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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략가K May 24. 2020

#17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의 포인트

7일차 우다이뿌르

VIII. 7일차 우다이뿌르

   25. 선셋과 선라이징의 차이


  낙타사파리에서 피곤을 누적시키고 온 탓이었는지 12시간이 걸리는 버스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풀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버스안에서 나를 깨운건 도착했다라는 새로운 도시에 대한 여행에 기대감이 아니라 도로중간에 있는 방지턱들이었다. 새벽을 달리는 버스는 그 방지턱을 패기 있게 넘어서고 버스에 전달되는 파동은 내가 누워 있는 버스의 슬리핑 석에도 전달이 되어 나의 신체는 수평으로 몸 전체가 바닥과의 공중부양을 시도하고 금새 자유낙하를 경험하게 했다. 이것이 자주 반복되었다. 잘자고 있던 잠을 깨웠지만 그 찰라에 나는 방지턱때문에 이라는 것을 느끼고 다시 금방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자이살메르에서 눈을 감은 나는 우다이뿌르에서 눈을 떴다. 


  우다이뿌르에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나는 마치 군대의 이등병처럼 나의 침낭을 접었다. 신속했다. 오랜 여행중에 많이 익숙해진듯 했다. 도착한 우다이뿌르는 5시었으니 해가 뜨려면 조금이 시간이 있었다. 오늘 하루에 우다이뿌르의 관광을 끝내야 된다는 생각에 조금 서둘렀다. 철인이, 정욱이형 그리고 같이 자이살메르에서 버스를 타고온 태욱이라는 친구와 함께 선셋 포인트로 걸었다. 아직 뜨지 않은 해를 보기 위해 지도 위의 선셋 포인트를 내 마음속으로 선 라이징 포인트로 바꿨다. 골목골목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골목이 너무 어두웠으나,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었고, 또한 동행하는 외국인 3명까지 있었다. 어두운 골목을 거치면서 가고 있는 내 마음속의 우다이뿌르골목은 밝다. 같이 걸어갔고 해도 뜨지 않아 방향을 정확히 어려웠으나 갈림길에서 정욱이형과 철인이는 쿨하게 다른 경로를 찾기 위해 찢어졌다. 한시에 아쉬움도 없이 쿨하게 인사하고 각 여행자의 길을 떠났다. 그렇게 해서 처음보는 태욱이라는 친구와 우리의 여행을 갔다. 여행을 같이 하는 친구와 대화하는 것은 편안하다. 잘 보일려고 노력하지 않고 내가 가는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를 둘러싼 환경으로 나를 소개하는 것이 아닌,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내 스스로에 집중하여 나를 이해하면서 소개 할 수 있었다. 여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는 서로 비슷한 방법으로 여행을 진행하는 영혼을 가졌다고 말 할 수 있어, 내 이야기와 그의 이야기를 듣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학생인 그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다가 인도의 한 도시에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과거의 만남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 한것을 공유하고 있다.


  아침부터 등산을 하듯 선셋 포인트에 올랐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우다이뿌르는 본인의 매력을 어두운 커튼으로 감쳐 놓고 있었다. 

 어두운 커튼을 거두기 위해 수리야(대양의 신)이 나타나 선셋포인트 언덕에 태욱이와 둘밖에 없었지만 생생한 라이브로 우다이뿌르 도시의 영화를 감상하게 도와주었다. 우다이뿌르의 상징이자 도시의 역사를 함께 담아온 피촐라 호수, 1754년 타지마할을 라이벌로 정하고 타지마할의 장식 기법을 연구했다던 호텔 레이크 팰리스, 저 멀리는 시티팰리스의 전경 어둠의 커튼을 거두면서 우다이뿌르의 주인공처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호수물이 기화되어 도시에 특수효과까지 뽐내었다.

