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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략가K Feb 26. 2017

#3. 인도 델리 꾸뜹 미나르

인도 델리 꾸뜹 미나르에서 또 하나의 여행객 사기꾼

4.   꾸뜹 미나르에서 또 하나의 여행객 사기꾼

    아침 7시 조금 일찍 일어났다. 적은 시간에 많은 여행지를 돌고 싶었던지, 지친 전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의 여행을 일찍 준비하였다. 게스트 하우스를 나오면서 카운터보이는 왜 나더러 무거운 배낭과 침낭을 맡기지 않냐고 물어봤다. 더 이상 인도인을 믿고 싶지도 않았는지, 나만의 오기 또는 객기를 부렸다. 배낭과 침낭 그리고 카메라 가방까지 모든 걸 들고 다니면서 여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모든 배낭과 가방을 메고 여행시작

  꾸뜹 미나르로 출발하였다. 내가 굳이 이틀째 델리에서의 첫 여행지로 꼽은 이유는 델리 시내 중심에서 제일 멀었기 때문이다. 유적지가 열지 않은 아침 시간에 지하철로 이동하고, 지도상에서 가장 먼 곳부터 여행을 해서 근처로 돌아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델리에서의 오토릭샤의 가격도 어느 정도 값이 비쌌지만, 지하철 비용은 터무니없이 쌌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 었지만 지하철 비용으로 지불한 비용은 100루피(2,000원)이었고 지하철로 이동을 한다는 것은 비용상으로는 나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지하철을 탈 때는 항상 가방 검색대에 가방을 통과하고 몸수색대를 통과해야 지하철을 타야 했다. 내가 메고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벗어내야 했다. 카메라 가방을 벗고, 카메라를 벗고, 배낭을 벗고 모두 검색대에 통과시킨 후, 다시 배낭을 메고, 카메라 가방을 메고, 카메라를 메는 작업을 반복했다. 한번이 아니었다. 환승을 할 때도 검색대에 통과해야 했는데, 그 때도 역시 카메라 가방을 벗고, 카메라를 벗고, 배낭을 벗고 모두 검색대에 통과 시킨 후, 다시 배낭을 메고, 카메라 가방을 메고, 카메라를 메는 일을 또 해야만 했다. 이런 작업을 이렇게 많이 반복하게 될 줄을 몰랐다. 하.... 인도 여행이 쉽게 풀리지 않는구나.


  가는 과정과는 다르게  꾸뜹 미나르는 쿨한 곳이었다. 특히 개방시간이 일출하면 개방하고 일몰 하면 문을 닫는 그런 곳이었다. 조금 일찍 가더라도 한가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뜨지 않은 태양이 공기 속의 수분을 말라내기 전이었다. 조금 흐릿할 때 도착하여 점점 진해지는 꾸뜹 미나르를 볼 수 있었다.


  인도에서 가장 높은 탑 앞에 나는 조그맣게 서 있었다.델리  건설당시에는 4층에 불과 했던 탑이 130년 뒤에 한층 더 증축했고 또한 지붕에 둥근 돔이 씌워져 있었다고 하지만, 500년뒤에는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식민지 시절 영국군 장교가 무굴 양식의 돔을 새롭게 올렸지만, 탑의 모양과 어울리지 않아 철거됐다. 35년전에는 내부의 계단을 통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좁은 통로에 사람들이 압사사고까지 그래서 내부 계단은 폐쇄 중이다. 예전엔 할 수 있었던 꾸뜹 미나르의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지금 내앞에서는 높은 탑을 저 아래에서 높이 쳐 올려 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참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이 남는 유적지이다.

구뜹 미나르의 전경

꾸뜹 미나르 유적군 주변은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아 한가로이 사진을 찍으면서 여기저기 볼 수 있었다. 지붕이 없는 유적지는 이탈리아 포로 로마노와 그리스의 아테네의 신전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예전과 크게 다른  그냥 둘러 보기만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곳에서 나름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횡한 유적지의 흔적들을 느끼고 있었다. 석기 유적지에 그려진 디테일한 아라비아 글자는 코란 구절들이 그나마 횡한 유적을 채워주고 있었다.


