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자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의 다자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다.
P가 다자연애를 결심했을 때 내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그의 마음을 가볍게 생각한 것. 미래가 없는 이 관계를 그가 겪을 우스개스러운 경험이라 지레짐작한 것. 그의 진심 어린 고백이. 단순히 나를 소유하기 위한 속삭임이라 스스로를 속인 것.
그의 노트가 판도라의 상자였음은 당연했다.
손에 쥔 노트를 보는 아주 짧은 찰나, 머릿속에서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시원한 풀 내음을 마시며 걸었던 스트릿. 자전거에 미숙한 내가 잘 따라오나 확인하던 얼굴. 매트리스 바꿨으니 자고 가면 안되냐고 투정부리던 목소리.
잠시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평소엔 들리지도 않던 P의 집 수조 모터음이 서막의 끝을 알리 듯 귓가에 크게 울렸다.
나는 호흡 한 번에 노트를 펼쳤다.
내 이름으로 휘갈겨 놓은 수많은 글씨들. 읽지 않아도 그의 감정들이 무섭게 박혀 들었다. 나는 재빨리 노트를 덮었다.
너는 어떻게 이런 감정들을 끌어안고 나를 보며 웃었을까.
사실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된 관계에 접어든 S와 다르게 P와는 항상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있었다. 그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고, 모든 것에 냉소적인 듯싶다가도 부질없는 우리 관계에 의미심장한 말을 자주 했다.
P 스스로도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원인이 나라는 사실이 자명했지만 한편으론 내가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것도 두려웠을 것이다. 나는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나를 사랑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P와도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이기심을 부렸다.
나는 진실을 보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진심을 보지만 않으면, 그의 마음을 보살피지만 않으면, 우리의 관계도 일정 지점에서 안정된 단계로 접어들거라 욕심을 내고 있었다.
P는 나와의 관계에서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미래를 꿈꿨다. 나와 가고 싶은 곳,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을 계획해 나갔다. 그는 수 차례 나와 미래를 꿈꿨고, 나는 그가 꿈꿔온 미래의 수만큼 그를 실망시켰다.
그와 미래를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확신이 없었다. 다자연애라는 성질이 내게 잘 맞았기에 한 사람을 위해 나를 헌신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미래를 이야기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나는 오픈 메리지 (Open Marriage)를 지향했기에 사실상 결혼이라는 제도가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반면, P에게 결혼은 한 명의 배우자만을 위한 클로즈 메리지(Close Marriage)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치관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관계를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미래가 너무나 달랐다. 미래가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사랑만으로 극복되지 않았다.
P가 집에 돌아왔다.
우리는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마쳤다.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꽤나 담담했다. 그를 놓아줘야 그가 편해지리라 결론 내린 나 역시 이별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앉아 한 바탕 크게 울었다. 북받친 감정이 진정되다가도 시선이 서로에게 머물면 서럽게 울었다. 그는 내게 티슈를 건네줄지언정 눈물을 닦아주진 않았다. 그 순간 우리의 관계가 정말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식탁 위에 쌓인 젖은 티슈만큼. 나의 감정과 그의 감정이 몸에서, 마음에서 떨어져 나왔다.
고양된 감정이 수그러들고 우리는 코를 훌쩍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K, 내가 해보니까, 이거 절대 성공 못해. 호기심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어도 정말 그 사람에게 진심이라면 다자연애는 성공할 수 없어."
"모든 연애에 장단점이 있잖아. 이 세상 누군가에게는 이 연애가 잘 작동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 장점이 하나 있네. 넌 지금 나랑 헤어져도 여전히 S가 있네."
"속이 후련해?"
"응. 헤어지는 건 옳은 결정이었어."
"내 탓하지 마, 난 처음부터 이 관계에 대해 경고했으니까."
"K 하나만 묻자. 정말 진심으로 날 사랑했다고 믿어?"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도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P에게 흐르는 마음을 매번 붙잡았다. 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P도, S도 아닌 바로 나여야 했다. 나는 이 관계에서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했다.
진심을 다하지 않았던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P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에게로 흐르는 마음을 매번 붙잡았을 것이다. 미래를 꿈꾸다가도 고개를 저으며 '때려치워, 우리에게 미래는 없어' 라며 절망했을 것이다.
우리의 연애는 평범한 연애가 아니었고, 우리가 했던 사랑은 안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P와의 이별 후, 나와 S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S는 나의 이별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파트 아래로 찾아 온 S를 정중히 돌려보냈다.
이건 P를 위한 나의 애도의 시간이었고 마지막 배려였다.
그날 밤, 울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아니 내가 P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가 받았을 상처가 가늠되지 않았다.
그에게 준 상처는 어떤식으로든 내게 돌아오겠지.
나는 달게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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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