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싱가포르 직항 있어요
비행기에 앉아서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 아무런 방해가 없는 반강제적인 고요한 환경에서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내가 생각하고팠던 일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떤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비행기 안에서 글을 읽는 것도 좋다. 하늘 위에서 가지는 나만의 조용한 독서와 글쓰기 시간. 그래서 나는 자는 시간에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는, 깨어있는 시간에 비행기를 타서 이 시간들을 활용하려고 하는 편이다.
코로나 이후 싱가포르-부산을 연결하는 직항이 생겼다. 부산/양산에 부모님이 계신 나로서는 이 직항이 생겨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그중에서도 제주항공을 자주 타는 편인데 저가항공사이다 보니 비행기 사이즈가 작다. 그래서 보통 출장으로, 다음날 바로 미팅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프리미엄 이코노미로 가거나 아니면 비상구 근처, 앞 공간이 조금 넓은 좌석을 지정해서 타고 간다.
지난번 싱가포르에서 부산으로 오는 길에는 비행기가 만석이었다. '가운데 자리를 지정하면 내 양 옆에 사람들이 안 탈 테니 넓게 가겠지?' 하는 마음에 전략적으로 가운데 자리를 선택한 게 오히려 독이었다.
"누나, 저 안으로 들어갈게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분이 나에게 어눌한 한국말로 말을 걸어왔다. 그분이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면서도, 가운데 끼여 타고 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왜 내가 누나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멤돌았다.
보통 비행기에서 옆자리 분께 먼저 말을 거는 편은 아니다. 딱 봐도 외국인인데 어눌한 한국말을 하는 게 신기해 말을 붙여봤다. 김해의 공업 단지에서 3년째 일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가 고향인 분이었다. 맞다, 사실은 이 분의 나이가 너무나 알고 싶었다. 왜 나보고 누나라고... 28세라고 해서 봐줬다. 누나 맞네.
5년 계약으로 한국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자기 아이가 태어나서 집에 다녀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도 비슷한 처지예요 - 저도 싱가포르에서 9년 동안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지금은 집에 가는 길이에요. 집에 가끔 가요. 짤막한 이야기를 나누며 부산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가는 비행편. 이번에는 앞 공간이 여유로운 좌석을 지정했다만, 또 옆자리에 사람이 있다. 어쩔 수 없지, 앞이라도 넓으니까.
마찬가지로 한껏 감상에 취해 한국에서 만났던 사람들 얼굴을 되짚어보며 일기를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밀린 독후감도 쓰면서 몰입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기요, 이것 좀 안 하시면 안 돼요? 이렇게 세게 팔 올렸다 내렸다 하는 거요."
앗. 독후감을 쓴다고 무릎에 책을 올려두고 타이핑을 하다가 다시 책을 보곤 했는데, 그때 내 팔 움직임이 거슬렸나 보다.
"지금 몇 시간째 이러시고 있잖아요"
"아, 앞으로 제가 조심할게요. 근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알고 그런 게 아니란 걸 아니까 제가 몇 시간을 참았죠. "
"그렇게 참으실 필요 없었어요, 처음부터 이야기하셨으면 제가 진작에 조심했을 텐데"
"그래서 제가 지금 이야기하잖아요. 진짜 짜증 나려고 해서."
...흠.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이런 짜증을 받아봤다. 잠깐 당황해서 사고가 멈췄다. 조목조목 따질까 하다, 말이 안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자리를 나와 승무원님께 이런 상황을 이야기했다. 다행히 이번 비행기는 만석이 아니어서 뒤에 3자리가 통째로 빈 다른 이코노미 좌석을 찾아주셨다. 지금은 테이블 3개를 이어 쓰면서 여유롭게 글을 쓰는 중이다.
내 그릇이 작아서인지, 짜증 가득한 투로 불만을 표출하는 그분께 도저히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 않았다. 이미 몇 시간 동안 내 팔 움직임이 거슬렸는데 참고 있었다니,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마침 독후감을 쓰던 책에서 아래 구절을 발견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바꾸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무작정 참고 버티면서 내 입장을 똑똑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내 마음 상태를 허심탄회하게 보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게 아쉬운 것이다. 그때 내 욕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똑똑하게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화에 휘둘리면 무력감이 든다. 반대로 화를 적절히 다루면 유능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유능감은 스스로를 더욱 나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 준다.
한성희 -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 - 책 중에서
처음에는 생전 처음 보는 비행기 옆 사람 짜증을 내가 왜 받아줘야 하지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더 쾌적한 환경에서 몰입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해 준 그분께 감사를.
싱가포르 여행으로 가시는 것 같던데..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