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전쟁과 평화를 위한 흔적
13. 하늘의 요새 메헤랑 가르성
미리 말하자면 내가 가본 라자스탄의 성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웅장하며 볼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 후에 자이살메르성과 우다이뿌르의 시티팰리스, 자이뿌르의 시티팰리스를 이후에 가게 되지만 메헤랑 가르성을 보고 난 뒤의 감흥 때문인지 성의 특색이 거의 비슷해서인지 나에게는 메헤랑 가르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규모가 가장 컸으며 성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아래의 블루시티에대한 전경, 그리고 성 내부에 용도에 따른 각 방에 특색등은 가장 많은 볼거리등을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메헤랑가르성에서는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각 번호판이 매겨진 사이트에서 번호에 맞는 오디오 가이드를 재생하면 해당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준다. 여행을 혼자간 나에게, 그리고 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미를 파악해보고 싶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 여행기를 읽는 사람이라면 메헹가르성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한국어 가이드를 이용해볼 것을 추천한다. 델리의 붉은 성을 제외하고는 내가 가본 다른성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
재밌는스토리와 함께 인도의 라자스탄의 특색있는 성을 누군가의 설명과 함께 들을 기회가 메헤랑 가르성에서 밖에 없다. 난 나의 여권을 맡기고 오디오 셋트를 빌려 들고 나의 귀에 장착했다. 혼자 여행한지 3일째라 그런지 오디오 세트에서 나오는 한국말은 나에게 단순한 메헤랑 가르성에 대한 정보만 흘러나오는게 아니라나의 고독감과 외로움을 씻어주는 위로와 포용이 담겨져 있는 듯 했다. 가끔 오디오 가이드가 말해주는 설명해 대화를 하듯이 “아 그렇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라는 추임새와 질문을 되받아 치기도 하였으며, “좋아 이제 모띠 마할에대해서 이야기해줘!”라고 간곡한 부탁을 하면서 내 손으로는 재생 버튼을 눌러 오디오 가이드에서 모띠마할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자작극을 펼치기도 하였다. 마치 캐스트어웨이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배구공으로 친구를 만든 ‘윌슨’과 견줄 정도로나의 여행에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메헤랑 가르성에는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650년동안 고스란히 지금까지 전달해주고 있었다. 이미,성을 만들 당시에도 더 방어가 수월한 곳으로 옮겨야 결심했기 대문에 이곳 조드푸르에 자리를 잡았고, 맨 처음 사진처럼 성의 모양과 아름다움 보다도 누구하나 기어 올라오지 못하도록 절벽으로 깎아 내렸다. 그 메헤랑가르성을 저항하는 병사없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인도의 성에 들어온건 처음이었다. 인도의 성에는 잔혹한 전쟁의 역사가 길들여져 있어 그 당시 전투의 참혹함과 냉점함이 엿보이는 광경들이 입구의 초입에서부터 보여주었다.
위의 사진의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친부분은 총포탄의 흔적이 고스란히보여주고 있다. 또한 메헤랑가르는 7개의 문을 통과해야 내부로들어갈 수 있는데 각 문에는 전쟁시 적군의 성의 칩입을 늦추기 위한 전략들이 숨어져 있었다. 적군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 문을 부수기는 전투를 벌일 때, 적군의 전력의 소모는 엄청 났기 때문에 좁은 문앞에서는 적군의 전투력을 분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을 부수기 위해서는 전면에 선 병사들의 죽음을 소모하였기 때문이었다.
위의 사진도 전쟁 침략을 막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다. 좁은 문은 물론이거니와 사진 상 왼쪽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올라가야 메헤랑가르성을 올라가는 길이다. 이렇게 급경사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대부분의 성문을 부실때는 전쟁시에 코끼리를 동원한다. 굵고 단단한 문을 부실때는 코끼리에 가속력을 더해 머리로 문을 부실 수 있다. 이러한 급경사는 그런 코끼리의 가속력을 만들 수 없도록 만들도록 급경사를 만들어놨다. 치밀하다.
더 잔인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은 위의 사진이다. 보통 고대성의 문과 다를 바가 없어보이지만 저 문은 문 중간부분에 쇠창살이 뾰족하기 튀어나와 문을 들어오려고하는 이에게 위협을 하고 있었다. 저 뾰족한 쇠창살 코끼리가 머리로 문을 부술 때 코끼리 머리에 피해를주기 위해 쇠창살을 달아 놓았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이 잔혹함이란 사랑스런 코끼리도 아무렇지 않게죽일 수 있을 만큼 냉철해야만 했다. 사실 코끼리가 전쟁에 쓰이는 것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코끼리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거니와 대부분 말을 이동수단으로 빠르게 이동시키거나 화살과 포와는 다르게 익숙치 않다.
