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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 황곰 Jun 18. 2017

흔히 생각하는 우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

칼 세이건의 'Cosmos'

서두

 칼 세이건의 Cosmos. 우주에 관한 책이지만, 천문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읽고 나서 명저라고 칭찬일색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읽어보았다. 난 읽는 내내 속으로 '맞아! 정말 맞는 말이야'라는 말을 외쳤다.

저자와 함께 우주를 여행하고 오면, 우리의 사고의 틀을 깨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화두를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다.


인간의 무지함

 뉴턴은 고전역학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프린키피아』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이제 세계의 기본 얼개를 선보이겠다.". 분명 뉴턴은 당시에 엄청난 과학자였고 아인슈타인 이전의 최고의 과학자라고 일컬을 만하다. 하지만, 그러한 뉴턴조차 죽기 바로 전에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라고 했다.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었는지, 그리고 자기가 발견한 것이 거대한 진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지 무지하다고 인정하고 끝날 것인가? 이것에 대해 토마스 헉슬리가 표현한 말이 있다. "앎은 한정되어 있지만 무지에는 끝이 없다. 지성에 관한 한 우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끝없는 무지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섬을 조금씩이라도 넓혀 나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깊은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이 더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

 이처럼 인간이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교육을 받아야 하며,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에 관해 아인슈타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내가 더 멀리 보아왔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오". 이 코스모스라는 책은 칼 세이건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 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있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책이 아니었을까. 그 거인의 어깨 위에 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독서라고 생각한다.


과학과 권위

 기독교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진실을 외면하고 천동설이 믿어져 왔던 때가 있다. 지동설이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기독교의 강한 권위 앞에 위축이 되어 지동설을 주장하지 못하는 과학자들도 있었으리라. 이렇게 권위로 인한 진실의 왜곡 때문에 우리의 과학발전이 계속 더디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을 하려면 다음 두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는 없다. 과학에서 권위에 근거한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둘째,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 지금이라도 과학자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억압하는 것은 일은 종교나 정치에서는 흔히 있을지도 모르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언제 이런 우를 우리는 또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므로 권위 있는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이론이라고 해도, 논리적 흐름에 따라 설명을 한다면 철저히 검증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본문에 나온 다음 말이 크게 와 닿는다. "토론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논지의 완벽함이지, 그 논지가 지니는 권위의 무게가 아니다." 권위가 있는 주장은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과학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적용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야만 앞으로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

 앞서 언급한 천동설이 인간 중심적 사고를 극명하게 나타낸다. 그러나 지동설의 발견은 우리에게 지구의 유일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고, 이것은 지구 이외에도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우리는 우주를 탐험함으로써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지를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서 우리가 유일한 생명체라고 여기는 것은 지구에 모종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이며,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이처럼 지구와 지구인이 코스모스라는 대자연 앞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우리 지구에서 노예제도, 계급제도, 인종차별의 철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광활한 우주 앞에서는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 문명, 역사는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구 내의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는 결코 바람직한 행태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린 정말 작디작은 존재일 뿐이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

  혹자는 '우주탐사를 왜 하는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천문학적 비용이 쓰이는데, 그 돈으로 당장 눈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탐사를 통해 만약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해낸다면, 이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 지구는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지구 내에서 서로 이렇게 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지구 내에 있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더 이상의 분쟁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더 이상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울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좁디좁은 지구적 관점에서 벗어나 우주적 관점을 획득해야 할 시점일 것이다.

 우리의 위상을 우주적 관점에서 보게 될 때, 현재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적 관점에서는 우리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큰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리말

p.29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 둬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과학이라는 이름의 대담한 기획에서는 이미 제시된 지혜에 대한 재평가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과학 하기의 위력이며 과학 하기의 요체인 것이다.