  우다이뿌르의 선셋 포인트를 선 라이즈 포인트로 바꿔 12시간 후에 우다이뿌르에 없을 나를 달래었다.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에서 나만의 포인트를 만들었다. 이름이 정해 놓은 프레임따라 흘러갈 필요는 없는거 같다. 조금 여행에 대한 프레임을 부수면서 나를 이 이국땅에 더 던질 필요가 있었다.


26. 우다이뿌르의 일상

  우다이뿌르에서 보내는 딱 하루를 인도인의 일상 처럼 보냈다. 물론 기차표 예매를 해야 되지만 기차표를 예매하러 가는 태욱이와 소소하게 많은 것들을 했다. 태욱이는 나보다 인도의 여행기간이 길었을 뿐 아니라, 인도 현지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방관자의 입장이 아닌 현지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환경을 경험하고 나중에야 제 3자 입장에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 순간 가능한 많은 경험을 하기로 하였다. 시도해보지 못했던 길거리 음식을 먹게 되고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행동이 앞서기 시작했다. 10루피? 200원으로 아침 한끼를 때울 수 있다니 장기간 돈 걱정없이 한끼를 때울 수 있는 식사거리였다. 인도 여행의 프레임을 깨버릴 수 있는 것이 길거리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르지만 여행에 대한 자세를 소극적으로 만든 원인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인도에서 설사병 걸리면 어때? 그것 또한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은 오히려 허기졌던 내 배를 든든하게 채워준 인도 음식이다. 탓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지금 이 때의 이 음식의 가치와 인도인 처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를 느낀다. 그 이후 그런 생각으로 인도인 처럼 짜이도 한잔했다. 서서히 인도인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 마음속의 껍데기를 조금씩 벗어 던지고 인도라는 나라와 사상에 더욱 나를 던지기로 했다. 

  인도 기차역에서는 자이푸르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계속해서 밤기차를 이동하여 시간을 아끼기 위해 노렸했고, 태욱이는 뭄바이를 위해 가는 기차표를 예약 했다. 하지만 뭄바이로 가는 기차표는 없었고 태욱이도 오늘 밤에 바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딱깔 티켓으로 구매해야 했다. 딱깔은 구매 절차 및 방법이 복잡하여 여권 사본을 만들러 나갔다. 그 사이 기차 예매소 벤치에 앉아 쉬었다. 예매소 전등 시스템이 좋지 않아 조금 어두웠지만 태양이 들지 않은 만큼 덥지 않았다.  사람들도 가득찼고 자신의 차표를 사기 위해 기다란 줄을 만들었지만 예매소 안은 적적했다. 평소에 다른 환경과 접하게 될 때 보통 비교를 하게 된다. 한국은 이렇게 이렇게 이런점이 좋은데 매번 이사람들은 기차표를 사기위해서는 매일 이렇게 아침부터 일찍이 와서 기다려야 하는구나, 물론 한국도 주요 명절을 앞두고 대거 모이기는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예매소 앞에 아침부터 줄을서고 기차표를 예매하는 것은 일상인 듯 보였다. 우리의 시스템은 이런 불편함을 사항에서 발전하는데 인도의 규모 한국도 엄청나게 많은 역이 있고 자동화되는 시스템을 갖기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보다 몇 십배 큰 인도는 더 많은 역과 거점이 있을 것이며 이 모든 시스템을 발전시키기 위해는 많은 자본과 꾸준한 투자가 필요해 보였다. 물론 예약 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과 모바일 환경도 있지만 그 역시 모든 인도인에겐 공평히 주어지는 환경은 아닌 듯 해보였다.  누구하나 나서서 하기 개선해 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포기하고 현실에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인도인 8억이상의 인구가 모두 하는 것일 까? 

  잠시 괜한 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두 한국인 여대생들의 대화에 나의 물음에 답을 대신해 적막함을 채웠다.


        “베지버거 먹으러 가자!”


  베지버거가 뭔지 궁금했던 나는 나의 질문에 대답을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예매소에는 한국 두 여대생과 베지버거를 알게 되었다. 베지버거를 알게 된거에 대해서 더 큰 호기심을 느껴 예의 없이 두 사람의 대화의 갑작스럽게 껴들었다.