삼국지에만 읽어봐도 간간히 코끼리 뿐만 아니라 맹수부대라 하여사자나 호랑이등의 범계열등이 맹수부대라하여 인간의 전쟁에 투입되었었으며, 페르시아나 인도 중앙아시아쪽으로가더라도 강한 동물들은 전쟁에 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장기를 두는 것을 좋아했던나는 처음에는 장기의 말중에는 “졸”,”왕”,”마”,”포”,”차” 등의 캐릭터들을 이해 할 수 있었지만 “상” 이라는 캐릭터는 생소했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뜻도 모른채 장기를시작했으니 “상”의 궁극적인 쓰임새나 목적이 없었다. 사실 코끼리 ‘상’ 을한자로 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장기의 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실제 전쟁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기의말중에 “졸”은 병사를 의미했지만 장기라는 판을 전술적으로봤을 때 “졸”은 성벽을 의미했다. 성벽을 지키고 있는 것은 “졸”이기때문이다. 이 성벽을 쉽게 깨는 방법은 “상” 이라는 코끼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성벽을 깨고 다른 말들의 길을 열어 상대방을 공략할 수 있었는데, 그 메헤랑가르성에서 “상”으로“졸”을 깬다라는 의미의 실제 현장에 와 있는 거 같았다. 마치 내가 장기판 위에서 그 현장을 지켜보는 듯, 전쟁이라는 단어를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는 단순히 손가락으로 옮기던 말들의 전쟁들이 실제 상황에서는 치열하고 냉철하였으며 잔혹하게 다가왔다. 장기의 승리는 언제나 허무하듯이 전쟁의 승리는 또한 얼마나 허무할까? 승리를 하였더 하더라도 그 밟고 지나온 자리에는 많은 사랑하는 동물과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군주의 자존심과 지위를 지키기 위한 많은 생명들의 몸부림은 가히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천천히 발을 성안쪽으로 옮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31개의 손바닥 도장이 보인다. 사실 이 손도장은 사띠를 거행한 왕가 여인들의 증표라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 참고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참고 하자
....(중략) 사띠란 힌두교식 장례의 일종입니다. 남편이 죽고 나서 화장을 거행 할 때, 살아있는 부인이 장작 더미 속에 들어가 죽는 분사라는 의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네. 일종의 순장인 셈입니다만, 좀 더 끔찍한 버전이죠.
원래 사띠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쉬바신은 사띠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이 쉬바신이라는 분이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노상 마약에 취해있는 금욕자의 모습에 가까웠죠. 이런 날백수가 신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장인은 어느 날 희생제(당시 인도에서 가장 큰 형식의 제의)를 치르며 사위인 쉬바를 초정하지 않습니다.
희생제에 초청되지 않았다는 말은 한마디로 사람취급 안 한다는 의미. 이에 분개한 사띠는 친정아버지의 이런 행위에 항의하며 불 속에 뛰어들어 분사합니다. ... (중략)
... 이 신화는 후세에 접어들며 다양한 판본으로 각색이 됩니다. 뭐, 힌두교의 남성 이데올로기에 따라 남편을 위한 분사는 정숙한 여성의 표본이 되죠. 게다가 인도의 대 서사시 라마야나에 의해 진정 정숙한 여인은 불속에 뛰어들어도 불의 신 아그니가 태우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의 중세 마녀 사냥 당시 여성을 강에 던져서 떠오르면 마녀, 빠져죽으면 사람이라는 식으로 사람을 죽여대던 것과 똑같은 거죠.
영국인들의 기록이니 과장이 있을 수 있겠으나, 영국인들이 사띠를 법으로 금지하기 전인 18세기 말까지 정확히는 1815~1828년까지 약 13년 간의 통계에 의하면 전 인도에서 무려 7,941건의 사띠가 보고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지금도 일부에서 여전히 사띠가 자행되고 있다는 거죠. 종교 교리가 참 무서운 것이, 지금도 많은 인도인들은 여성이 사띠를 거행해 죽으면 바로 여신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신이 죽은 시대에 등장한 신은 당연히 환영을 받겠죠. 사원이 건립되고 수많은 헌금이 들어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두 눈 뜨고 살아있는 그녀의 친정, 시집 식구들은 말 그대로 돈벼락을 맞는 거죠. 즉, 사띠는 여성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이권을 노린 주변 사람들에게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라는데 가장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전명운,김영남,주종원, [프렌즈 인도.네팔], 중앙Books(2014), p502.
사띠가 여성의 인권 무시과 무고한 여성들이 죽어가기 딱 좋은(?) 변명거리가된다. 메헤랑가르성에 있는 저 손바닥들은 한 왕조의마하라자가 거느린 부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31개의 사띠는 31명의 부인을 의미하는거였다.
메헤랑가르성을 구석구석 보는 것은 즐거운 성 내부의 탐험과도 같았다. 매 장소마다 오디오 가이드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가 있었을 뿐더러 성내부에서도경이롭게 높이 쏟아 내 목이 아플정도 였으며 인도풍인지 모를 반복되는 양식들이 내눈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성은대부분은 박물관으로 변하여 마하라자와 마하라니(왕비)들이살던 곳이다. 이 곳에서 일용품과 무기, 그리고 가마등을 전시해 놓았는데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다.
다만, 겉으로 보인 메헤랑가르성은 투박하기 그지 없었다. 처음에 웅장한 규모외에는 디테일 하지 못해 보인 외벽때문에 뭐 볼께 많이 있을 까라는 생각이었지만, 안에는 그렇지 않았다. 가장 외벽은 투박한 돌로 감았지만 안에는 이렇게 발코니를 정사각형으로 내부를 바라 보게 만들어 정원도 만들고 그들의 테라스, 그들의 연회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냈다. 누가 이런 장소와 방에 지냈는지는 지금 내가 알 수 있지는 못하지만 그들에게도 사회생활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 했고, 중간중간에 만남의 장소를 만들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서는 또 다른 만남의 장소를 가졌다.
메헤랑가르성의 이야기를 따라 올라가다 어느덧, 메헤랑 가르성에서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제한된 시각에서 조드뿌르의블루시티를 간혹 볼 수 있었는데 방향에 따라서 달리보이는 내 눈앞에 깔린 배경들은 각기 다른 느낌을 전달하였다.사실 조드뿌르의 가장 큰 볼거리는 탁트인 공간에서 하늘과 땅이 파란색으로 물들인 모습이다. 인도의 신은 파란색의 물감을 들어 위에도 칠해보고 남은 물감으로 아래도 칠한 것 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는 없어 보였다. 조드푸르 시내가 블루시티임 질리도록 확인 한 후에야 메헤랑 가르성에서 내려 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