 저자도 언급한 것처럼 과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재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p.36

앎은 한정되어 있지만 무지에는 끝이 없다. 지성에 관한 한 우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끝없는 무지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섬을 조금씩이라도 넓혀 나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 토마스 헉슬리, 1887년

 인간의 무지함에 대한 표현을 굉장히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이 인간의 현 위치가 아닐까 싶다.


p.59

그(아리스타르코스)가 내린 결론은 모두 다 옳았지만 이 사실을 재발견하기까지 인류는 거의 2,000여 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업적이 소실됐기에 느끼게 되는 우리의 애석함에 10만 배를 곱하면, 고전 문명이 이룩했던 업적의 숭고함과, 그의 파괴가 얼마나 큰 비극을 인류에게 안겨 줬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가 된 것에 대한 애석함을 표현하고 있다. 기원전 200년경 당시 이미 지동설이 아리스타르코스에 의해 설명이 되었지만, 그 문서가 소실되어 20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나타나게 된다. 이 2000년이라는 시간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시간일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지식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다.


p.60

대폭발의 혼돈으로부터 이제 막 우리가 깨닫기 시작한 조화의 코스모스로 이어지기까지 우주가 밟아 온 진화의 과정은 물질과 에너지의 멋진 상호 변환이었다. 이 지극히 숭고한 전환의 과정을 엿볼 수 있음은 인류사에서 현대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p.139

"자연의 진리가, 나의 거부로 쫓겨났었지만, 인정을 받고자 겉모습을 바꾸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들어왔으니… 아, 나야말로 참으로 멍청이였구나!" - 케플러

 케플러가 우주는 수학적으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행성의 궤도가 원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계속해서 연구를 했다. 하지만 관찰 값과 계속해서 맞지 않자 결국 자연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자연 그대로 그 자체를 진리로 여기게 된 것이다.
 만약, 케플러가 계속해서 자신의 고집에만 빠져 관찰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고전 과학의 상당 부분의 발견이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과학에서 열린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다.


p.149

튀고 브라헤에서 케플러에 이르는 한 세대 사이에 과학자들의 대중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고 하겠다.

 튀고 브라헤는 대중에게 과학을 알리고자 하지 않았지만, 케플러는 《꿈》이라는 과학 소설을 써서 대중에게 과학을 알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최초의 시도가 있었기에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 대중이 수많은 과학적 사실들을 비교적 쉽게 느끼고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p.152

오늘날 케플러의 묘비가 다시 세워진다면 그의 과학적 용기를 기리는 뜻에서 이런 문장을 새겨 넣으면 어떨까. "그는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가 마음에 드는 환상은 완벽한 정다면체들처럼 운동하고 있는 행성들이었지만, 현실은 타원궤도를 돌고 있는 행성들이었다.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인 케플러의 태도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p.158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에 앞서, "나는 이제 세계의 기본 얼개를 선보이겠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p. 161

죽기 바로 전 뉴턴은 이렇게 썼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이 두 구절에서 우리 인간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와 인간의 지식이 이 우주의 진리의 자그마한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쓸 때, 세계의 기본 얼개를 선보이겠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뉴턴을 폄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것은 분명 인간의 오만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오만함을 뉴턴도 죽기 전에 깨달았는지, 자신은 조약돌이나 조개껍데기를 찾아다니던 어린아이이고, 진리의 바다가 온전한 미지로 남아 있다고 표현했다.


천국과 지옥

p.195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제시한 것만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제시한 가설들 중에도 훗날 틀렸다고 밝혀지는 것이 많다. 그러나 과학은 자기검증을 생명으로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벨리코프스키 건의 가장 서글픈 면은 그 가설이 틀렸다거나 그가 이미 입증된 사실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자칭 과학자라는 몇몇 이들이 벨리코프스키의 작업을 억압하려 했던 데에 있다. 과학은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로운 탐구가 곧 과학의 목적이다. 어떤 가설이든 그것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 가설이 지니는 장점을 잘 따져 봐 주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억압하는 일은 종교나 정치에서는 흔히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이런 자세의 과학이라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누가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할지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자기 검증을 철저히 해야 한다.