  

          “베지버거가 뭐예요?”

        “야채로 만든 햄버거 인데, 맛있어요”

        “어디서 파는지 아세요?”


  나는 얼른 내가 들고 다니는 여행책을 펴서 베지버거를 판다는 가게의 위치를 받아적었다. 책에는 없었다. 책에 없는 현지의 맛집을 알게 된거 같아 그 기쁨은 두배가 되었다. 델리부터 자이살메르 정훈이형과 철인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나의 지식과 책에 나온 추천지만 다녔지, 그 외의 정보에 대해서는 알고 행하지 못했다. 굉장히 갇혀 있는 사고방식이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정보내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마치 게임에서 가지 못하도록 막아 둔 곳을 깨어 나와 활동하는 캐릭터가 된 기분이었다.


 사실 모든 정보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스스럼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과 그리고 인도를 여행중인 한국인들과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언제든지 모르는걸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모른다고 행동하지 아니하여 지나치는 부끄러움을 남기지 말아야지. 이제 내가 기차 외에 다른데서 자는 일이 몇일이나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게스트 하우스에서 잠을 자고 같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인연을 맺는 여행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해야지.


 태욱이가 돌아왔다 용케도 어디서 여권 복사본을 구해와서 따깔 티켓을 샀다. 그리고 우리의 짧지만 우다이뿌르에서는 전부인 여행을 시작한다. 잠시 태욱이가 예매소 밖을 나간 사이에 내가 세워 놓은 여행 스케쥴을 따라 주기로 하였다. 여기서 거리가 상대적으로 먼 바르띠아 록 깔라 박물관을 갔다가 쉴프그람을 가고 다시 베지버거를 먹으며 점심을 때우는게 오늘의 오전 계획! 


  언제나 그렇듯 난 여기에 온적이 없지만 예매소를 나가 이동을 하려니 난 이 바닥의 스타였다. 많은 오토릭샤 기사들이 나에게로 모여 들며 자신의 오토릭샤를 타주기를 간절이 원한다. 이런 인기를 만끽하며 우리의 여행경로를 위한 코스에 대한 가격을 흥정한다. 한번에 흥정하여 여러군데를 다닐 수 있으니, 코스를 모두 말해주고 가격을 협상해 나갔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300루피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때, 그럴 때도 나를 태우겠다며 진실된 사람의 오토릭샤를 탔다. 


  바르띠야 록 깔라 박물관에서는 전통 의상을 봤고, 인형극을 보여주었다. 내가 이걸 본다는 것의 큰 의미를 두진 못했다. 그냥 여행지를 하나 깬다는 생각으로 나의 의미없는 목적을 채운것 뿐이다. 

 

  그 이후 우다이뿌르라는 곳의 민속촌이라는 쉴프그람에 갔다. 요즘에 한국의 용인 민속촌은 실제 조선시대 사람처럼 연기하는 알바생들 때문에 항상 매번 갈때마다 같은 컨텐츠 처럼 보였던 민속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재밌는 볼거리들을 많이 만들어 지금은 외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쉴프그람도 이미 이런 방식으로 각 지방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각 지방의 의상과 장신구로 치장하고,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앞으로 가면 신나게 노래와 진심을 담은 춤을 보여주었다.

  

  여기 뿐만 아니었다. 다른 동네로 놀러가 보니 이번에는 악단과 열창하는 악사를 볼 수 있었다. 책에는 라자스탄, 구자라트, 마하라슈트라, 고아 등 인도 서부 4개 주의 가옥 및 생활 풍습등의 각종 민속 문화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고 하지만 어느 지역인지 모르고, 어느 지역 풍습인지도 모르지만 열창하는 그에게 빠져 들 수 있었다. 

