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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Feb 19. 2020

2월, 드물게 주파수가 맞는 이 기꺼운 사람들

우정에 대하여 <잊기 좋은 이름>

한 작가의 (어쩌면) 성장에 대한 이 글들을 친구에 대한 것으로 바꿔 읽어봅니다. 기억 곳곳에 남아 있는 뭉클한 장면들 속에서 친구의 존재를 찾아내 봅니다. 드물게 주파수가 맞는,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웠지만 따사로운,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지나가듯 편안히 자기 이야기를 섞는 사람들이 그의 삶에 참견하고, 들어오고, 움푹 홈을 내고, 결국 그 삶을 함께 떠받쳐왔음을 알게 됩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인연들은 우리를 두 번, 세 번… 때론 백 번도 더 살게 합니다. 자신만의 삶 속에서는 겪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고, 이입해 보게 하고, 의문을 품게 하고, 알게 합니다. 이 책의 작가는 친구로부터 사춘기 시절, 어머니를 여읜 뒤 쌀을 씻으려다가 쌀벌레를 발견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합니다. 그때, 막 상복을 벗고 부엌에서 혼자 쌀을 씻었을 어린 친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고. 스스로 겪지는 않았으나, 그 일은 작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 아픔이 언젠가 그의 소설 중 일부가 될 수도 있겠지요. 

친구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얼마나 허물없는 사이여야 하는지 혹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킬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각각 다르고 늘 변하겠습니다만, 돌이켜보면 우리는 누군가를 친구로 기꺼이 받아들였을 때, 나의 삶에 참견하고 섞여 들어오도록 마음을 열었을 때 가장 많은 것을 배워왔습니다. 심지어 나의 기대와 달랐거나 나의 중요한 부분을 할퀴고 가버린 친구들로부터도, 집착하지 않는 법이라든지 내 안에 잠재한 수치심, 불안, 미움, 분노 등등과 대면하는 법을 알게 되었죠. 스쳐지나간 인연 중에서는 인장 같은 이름도, 쉽게 잊는 이름도 있겠습니다만, 인생의 어떤 시기도 친구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책입니다. 


이 페이지, 읽어보세요!


그날 밤 사람들과 조촐한 축하 자리를 가졌다. 몇 안 되는 동기들이지만 그 자리에 모두 와주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장발에 수염을 기르고 다니던 동기 하나가 내게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줬다. 평소 학교 과실에서 먹고 자며 기숙하던 사내였다. 2002년, 이문동엔 유명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없었고, 그가 동네를 헤맨 끝에 들고 온 건 크림에 색소가 많이 들어가고 빵에서 쉰 행주 맛이 나는 ‘야매’ 아이스크림 케이크였다. 우리는 술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숟가락으로 곰돌이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모두 열심히 파먹었지만 끝내 다 먹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동기들이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 떠들며 잔을 기울이는 동안 그는 풀 죽은 채 ‘배스킨라빈스 같은 걸 사 왔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곰돌이는 한쪽 눈과 코가 파인 채 빙그레 웃다 점점 울 것 같은 얼굴로 녹아내렸고. 한참 뒤 우리는 서로 익숙한 뒷모습을 보이며 휘적휘적 헤어졌다.(중략)

어느 날 오랜만에 이문동 제과점 앞을 지나다 그때 생각이 났다. 한 사내가 밤새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겨울밤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얼굴 여기저기가 움푹 파인 채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며 미소 짓던 곰돌이도. 그제야 나는 ‘배스킨라빈스 같은 걸 사 왔어야 했는데’가 얼마나 다정한 말인지 새삼 깨달았다. 강북의 후미진 부엌 어딘가에서 ‘진짜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진짜 비슷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진짜 노력했을 제빵사처럼. 그 무렵 그렇게 조금씩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럽고 따사로운 무엇이 나를 키우고 가르친 건 아니었을까 하고.(47~49)


나는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도 잘 모르는 소리를 하며 한껏 폼을 잡았다. 하지만 중간에 코르크 마개가 부서진 와인을 따기 위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원해 합심하는 지인들 곁에 앉았을 때, 아버지가 얹어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그 팔 안에서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깨닫고, 배우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전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어리석어,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며 살아간다. 말과 글의 힘 중 하나는 뭔가 ‘그럴’ 때, 다만 ‘그렇다’라고만 말해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신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팔이 많아 아름다운 문학을 이따금 상상하며 말이다.(51~52)


우리가 몇 번째 만났는지 더 이상 세지 않게 됐을 때 비로소 나는 그녀가 잘 웃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땐 눈가 주름이 기분 좋게 구겨진다는 것도. 그녀는 그걸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지만. 웃음 속엔 사진사가 셔터를 누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난 ‘바스락’ 소리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점점 가짜 공통점을 만들어내기보다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서둘러 가까워지려 고해하는 말이 아니라 지나가듯 편안하게 섞는 얘기들이었다. 그녀가 6년 차 직장인이라는 것, 대학원에서 만난 선배와 스터디를 했고, 많은 스터디가 그렇듯 공부는 안 하고 술만 마시다 부부의 연이 닿게 되었다는 것, 그가 가끔 그녀를 북돋으려 자기 이름을 딴, 상금 20만 원짜리 문학상 시상식을 거실 텔레비전 앞에서 열어준다는 것, 따뜻한 물과 커피를 좋아하고, 맥주보다 소주를 좋아한다는 것, 타자기 자격증이 있고 일본어 학원을 나간다는 것 등. 

최근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는 벌레에 관한 것이었다.(중략) 사춘기 시절, 어머니를 여읜 뒤 쌀을 씻을 때 일이라 한다. 상 치르고 며칠 안 돼 밥을 지으려 쌀통에서 쌀을 꺼냈는데, 그 속에 쌀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단다. 장마철이라 그랬는데, 바구미가 아니라 기다란 애벌레라 더 혐오스러웠다고. 그녀는 쌀을 씻어 아버지께 상을 차려드렸지만 자신은 며칠 동안 집밥을 먹지 못했다 한다. 이야기는 아주 짧았고 금세 다른 화제에 섞여 지나갔다. 그녀 역시 심각하게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른 화제가 지나가는 동안 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여름, 상복을 벗고 부엌에서 혼자 쌀을 씻었을 어린 그녀를 생각하니, 그녀가 봤을 벌레, 하얗게 바글거렸을 벌레를 떠올리니 마음이 아팠다.(157~159)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11월부터 멈포드의 서재는 동네 서점 '니은서점'@book_shop_nieun과 함께 열고 있습니다. 2월부터 3개월간 진행하는 시즌 2의 주제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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