 칼 세이건이 정말 하고자 했던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이 아닐까. 과거에 종교나 정치가 권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들을 억압해왔다. 그러한 실수를 다시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이 있을지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이러한 태도를 스스로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이 권위를 갖고 있는 생각과 다르다고 하여, 그 가설을 꼼꼼히 검토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

p.262

사람이 탄소와 물을 기초 물질로 하는 생물인 것은 생명이 처음 태어날 즈음 지구에 탄소와 물이 가장 흔했기 때문은 아닐까? 지구 이외의 행성에서는, 예를 들어 화성에서는 생명이 물과 탄소가 아닌 다른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맞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학문의 상당 부분들이 우리 인간을 기초로 하고 있다. 만약 다른 생명체가 나타난다면, 우리가 연구한 상당 부분들이 그들에게는 적용이 안되지 않을까?


여행자가 들려준 이야기

p.293

도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지구라는 사실의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지구의 유일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게 했으며, 지구 이외의 장소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훌륭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정말 혁신적인 발견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수 있는 발견이 아니었을까.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럼 지구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교회의 근간이 흔들렸던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노예제도, 계급제도, 나아가 페미니즘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p.295

"우리가 그 행성들을 단지 거대한 사막과 같이 아무런 생물이 살지 않는 그러한 곳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결국 지구라는 행성에게 모종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셈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다."

100번 공감한다. 우주 입장에서 봤을 땐, 지구는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특권을 쥐어주는 것이고, 이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밤하늘의 등뼈

p.328

감추어진, 동떨어진, 미지의 원인으로 인한 현상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은 '신神'이란 단어를 흔히 사용한다. 기존 원인의 자연적 근원인 이치의 샘이 손에 잡히기를 거부할 때, 사람들은 이 신이라는 용어에 자주 기대게 된다. 원인에 이르는 실마리를 놓치자마자, 또는 사고의 흐름을 더 이상 쫓아가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원인을 번번이 신의 탓으로 돌려서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때까지 해오던 원인 탐구의 노력을 중단하고는 한다. …… 그러므로 어떠한 현상의 결과를 신의 탓으로 돌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무지를 신으로 대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이제 '신'은, 인간이 경외심 가득한 마음으로 듣는 데 익숙해져 버린, 하나의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읽다가 웃음이 나왔다. 내가 항상 생각해오던 사실을 이렇게 깔끔한 말로 정리를 해주다니..! 인간은 항상 자신의 무지함에 부딪힐 때, 신이라는 존재에 기댄다. 그래, 모르는데 신에게 기댈 수 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종교의 벽에 막혀 과학 발전이 더디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p.331

반복설의 핵심 내용은 개체 하나의 발생 과정이 해당 종이 겪어 온 진화의 전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개인의 지적 성숙 과정에서도 반복설이 성립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조상들이 해 온 사고의 과정들을 되풀이하면서 하나의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이걸 내가 느끼고 있다. 혼자 생각을 했던 많은 것들을 책에서 발견을 한다.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제기되어 왔던 의문들을 나 스스로 그대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 이전의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하나도 습득하지 않고, 혼자 사고를 통해 그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독서를 하고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p.335

불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보호받고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원시적' 개념이라고 폄하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은 수많은 근대 문명의 뿌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류의 유산이다.

이것 또한 굉장히 의미 있는 말이다. 뉴턴이 고전역학에만 그쳤다고 해서 그를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혁신이었고, 앞서 나가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과거 인류의 발견들 위에 서서 새로운 발견들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p.337

별은 다른 세상의 사냥꾼들이 밤에 피우는 모닥불이겠지. 그렇지만 별은 모닥불보다 작은 빛을 낸다. 그러므로 별은 아주 멀리 떨어진 모닥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늘에 모닥불을 피울 수 있지? 어째서 모닥불과 불꽃 곁에 앉아 있는 사냥꾼들이 우리의 발치로 떨어지지 않지? 어떻게 저 이상한 부족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굉장히 재미있는 생각이다. 표현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고,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도 분명히 있을 법하다.


p.342

오랫동안 자연에 대한 종교의 피상적인 해석이 자연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가로막아 왔다.


p.342

이러한 사고의 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혼돈에서 질서를 읽어 내기 시작했다.


p.365

그들은(피타고라스학파) 상충하는 관점들의 자유로운 대결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점은 모든 정통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경직성 때문에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신들의 오류를 고쳐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교, 정치세력들 뿐만이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와 같이 학자들에게서도 권위를 지키려고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항상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p.366

토론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논지의 완벽함이지 그 논지가 지니는 권위의 무게가 아니다.

