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얇고, 우유부단한 당신들
내 MBTI 성격 유형이 뭔지 기억이 안 난다. 결과지를 보면 중간에 걸쳐있는 항목들이 많아, 테스트를 할 때마다 줄곧 다른 성격 유형이 나오곤 한다. 어중간한 사람. 내향인과 외향인의 중간지대에 있는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금세 혼자 있고 싶어지고, 혼자 있다가도 가끔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모임에 나가기도 하지만, 좀 있다 보면 이내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매사에 확신이 찬 사람들이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자기 의견에 확신이 가득 찰 수 있지? 소신 있고 줏대 있게 자기 길을 가는 친구들이 참 멋있고 부러웠다. 난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많이 받을까? 난 왜 줏대가 없을까? 난 왜 이렇게 귀가 얇고, 우유부단할 하까? 난 왜 내가 원하는 걸 모를까? 나는 왜 이렇게 쉽게 불안해질까?
이 글은 늘 중간에 걸쳐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나)에게 바치는 글이며,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불안한 사람들(나)에게 바치는 위로이자, 경계에 서 있는 것, 다른 말로 '경계 인간(Ambivert)'의 장점에 대한 기록이다.
사람들은 삶에 작용하는 흐름과 기존 행동 양식을 따른다. 이렇게 정해진 구조와 관성을 따르는 것은 아주 쉽고 편안한 반면, 어떤 행동을 취해 그 흐름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경계인간은 주변 사람, 책, 우연히 피드에 나타난 영상 등에 쉽게 영향받는다. 이런 성향은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 바꾸고 싶은 것들을 바꾸게 해 주며, 삶을 쉽게 개선해 나갈 수 있다.
꼭 comfort zone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comfort zone 밖의 경험들로 인해 ‘다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가 많지만), 그 다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고, 거기서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는 온전한 진실을 알 수 없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들 나름의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저 내가 직조한 ‘체’에 의해 걸러진 그 사람의 파편일 뿐이다. 이를 인지한 경계인간은 명민하고 선한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다.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하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헛소리다.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보통 우리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에서 벗어나 확실성과 명료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변의 진리가 아닌 하나의 생각, 가치관일 뿐이며, 따라서 재평가가 가능하다.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ambivert)의 불안함을 받아들이고, 여기서 나오는 즐거움과 효용을 누리 선택할 수 있다. 이 효용과 즐거움에는, 경계에 있을 때만 기를 수 있는 통찰력 -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존 관성, 개념에서 벗어나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 과 불안, 모호함 등을 견디는 용기 등이 있다.
유전 형질 변이를 통해 생명체가 진화하는 것을 발견한 찰스 다윈은 말한다. 어떤 환경에 더 ‘적합한’ 형질이 있을 순 있지만, 거기에 우위는 없다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향도 어떤 분야에 더 적합한 성향이 있을 순 있지만, 그 성향들 사이에 우위가 존재하진 않으며, 적합성에 대한 판단 역시 영원 불변한 것이 아니다.
늘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한 사람인 것 같았는가? 그게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그런 성향을 가졌음을 받아들이고 경계에서 나오는 두려움, 불안함, 모호함을 견디는 용기를 가져보라.
당신의 그 고유함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세상을 더 다채롭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