 쇠기둥인데 특별해 보이지 않는 쇠기둥에 특별히 보이게끔 울타리를 만들어 두었다. 쇠기둥이 제작된 시기는 약 4세기로 추정되는데, 철의 함량이 무려 99.99%까지 된다, 이런 4세기경에서 이런 순도를 갖을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꾸뜨 미나르가 생기긴 500년 전부터 여기 이곳에 서 있었다니.. 지붕이 없는 곳에서도 지금까지 비와 바람에 홀로히 여기를 버티고 있는 쇠기둥이 외롭지만 의연하게 보였다. 근대에 들어와 녹슬지 않은 쇠기둥을 많은 사람들이 양손으로 안아 깍지를 끼우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예전에는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지금은 이런 알타리를 쳐놓았고 난 아쉽게 그냥 여기서 사진 한 장 찰칵!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꾸뜹 미나르에서 오파츠라 불리우는 쇠기둥 앞에서

“저 Brunch가 발간되게 해주세요!”


 그렇게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에 도달한다. 인도의 최초 이슬람 사원, 그리고 수많은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여 그 지어진 모스크! 그만큼 정교하지 않고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슬람의 힘이라고 투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

  이제 바하이 사원으로 가볼까? 꾸뜹 미나르를 나오는데 또 한 명의 사기꾼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이제부터 그 사기꾼이 어떻게 관광객을 통해 이득을 얻는지 소개해 주겠다. 나는 꾸뜹 미나르에서 바하이 사원으로 가는 오토릭샤를 타기 위해 오토릭샤가 모여 있는 오토릭샤 꾼을 찾았다.  다가오는 오토릭샤 꾼과 사기꾼들이 너무 많은 거 같아 차라리 이 분들과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 어차피 나한테 사기치거나 나를 어떻게든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상대방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방법이라도 사용할 것이고, 나는 내 몸 하나 못 지키겠냐는 생각에 이들을 받아주기로 했다. “아허허.. 이것 또한 인도를 여행하는 방법중에 하나가 아닌가?” 이런 생각에 이 사기꾼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보는데 중점을 두었다. 꾸뜹 미나르에서 만난 그 사기꾼은 오토릭샤도 운행하였고 봉고차를 운행하였다. 난 사실 봉고차에 탑승하는 것이 날 어디론가 데려가 나의 신체의 일부를 훼손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어 오토릭샤를 타기로 합의하였다. 오토릭샤를 타고 가다가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면 달리는 중간에라도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그렇다 난 점점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어쨌든 중요한 포인트는 그 사기꾼이 바하이 사원으로 가겠다는 나와 가격 흥정을 하면서 다른 마켓에 한 군데만 더 가주길 원했다. 100 루피면 바하이 사원에 가지만 조건이었다. 나는 중간에 마켓(?)이라는 곳에 들리기 싫어서 120루피를 줄 테니 바하이 사원에 가달라고 말하였지만 그 역시 통하지 않았다. ‘좋아 어디 한번 가보자’ 얼마든지 상대해주겠다는 마음으로 그의 오토릭샤에 올라탔다.

 이렇게 가다 보면 불안한 감이 엄습하기 때문에 태양을 나침반 삶아 내가 가는 곳을 추적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지금이 9시 30분을 조금 넘기니 태양은 동남쪽을 가리킬 테고 오토릭샤는 북동쪽을 가고 있겠네? 10분을 내가 모르는 길로 가더니, 아래 사진에 있는 가게 앞에 내려다 주었다.