계속해서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 『How google works』에서도 나오듯이 Hippo의 말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Google의 그런 문화는 굉장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p.374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코스모스가 설명될 수 있는 실체이고 자연에는 수학적인 근본 얼개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과학을 하려는 동기를 크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할 소지의 사실들이 유포되는 것을 억압하고,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제한하고, 실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주고, 신비주의를 용인하고, 노예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의 위대한 모험심에 큰 좌절감을 안겨 주고, 과학의 발전에도 어쩔 수 없는 퇴보를 불러왔다.


p.376

일종의 지구 중심 우주관에 사로잡힌 우리는 아직도 일상적으로 "해가 뜬다." 하고 "해가 진다." 한다. 아리스타코스 이후로 2,20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의 말투는 여전히 지구가 돌지 않는 듯하다.

인간 중심의 사고를 딱 꼬집어서 말한다. 재미있다.


p.379

아리스타르코스나 하위헌스가 부정확한 자료에 근거하여 부정확한 답을 얻었다는 것은 문제로 삼을 일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상한 방법의 원리를 명확하게 설명했으므로 더 자세한 관측이 이루어진다면 언제든지 누구나 그 방법을 써서 더 정확한 값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80

지구와 지구인이 자연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위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보편성으로 확장됐고 옆으로는 인종 차별의 철폐로까지 이어졌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명확하고 설득력 있어서 달리 반박을 할 수 없다.


p.386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됐다. 한 발짝 한 발짝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질 때마다 강등당하는 인류의 지위를 한탄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가슴과 가슴 깊숙한 곳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초점이며 지렛대의 받침목이기를 바라는 아쉬움이 아직 숨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녕 코스모스와 겨루고자 한다면 먼저 겨룸의 상대인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 여태껏 인류가 멋모르고 부렸던 우주에서의 특권 의식에 먹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코스모스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변을 개선할 수 있는 필수 전제이기 때문이다.


p.386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

p.397

같은 방 안에서 나와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친구를 바라본다면, 나는 사실 그의 '지금' 모습이 아니라 1억 분의 1초, 즉 100분의 1 마이크로초 전의 '과거'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멀리 있는 별이 과거의 모습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말하니까 새롭게 와 닿는다.


p.418

어쩌면 시간은 그 자체로서 수많은 잠재적 차원을 갖지만 우리는 그중에서 단 하나의 차원과 연관된 세상에서만 살아갈 운명인지 모른다.


p.419

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일수록 시간이란 지렛대의 길이가 더 길어지므로 역사에 남기는 여향은 그만큼 더 커지게 마련이다.


p.429

현대 지구인은 2,500년 전 신비주의와 대결해야 했던 이오니아 학자들이 경험한 바와 비슷한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지금 어떻게 하느냐가, 그 영향이 앞으로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 전파되어 결국 우리 후손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주 탐사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과거 바다 지평선 너머로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선조가 도전을 하고 탐험을 했던 덕분에 현재 지구촌이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만 한다.


별들의 삶과 죽음

p.458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애플파이에 들어 있는 탄소 등의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다.


p.465

질량이 태양의 10배 정도인 별은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되는 수소 · 헬륨 변환 과정을 불과 수백만 년 안에 마치고, 재빨리 훨씬 더 격렬한 핵융합 단계로 이행한다. 그 까닭에 주위에 있던 행성에서 생명이 탄생하여 고등 지능을 갖춘 존재로 진화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외계 생물들이 자기네의 별이 초신성이 될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초신성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 수 있었다면 그들의 별이 초신성이 될 리는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영원의 벼랑 끝

p.487

물질에서 출현한 생물이 의식을 지니게 되면서 자신의 기원을 대폭발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식할 수 있다니, 이것이 우주의 대서사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p.496

