추면 네 인생은 또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거야. 그래도 괜찮아?
그토록 뻗대고, 반박하고, 고집부리던 제 안에 한 아이가 그제야 고개를 푹 숙이고 답하데요. '아니, 안 괜찮아'
나와 마주 앉는 데 석 달, 설득하는 데 석 달. 그렇게 6개월 만에 '나와 나'가 최종 합의를 이뤘어요. 이 책을 정성껏, 성실히 쓰기로. 최종 타결 이후에도 마치 김정은처럼 제멋대로 약속을 깨버릴 때도 물론 있었죠. 그때마다 '합의사항'을 상기시키고 그 아이가 고분고분해지길 기다렸어요. 그렇게 한 꼭지 두 꼭지 원고를 써내려 가던 어느 날, 한 편집자로부터 '출간 제안드립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았어요.
'내면 아이(Inner child)'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상처 받은 아이'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제2의 인격체 같은 거예요. 살다 보면 그럴 때 있잖아요.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는데 몸이 꼼짝도 안 움직일 때. 내가 내 말을 징그럽게 안 들을 때. 내가 나의 수비수가 되어 내 팔을 잡아당기고 내 발을 태클 걸며 내 질주를 필사적으로 막을 때. 그럴 땐 '자기 설득의 시간'이 필요해요.
내면 아이는, 말 그대로 '아이'어서, 게으른 데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무엇보다 겁이 아주 많아요. 협상 테이블에 앉기조차 격렬히 거부하는 경우가 많죠. 본능(마들렌)을 건드려 일단 앉히고, 끝도 없는 눈물과 투정을 다 받아준 뒤, 아이 대하듯 쉽고 직관적인 말들로 설득해야 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고 물어야 해요. '지금 네 인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냐'고. 인생의 핸들은 아주 무거워서 항로를 바꾸려면 '내면 아이'의 협조가 꼭 필요하거든요.
인생의 핸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무거워지죠. 일흔의 핸들은 서른의 그것보다 훨씬 더 뻑뻑하게 녹이 슬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무거운 핸들도 나와 내가 진심으로 합의에 이른다면 꺾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낸 작가가 있어요. 주부로 살다 남편과 사별 후 쉰다섯에 소설을 쓰기 시작, 예순넷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신예' 작가 와카타케 치사코예요. 첫 소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에는 작가의 치열한 자기 설득의 과정이 생생하게 중계돼 있어요. 작가와 마찬가지로 남편과 사별한 소설 속 주인공 '모모코'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수다를 떨어요. 어릴 때 썼던 도호쿠 사투리로 묻고 어른이 되어 배운 표준어로 답하죠. 그 수다 끝엔 이런 승리의 문장이 적힙니다.
나는 나를 따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이제까지의 나로 있을 수 없다. p. 114
'작가와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데도 난 여전히 집에서 논다.' 인스타그램에서 제 책에 대한 이런 리뷰를 봤어요. 내가 내 맘대로 안 되는 답답함,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핸들이 꺾어지지 않는데서 오는 좌절감이 저 한 문장에 온전히 실려 전해져 왔어요.
움직이는 모든 물체에는 관성이 있잖아요. 여태 해왔던 방향을 유지하려는 그 완강한 힘을 꺾으려면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고요. 그 힘은 나와 내면 아이가 완벽히 한 팀을 이뤘을 때야 나오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고요. 충분한 자기 설득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내가 나를 따른다'면, 인생의 항로는 결국엔 바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