  기념품을 판매하고 인도의 토속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날 데려온 오토릭샤꾼이 안 사도 되니 10분만 보다 나오라는 것이었다. 들어가자마자 7명의 점원이 있었다. 그건 내게 사고가 발생했을 시, 7명의 사기꾼을 물리쳐야 된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솔직히 겁도 낫던지, 깊숙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나는 대충 물건을 둘러보는척하면서 관심이 있는 척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았고, 정확히 10분을 재고 있다가 나왔다. 그런 다음 나를 바하이 사원에 데려가야 한다. 이 오토릭샤 꾼은 그러기는 싫었는지, 중간에 다른 오토릭샤꾼을 부르고 100루피에 날 바하이 사원까지 데려다주는 걸로 합의를 보고 나를 다른 오토릭샤에 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오토릭샤 관광 사기꾼은 나를 그 상점에 데려다주는 것을 목적만 있었지, 나를 바하이 사원에 데려다 줄 계획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런 금전적 피해도 없이 잘도 바하이사원에 도착했지만 내가 그 친구에게 붙들려 있으면서 보낸 시간은 조금 아까웠다. 나는 더 이상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오토릭샤를 타는 데는 몇 가지 규칙을 세우기로 하였다.

  ①    먼저 다가오는 오토릭샤는 가급적 타지 않는다.

  ②    오토릭샤는 길가다가 잡는 것이 가장 안전하며 별 탈이 없다.

  ③    다른 장소에 들렸다가 가자고 하면 절대로 가지 않는다.

 아침부터 또 우여곡절을 겪고 인도에서의 사기는 일상이 되었다.


  겨우 바하이 사원에 도착했다. 바하이 사원은 조금 특이한 사상을 가진 사원이었다. 책에는 아래와 같이 바이아 사원을 소개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2만여 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슬람교의 한 분파로 시작된 신흥 종교의 일정으로 전 인류의 형제화, 종교의 통일, 지구 연방의 건설과 같은 꽤 흥미 있는 주장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교리적으로도 부처, 예수, 공자 등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리기 위한 헌신한 존재로, 모두 동등한 선지자의 하나라고 본다. 물론 가장 마지막 헌신은 바하리 종교의 창시자인 바하 울라Baha Ullag(1817~92)지만 말이다.
  9라는 숫자를 신성시하는 교리 탓에 바하이교의 사원은 모두 구각형의 형태를 띤다. 아무래도 구각형에 주목하다보니 전 세계 바하이 사원은 모두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특히 델리의 바하이교 사원은 피어나는 연꽃 모양으로 인해 로터스 사원이라는 아명으로 더 유명하다.
  바하이 사원은 모든 종교의 가치를 긍정하기 때문에 사원 안에서의 기도라는 것도 자기가 믿는 신에게 알아서 묵상하면 그만이다. 때문에 바하이 사원내에서는 침묵이라는 단 한가지의 규칙만 준수하면 된다. 사원 앞 도서관에서는 한국어를 비롯해 각국어로 번역한 바하이 신앙에 대한 팸플릿을 얻을 수 있다.

전명윤,김영남,주종원,[프렌즈 인도.네팔 '14~'15 개정판], 중앙books(2014), 147~148

 

 멀리서 바라본 바하이 사원은 정말 호기심에 의해서도 반드시 들어가고 싶었다.

멀리서 바라본 바이아 사원.. 정말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ㅠㅠ

 많은 사람들이 사원을 들어가기 위해 많은 줄을 서고 있었다. 나도 그 뒤를 이어서 바하이 사원의 사상과 종교관을 이해할 거라는 기대감으로 줄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하이 사원 문안에는 검색대가 있었다. 총기사고나 화학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있는 거 같지만 배낭 전체를 들고 갔던 나에겐 배낭을 모두 들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오전부터 인도인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들고 온 배낭이 나의 여행지 하나를 망쳤다. 난 아쉬움을 가득 채우고, 지하철로 돌아왔다. 아~! 내가 이 배낭을 버리던지 해야지 또 지하철을 타기 위해 검색대에 배낭을 넣어야 했다. 또다시 카메라를 벗고, 카메라 가방을 벗고, 배낭을 벗고…


참고문헌 : 전명윤,김영남,주종원,[프렌즈 인도.네팔'14~'15 개정판],중앙books(2014), 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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