파괴되는 세상 중에는 생물과 그 파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생물이 살고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괴되는 순간에도 에너지의 분출과 대혼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고민할 것이다. 고통 또한 인식 기능이 감내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

'고통 또한 인식 기능이 감내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알고 있기 때문에 불편한 것들이 많다. 몰랐다면 불편하지 않았을 것들이 앎으로써 불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감내해야 한다라는 것.


p.496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은하와 별과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이다. 우주는 반드시 자비롭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적의를 품지도 않는다. 우주 앞에서 우리의 생명, 인생, 문명, 역사는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한번 상상을 해보자. 끝을 알 수 없는 이 우주에서 이 푸르고 작은 점에 불과한 지구에서 문명, 역사들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것들은 지구에 한해서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너무나도 보잘것이 없다.


p.513

어느 문화권이든지 창조 이전의 세상과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다. 세상이 "신들의 짝짓기에서 만들어졌다." 라거나, "우주의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식의 소박한 우주관을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신화들은 우주가 사람이나 동물이 하는 바를 따라 했다는 순진한 상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우주에서 또 다른 생명체를 발견한다면, 우리처럼 생겼을 확률은 매우 매우 매우 희박하다.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알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그 신을 인간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순진한 상상에 불과하다.


p.515

이 신화들은 인간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인 '뻔뻔함'을 잘 드러낸다. 여기에 예시된 고대 신화들의 우주관과 현대의 대폭발 우주론 사이에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제안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위하여 실험하고 관찰한다는 점이다.

과학이 스스로를 가장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다.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 과학적 진리들은 현재까지의 진리이다. 미래에 언제든 뒤집힐 수 도 있다.


p.519

영원무궁의 팽창 우주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든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p.528

실제 4차원에서 4차원 입방체는 모서리의 길이가 동일하고, 모서리와 모서리가 이루는 각이 모두 90도인 구조물이다.


p.528

여기 납작이 나라와 같은 우주가 하나 있다고 상상해보자. 납작이 나라의 주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2차원적 우주는 3차원적으로 구부러져 있다. 납작이들이 자기가 사는 곳에서 다른 장소로 여행한다 해도 두 장소 사이의 거리가 특별히 멀지 않다면 자기 나라가 구부러진 줄 전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납작이가 제 딴에 직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 아주 멀리 이동한다면, 그는 이상한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여행 중에 어떤 경계를 만난 적도 없고 가던 방향을 바꿔서 되돌아 걷지도 않았는데, 출발점에 다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납작이의 2차원 공간은 신비롭게도 3차원적으로 구부러져 있는 것이다. 그가 제3의 차원을 상상하지 못해도 3차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납작이의 이야기에 나오는 차원을 하나씩만 높여 보라. 그러면 납작이의 고민이 바로 우리의 고민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4차원의 존재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할 수 없다. 4차원의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너무나도 궁금하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인류가 그 존재의 유무에 대해 증명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살아있고 싶다.


p.531

빛이 우주에 갇혀 있으면 내 뒤통수를 떠난 빛이 우주를 한 바퀴 돌아서 나의 정면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크기는 1920년대에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커서, 빛이 우주를 한 바퀴 돌아오려면 우주의 현재 나이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판명됐다.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쉽사리 상상하지 못했을 이야기이다.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지적 즐거움을 느낀다.


p.532

그들의 세계에 진입하려면 어떻든 4차원으로 '길'을 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쉽게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블랙홀이 우리를 그 길로 데려가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양계 근처에 작은 블랙홀들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자, 이제 영원의 벼랑 끝에 서서 정들었던 이 우주와 헤어져, 저 우주로 뛰어들 채비를 해 보자.


미래로 띄운 편지

p.555

살아 남기 위해서 우리는 유전자가 제공하는 것 이상의 정보를 미루어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두뇌 도서관의 규모가 유전자 도서관의 수만 배나 되는 것이다.


p.555

각자는 한 사람의 성숙한 인격체로서 누구를 아끼며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 파충류 수준의 두뇌가 명령하는 대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p.557

진화가 그다음에 택한 방책은 육체 바깥에다 필요한 정보를 저장해 두는 것이다.