  각 지역의 대표가 모인 듯 각 동네에는 이런 예술가 들이 있었다. 각 지역성의 대표를 떠나 모두들 그냥 이렇게 모여서 노래부르고 춤추고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가족 전체가 어울어져 신나게 놀고 있었다. 전혀 다른 의상으로 다른 종류의 춤과 연주를 볼 수 있었다. 예전 TV 프로그램중에 정말 마을의 인원이 되어 그 오지 문화를 체험하고 실제로 살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나라 내에서는 전혀 할 수 없는 원색적인 문화와 원주민과 가까운 문화 신비감에 사로 잡혀 넋을 놓고 봤을 때가 있었다. 이 쉴프그람은 그랬다. 짧게 돌아도는 그 사이에 여기 있는 인도인들과 문화로 이야기 하고 그들을 관찰 할 수 있었다. 각 지역의 다양한 모습의 가옥도 있었지만 이는 하나의 볼거리에 불과했을 뿐 오히려 춤을 차는 사내아이와 함께 문화를 즐기는 가족, 그리고 자신의 영혼으로 노래를 부르는 쉴프그람의 가수까지! 이들과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문화적 교류를 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27. 지도에 베지버거 추가!

 쉴프그람을 한바뀌 돌고나니 이제는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는 다시 시내로 돌아갔다. 시내에서 쉴프그람까지의 거리는 조금 걸렸다. 우리는 시내까지 오는 오토릭샤 기사도 높은 값을 요구 하고 싶었는지 내릴 때쯤에 약속했던 300루피보다 50루피를 더 물러 350루피를 줘야 된다고 주장하였지만 난 과감히 300루피만 주고 Daiji Bridge 근처에 내렸다.  


 낮이 된 우다이뿌르에서 피촐라 호수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뽑내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선셋포인트에서내려다 본 광경과 많이 다른 경치를 나타냈다. 오전에는 라이브한 지도를 바라봤다면 그 지도속에서 탐험을 하는거 처럼 보였따.


 그렇다면 이제 베지버거를 먹으러 갈까? 사실 오늘 아침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먹어보기위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열정적이었지? 난 오늘 오전에 여대생들에게 가르침을 배운대로 근처 근방에 베지버거를 찾았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딱 여기 ‘베지버거 팝니다’라고 간판에 써놓지 않았다. Daiji Bridge 근처에 인도인에게 무턱대고 다가가 앞뒤를 다 짜른뒤 ‘베지버거’를 외쳤다. 온몸으로 외쳤다. 첫번째 인도인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난 뒤따라오는 인도인에게 또다시 ‘베지버거’를 외쳤다. 그래도 이번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세번째 인도인은 양손을 받쳐 들며 내가 봐야 하는 방향을 바라 가르쳐 줬다. 여기라며 알려 주었다. 


  “MEERA FAMILY” MEERA라는 이름을 갖은 가족들 전체가 운영하는거 처럼 보였다. 15살 되어 보이는 중학교는 갈 나이처럼 보이는 여자아이가 주방을 맡고 있었고, 그 보다 어린 8살 되어 보이는 동생이 서빙을 맡고 있었다. 한국에서 처럼 오렌지 바구니를 쌓아올려 즉석에서 주스도 갈아주고 했다. 당연히 베지버거를 시켰다. 50루피?? 천원?? 오렌지 주스와 함께 2천원도 안되는 가격이었다.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패티 양배추와 토마토까지 다만 버거의 패티가 베지테리안을 위해 야채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몰랐지만 맛은 맥도날드 햄버거의 5배정도 맛있는거 같다. 가성비까지 따져 곱하면 25배다. 태욱이와 하나씩 맛있게 먹었다. 더 먹지 않았다. 하나 더 먹으면 이 맛의 희소성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떠나 이 피촐라 호수와 우다이뿌르를 배경으로 이 빵의 바삭함을 파고들어 느껴지는 베지버거의 맛은 나의 혀에게만 인도의 극락을 허락하였다. 

 베지버거를 일부러 찾아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의미를 느꼈다. 작은 사건이었지만 큰 여행의 전환점이다. 조금 더 열정적으로 여행을 시작을 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인도여행 반이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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