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에게 받은 상담
이번 달 초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했고, 지난주에는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던 곳에서 업무를 마무리하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백수가 됐다. 지난 3년 동안 MBA를 다녀오고, 복직하고, 스타트업경험도 하고, 그리고 작년 초 이직을 결심한 뒤 부터 일이 나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해 왔다.
내가 자라면서 우리 집에서는 늘 '일'에 최우선 순위를 뒀다.
일찍부터 사업을 하셨던 아빠는 늘 바빴고, 어린 시절 아빠와 시간을 같이 보냈던 기억은 많지 않다. 직원들 월급을 챙기는 사장의 무게를 잘 알고 계셨기에, 아빠와 안부 전화는 항상 '사장님과 회사에 누가 되지 않게끔 해라, 아빠는 나중에 봐도 된다'로 끝났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하면서 포기하게 된 엄마의 삶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여자로서 전문직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당당하게 내가 설자리를 만드는 게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해외에 첫 직장을 잡은 이후로 쭈욱 해외에서 살았다. 출장으로 1년에 두세 번 정도 한국에 들어갔다. 그때마다 늘 미팅으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다, 짬이 나면 잠깐 부모님을 보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한국 방문은 늘 바쁘고, 정신없고, 감정적으로 힘든 시간들이었다. 한국 출장은 나에게 부모님을 내팽개쳐두고 해외에서 내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마음 한켠에 밀어놨던 부채감과 직면하는 시간들이었다.
퇴사 날짜가 정해진 바로 다음 날,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이번에야말로 여유롭게 한국에 가서 엄마 아빠랑 좋은 시간을 보내야지. 기대와는 달리 거래처 미팅들이 사라진 한국에서의 여유로운 시간들은 오히려 엄마와의 갈등으로 채워졌다.
엄마와 나는 사고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그 '다름'에 대해서 엄마가 감정적으로 다가올 때면 그게 난 참 버겁다. 특히 올해 계획 중인 결혼식의 혼주석을 없앴으면 하는 내 의견에 엄마가 반대하면서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과 의견을 들어가며 간극을 좁히고, 합의점을 찾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왜 엄마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나를 감정적으로 몰아붙이는 거지? 왜 엄마와 나 사이의 관계보다, 다른 하객들의 시선을 더 신경 쓰는 거지? 혼주석을 없애는 게 왜 내가 엄마 생각을 덜한 게 되는 거지? 나는 그냥 모두 참석할 수 있는 결혼식을 원하는 것일 뿐인데.
생각이 너무 복잡해져서, 내가 좋아하는 영국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을 찾았다. 지난 영국 출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고, 이후 개인적인 친분을 쌓게 된
것은 아니고.
ChatGPT를 이용해서 알랭 드 보통과 상담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이 똑똑한 AI가 알랭 드 보통의 내면 성찰을 도와주는 어투로 나를 상담해 준다. 이번이 벌써 3번째 상담인데, 꽤 효과가 좋다.
이후부터는 내가 마주한 상황을 설명하고, 알랭 드 보통과 대화하는 것처럼 편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면 된다. 상황을 설명하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쓰면서 생각도 정리되고, 내가 느낀 감정들을 스스로 유효하게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 알랭 드 보통은 친절하게 - 그런 감정들을 느꼈구나, 힘들었겠다 - 하며 최고의 상담사가 되어준다. 이번 세션을 통해서 특히 도움 됐던 부분 몇 가지를 짧게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 엄마의 관점을 이해하게 도와줘. 그러면 내 화가 좀 풀릴 것 같아.
알랭 드 보통: 전통에 대한 애착 / 인정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구 / 외부 이미지, 명성에 대한 염려 / 감정적인 불안정과 취약성 / 문화, 가정적인 기대 등이 있어. (각 항목들에 대한 세부 설명도 친절하게 해 줬다.)
나: 나한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중요치 않고, 엄마와 나의 관계가 더 중요한데, 대체 엄마는 왜 그런 외부적인 인정과 확인을 더 우선시하는 거야? 감정적인 불안정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딸인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해?
알랭 드 보통: 외부의 인정과 확인을 바라는 건 이상한 건 아니야. 특히 그들이 감정적인 불안을 가지면 더욱 심화될 수 있지. 보통 과거의 경험이나 사회적인 기대, 그리고 개인적인 불안정 등이 이유야. 엄마의 감정적인 불안정을 돕고 엄마와의 의사소통 방식을 개선하고 싶어 하는 딸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볼게.
- 개방적이고 공감하는 의사소통: 엄마가 판단(judgement)에 대한 걱정 없이 감정과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끔 경청하고, 진실되게 공감하고 이해하는 의사소통의 시간을 가져봐.
- 엄마의 감정을 인정해 줘. 엄마의 감정과 경험들을 들어주고,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해 줘. 엄마에게 너의 사랑과 지원, 그리고 부모로서 네가 존경하고 있다는 걸 알려줘.
- 엄마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과 자신을 인정하는 시간들을 제안해 줘. 엄마가 느끼는 감정들의 근본적인 이유 (Root cause)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게, 엄마 자신을 되돌아보고 엄마 감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길 제안해 줘.
- 전문적인 도움: 엄마의 정서적인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전문적인 상담가와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추천해.
이런 방법들을 너의 공감과 인내심, 그리고 엄마의 정서적 건강을 진정으로 바라는 너의 마음과 함께 시도해 보면, 엄마의 감정적인 불안정을 개선하는 데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엄마와의 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될 거야. 이런 치유의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니, 이해와 무조건적인 사랑이 함께 해야 해. 너의 감정적인 well-being과 엄마와 장기적인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너 자신의 정서적인 건강도 챙기면서, 너와 엄마 사이 적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도 우선시 되어야 해.
앞서 일에 대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걸로 글을 시작한 것과는 사뭇 다르게 글이 흘러갔지만, 결론은 이렇다. 부모님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과는 달리, 일이 내 삶의 최우선 순위는 아니다. 오히려 내 삶의 우선순위는 나와 내 가족, 연인, 친구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행복이며, 그들과 내가 가지는 건강한 유대관계이다.
나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며, 사회가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직업적으로 기여하고 싶고, 비전을 공유하는 리더와 일하고 싶다. 비슷한 가치관으로 서로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들끼리의 연결을 도우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의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게 '직업'의 형태를 띨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내 가족, 가정의 유대관계가 바로 서있지 못하면 이게 다 소용없지 않나?
나와 같은 우선순위를 지니지 않은 엄마가 답답하고, 감정적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 섭섭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고 너무 다른 경험을 해왔다. 내가 내 감정과 의견들을 존중받으면서, 확고한 내 우선순위를 세우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엄마는 그렇지 못했던 거겠지.
그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딸로서 엄마가 감정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다.
알랭 드 보통의 조언처럼 내가 다치지 않게끔, 적정한 균형과 간격을 잘 유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