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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킨 글 Aug 13. 2021

사랑은 빨강이고 초록이 함께한다.

영화_ 노트북

빨간 옷을 입은 여자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
집안 환경이 극과 극이었던 남녀는 한 여름날의 꿈처럼 사랑을 하고 이별을 겪는다. 하지만 남자의 노력으로 여자를 다시 사로잡게 되고 죽는 순간까지 서로만 바라보며 생을 마감한다.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산다. 혹자는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건 원초적인 종족 번식의 본능에 의한 산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내 입장은 다르다. 사랑을 하는 건 그보다 고차원적이고, 운명이자 필연으로 이루어진 생명력이 있는 영혼 그 자체라고 믿는다.
물론 나 역시 아직 사랑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내릴 스 없다는 의견에 손을 드는 사람이다.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의 결합체라서 단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가족, 이웃, 친구와 같은 사람을 넘어 꽃, 강아지, 고양이 같은 동식물, 그리고 예술, 과학, 경제 등과 같은 분야까지 어마어마한 범위에 있는 대상을 향해 사랑한다는 말을 적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 대체 사랑은 무엇인가. 확실한 건 사전적 의미의 사랑은 정답이 아니라는 거다. '대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껴주는 것'은 사랑을 담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이다. 사랑을 해도 의견 대립이 있을 수 있다. 또, 일상의 평화를 앗아갈 힘까지 있는 것이 사랑이잖는가. 이기적인 면이 분명히 있어서 위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올바르게 터득하려는 자의식을 가지고 살면서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의미로 영화 '노트북'은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사랑 길잡이로 손꼽는다. 오로지 사랑이란 주제에 초점을 맞춘 만큼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데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과연 주변에서 '인생 최고의 사랑 영화'라는 말까지 하는 이 작품은 사랑을 어떻게 묘사할까.




꽃잎은 초록의 줄기 위에서 아름답게 핀다.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인 앨리는 철저히 붉은 잎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굳세게 받쳐주는 노아라는 남자 주인공이야 말로 멋있는 줄기였다.
노인이 되어 치매에 걸린 앨리와 그녀를 챙겨주는 노아. 노아는 앨리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적힌 노트북을 앨리에게 읽어준다. 그런 앨리는 빨간 옷을 입고 있었고 처음 둘이 만나게 된 과거 이야기에서도 앨리는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이처럼 빨간색은 계속해서 두 사람 곁을 칠했다. 그리고 둘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오는 도로에서 춤출 때, 빨간 포스터와 초록 포스터, 빨간 네온사인과 초록 네온사인, 빨간불과 초록불이 함께 있는 신호등까지 확실히 둘이 붙게 되는 걸 암시해준다.



뿐만 아니다. 앨리가 빨간 옷을 입고 초록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더 노아에게 빠지는 걸 보여주며, 이는 폐가가 된 집에서 절정을 찍는다. 빨간 천을 깔고 촛불이 켜진 곳에서 둘은 사랑을 나누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아직 앨리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둘은 잠시 이별을 한다. 잠시라고 표현을 했지만 몇 년이나 떨어져 지내게 된다. 그동안 앨리는 빨간 차를 끌고 온 군인 출신의 남자와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 곧 약혼까지 한다. 한 편 노아는 앨리를 잊지 못하고 전쟁미망인이 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며 공허하게 지내게 된다.
날이 갈수록 노아라는 존재가 흐려지던 앨리. 그녀는 여러 사람들과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날을 맞이한다. 하지만 우연히 노아를 상기하게 된다. 그 후 앨리는 면사포를 머리에 쓴 채 붉은색으로 도배된 욕실에서 고민을 하고, 노아를 찾아가기로 결심을 한다.



둘은 그렇게 몇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됐고, 상대방이 자기를 의도적으로 멀리한 게 아님을 확인하였다. 이내 과거 사랑을 나눌 뻔했던 장소, 즉 노아가 모든 걸 바쳐 폐가를 근사한 집으로 바꾼 곳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때는 큰 벽난로 앞에서 빨간 담요를 덮고 서로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때 나는 위태로웠던 사랑이 단단하고 거대한 사랑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미망인은 둘의 만남을 알게 되고 인정을 하고서 빨간 차를 타고 떠나간다.



노아는 그 후 앨리에게 빨간 꽃을 선물한다. 초록 줄기에 빨간 잎을 지닌 꽃을 말이다. 빨강과 초록이 완전히 하나가 되길 바라는 듯이.

결말은 이랬다. 앨리가 우여곡절 끝에 약혼을 취소하고 초록 잔디와 초록 나무가 무성한 노아의 세계로 돌아가서 평생을 함께하고는 함께 마지막 눈을 감고서 조용히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가 재밌는 점은 다른 색깔을 통해서도 어떤 걸 표현했다는 건데, 계층을 나타낼 때였다. 상위 계층은 하양으로, 하위 계층은 검정으로 구별했다.
시각적인 요소는 영화의 핵심이다. 이를 잘 간파하고 의미를 담아 녹여낸 게 인상 깊고 좋은 영화임은 틀림없구나 싶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사랑을 하지만 그럼에도 싸움을 자주 했다. 심지어 남으로 지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인생의 종착지까지 함께 걸었다.
사랑은 무조건 전부를 배려하기 힘들다.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작가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표현할 정도로 너무도 다른 구조로 된 존재가 남자이고 여자임을 나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랑 위해 평생을 바치기까지 한다. 왜 일까.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행복을 갈망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라고 본다.

만족스러운 행복을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를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혼자 모든 걸 짊어지는 건 버겁고 신경 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는 환경의 내, 외부적인 영향을 신경을 쓰며 살려면 의지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남녀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배려와 존중이 토대가 된 감정인 만큼 갈등이 생겨도 극복을 하며 행복을 거머쥘 수 있으니까.

나 역시 사람이고 사랑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잘 안다. 불행을 껴안고 살기는 싫으니까. 그래서 꽃잎이든 줄기든 혹은 뿌리인 채 살아갈 것이다. 그 출발은 한 층 더 나 자신을 사랑하는 자세부터 갖추는 것이다. 영화에서 노아는 몇 번이나 앨리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보도록 도와준다.  모습은 마치 자신이 쟁취하는 행복이 정말 스스로가 원하는 지 제대로 알아야 하는 걸 인지하는 게 중요하단 걸 보여주는 걸로 느껴졌다.

중반부에 잠깐이지만 앨리가 듣는 대학교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다.

"내 존재가 자가당착인가? 그렇다면 자가당착을 범하련다."


자가당착의 뜻은 같은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의 앞뒤가 어긋나 모순된다는 건데, 이를 범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겠다는 의지를 표출하는 거다.
그렇다. 자기를 올곧게 만들어야 한다. 사랑을 하려면 나를 잘 알고서 가꿔야 한다. 사랑의 감정은 결국 나의 것이니까. 나를 더 사랑하자. 그게 행복이니까.

나를 우선시하고 어떤 존재를 사랑하자. 그리고 배려하자. 이 두 가지를 가슴에 새기며 나에게 맞는 사랑을 찾아서 지켜야지. 위대한 빨간 사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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