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의 다른 글에도 쓴 내용이지만 딸아이의 성적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석차가 들어있는 성적표를 받아보니 아이는 반과 전교에서 바닥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중1 때에는 33명 중에 31등을 기록했습니다. 그 성적표를 받아와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내가 32등일 줄 알았어. 33등은 누군지 아니까. 우리 반에 심한 지적장애 친구가 있거든. 그 애가 33등일 줄은 알았는데 도대체 누가 나보다 더 공부를 못하는 걸까? 정말 궁금해.”
“내일 학교에 가서 애들한테 물어보지 그러니?”
“창피하게 그런 말을 어떻게 물어봐?”
“공부 못하는 게 창피하니?”
“그럼, 엄마. 내가 그 정도는 알거든.”
그 뒤로도 아이는 변함없이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성적표를 가져왔습니다. 언젠가는 수학 성적이 반에서는 꼴찌, 전교 208명 중에 207등을 기록했습니다.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운 지적장애 친구보다 더 낮은 성적이었습니다. 나는 대학원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학부에서는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입시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수학을 아무리 가르쳐줘도 못 따라오는 아이들을 그다지 예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꼴찌 성적을 받아 들고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아이의 꼴찌 성적표가 나에게는 축복이자 선물이라는 것을요. 아이가 꼴찌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예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소중한 감동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엄마가 되다니요!
아이의 단점, 부족한 점을 고치고 나서야 아이가 선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 부족한 대로, 모자란 대로, 미운 구석이 있는 대로 아이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이는 부모에게 놀라운 선물이 되고 가정에는 축복이 내립니다.
공부를 꼴찌 하는데 걱정은 안 되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이가 꼴찌를 한다는 것은 기준 미달도 아니고 법 규정을 어긴 것도 아닙니다. 어느 학교에나 꼴찌는 있게 마련이고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입니다. 사실 학교에 잘 다녀주는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울하거나 사는 게 재미없다고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하면 엄마가 귀찮아집니다. 대안학교를 알아보던가 검정고시를 알아봐야 하는데 그런 수고를 끼치지 않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아이는 수행 숙제를 하지 않아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 과목을 제외한 전 과목의 수행평가에서 0점을 맞았습니다. 숙제를 안 해가서 매일 깨지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아이의 모습이 또한 제게 선물이었습니다.
언젠가 아이의 사촌언니가 사법고시에 합격하자 아이가 갑자기 자기도 변호사가 되고 싶다면서 호들갑을 떤 적이 있습니다. 한동안 변호인으로 나오는 배우들의 모습에 심취하더니 학교에서 ‘자신의 미래의 직업’에 대해 글쓰기를 해오라고 하자 생뚱맞게 요리사가 되겠다고 써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변호사가 꿈이라더니 왜 요리사가 되겠다고 썼어?”
“엄마, 내 공부 실력 가지고는 변호사 되기 어려울 것 같아. 성적이 전교권을 다퉈도 될까 말까 하는데 내가 어떻게 변호사가 될 수 있겠어?”
그때 옆에 있던 친정언니는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왜 벌써 포기부터 하느냐’ 라며 도전해 볼 것을 부추겼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학업성적은 좋지 못하지만 판단은 현실적으로 하는구나'라고 안심했습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부모도 아이도 안 될 줄 뻔히 알면서 사법고시(지금은 없어졌지만)니 감정평가사니 변리사 등등의 공부를 붙들고 몇 년째 허송세월 하는 가정을 많이 만납니다. 부모는 처음에는 도전정신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지만 차츰 공부에 집중하지 않고 친구 만나고 술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쉽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면 집중력 있게 파고드는 공붓벌레가 아니고서야 저런 시험에 합격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는 선물이 아니라면 오히려 자신의 실력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이야말로 부모에게 주는 선물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험에 붙는 것도 선물,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것도 선물입니다.
발달장애 아이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집단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저는 숭고한 모성애와 자식에게 아무런 욕심도 내지 않는 '내려놓음의 진수'를 경험했습니다. 제가 집단의 리더로 참여했지만 그 어머니들의 아픔을 만 분의 일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면 알겠지만 정상 범주의 아이들은 저절로 발달합니다. 사오 개월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뒤집으려고 땀 뻘뻘 흘리면서 낑낑거립니다. 돌 무렵이 되면 무엇이든 잡고 일어서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서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저절로 발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달이 너무나 느려서 마치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 아무리 기다려도 옆집 아이와는 전혀 다른 발달 곡선을 보이고 엄마와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요?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 학교에서 만난 어떤 발달장애 학생은 혼자 걸을 수 없어서 보조교사가 부축을 하고 다녔고, 직업재활의 일환으로 카페에서 일하던 아이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음료주문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한 어머니가 해주신 말이 생각납니다.
“이 아이는 제게 선물 같은 존재입니다. 내 나이 친구들은 자식들이 다 떠난 뒤에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합니다. 물론 저 아이가 내 노후를 돌볼 수는 없지요. 하지만 내가 나이 들어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분명해요. 저 아이는 언제까지 제 곁에 있을테니까요.”
그 날은 서울에서 국제적인 정상회의가 열리는 바람에 강남구에 소재한 모든 학교가 휴교를 했습니다. 그 엄마는 아이 봐줄 사람을 찾지 못해 피치 못하게 아이를 데리고 집단상담에 참가했습니다. 옆방에서 다른 선생님이 돌보고 있는 동안 아이는 계속 울부짖는 듯한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다른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서 잠깐이라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가끔 학교에서 뛰어나와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지요. 학교에서 연락이 오면 학교 주변 도로를 샅샅이 뒤져서 아이를 찾아야 해요. 가끔 ‘어떤 집 아이가 사고로 죽었다더라.’ 그런 소문이 들리면 저도 마음을 쓸어내립니다. 복잡한 심정이 되는데요. 부러운 마음도 있습니다. ‘아! 그 집은 이제 고생이 다 끝났구나.’ 그런 생각이 스치지요. 때로는 아이를 데리고 한강을 운전해 갈 때 이런 생각도 합니다. ‘여기서 핸들을 살짝만 돌리면 모든 고통이 끝날 텐데...’ 그런 생각이 스칠 때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납니다.”
한 어머니는 목사 사모이신데 온수조차 나오지 않는 낙후된 시설의 집과 교회에서 고생이 말이 아니셨습니다. 아담하고 귀여우신 분이었으나 그분이 수행하는 하루 일과는 보통사람의 수십 배에 달했고 그럼에도 언제나 밝으셨습니다. 이분은 목사님이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느라 집단 회기를 다 채우지 못했지만 띄엄띄엄 올 때마다 참석한 것 자체로도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고 해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늘 바빠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는데 귀중한 시간을 선물 받았다고 하면서 젊은 시절에 결정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솔직한 표현을 거침없이 해서 좌중을 많이 웃겼던 기억이 납니다. 집단에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도 그분들을 따라 아름답게 채색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겹도록 뭉클한 경험이었습니다.
대부분 어려운 일상을 보내면서도 ‘장애로 태어난 아이가 내 인생의 소중한 선물 그 자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선물로 여기고 있었고 내면의 평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통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고통이 온몸을 휩싸이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평온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지에 까지 이르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보여준 부모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보여준 깊은 경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욕심을 내려놓았다면 다 이분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