유전자 → 두뇌 → 문자(육체 바깥)에 이어지는 정보의 저장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정말 그럴듯하다.


p.573

이때 처음 송출된 방송은 반지름이 빛의 속도로 커지는 구의 표면을 만들면서 우주 깊숙이 점점 더 멀리 퍼져 나가고 있다.


p.575

방송된 지 이제 겨우 수십 년이 지났으니 팽창된 구의 표면은 지구에서 현재 수십 광년의 거리에 있을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외계 문명권이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좀 더 먼 곳에 있을 것이니, 앞으로 얼마 동안은 그래도 안도의 한숨을 쉬어도 좋을 듯싶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도달하고 말 터이지만 말이다.


p.577

그러나 의식의 산물인 지능은 인간에게 무서운 능력을 부여했다. 인간이 자기 파멸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갖춘 현명한 존재라고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파국을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우주적 시간 척도에서 볼 때 지극히 짧은 시간이겠지만 우리는 어서 지구를 모든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하나의 공동체로 바꿔야 한다. 그리하여 지구 상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이룩함으로써 지구 문명도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이 돼야 할 것이다.


은하 대백과사전

p.622

문명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과학자들이 비과학자들을 설득하여 외계 생명의 탐색 사업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얻어 내기가 불가능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사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내부에만 투자하고, 통념이 사회를 철저하게 지배하여 별세계의 탐색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할 수도 없는 사회이다. 다른 하나는 외계 문명과 접촉해 보고 싶다는 희망을 꿈꿀 수 있으며, 또 시민 전체가 위대한 이 꿈을 공유하여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위한 대규모의 연구가 실행될 수 있는 사회이다.


p.622

우리가 외계로부터 오는 신호를 잡기 위해서 수백만 개에 이르는 별들을 모두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아무런 신호도 검출할 수 없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은하에서 문명의 발생이란 것이 참으로 드문 현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주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적어도 하나의 확고부동한 척도가 마련되는 셈이다. 따라서 지구 생명의 고귀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 한 명 한 명이 개체로서 반드시 존중돼야 할 존재가 된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외계 문명이 발견된다면 인류사와 지구 행성의 의미는 그 근본에서부터 변혁을 겪게 될 것이다.

우주 탐사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해준다. 만약 정말 이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가 우리밖에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그럼 전 지구에서 많은 분쟁들이 해결되지 않을까. 만약 다른 지적 존재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더 이상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까.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p.632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지구는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이렇게 여행은 시야를 활짝 열어 준다.


p.644

광기 어린 협박의 실제 목적은 가상의 적대국을 지구 전역에 걸친 대결의 장으로 내몰지 않고 오히려 분쟁의 여러 쟁점에서 상대로부터 양보를 끌어내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막가파식 공갈 협박을 완벽하게 구사하여 상대방을 속이려면 절묘하게 과장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과장에는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중대한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한 사람이 비이성적 행태로 일단 협박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이러한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서 협박의 허세를 허세로 묶어 두지 못하고 언젠가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협박을 실행으로 옮기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북한이 생각났다. 이것대로 북한은 정말 과장을 통해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실행으로 옮겨버리는 우를 범하면, 그땐 정말 인류의 종말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p.650

항시 가상 적국의 문화적 하자를 지적하고 그들이 저지를지 모르는 비이성적 행태를 상정하여 사람이 아직 갖고 있는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는 데 유효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자국민을 파충류적 행동 기제로 몰고 가고는 한다.


p.656

인생의 결정적 두 단계인 유아기 또는 성인기 중에서 어느 한 시기에라도 피부 접촉을 통한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폭력 성향으로 기울게 된다는 것이다.


p.657

어린이 학대, 성생활의 심한 억압 등은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죄악이다.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아이를 자주 껴안아 주라.


p.659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거나 있지도 않은 거짓 지식에 의존하려거나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마음속에 그리는 사람은 자신을 미신에 맡겨 헛된 위안을 얻으려는 자이다. 그들은 세상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비겁함의 소유자들이다. 진정한 의미의 용기는 자신의 편견이 밖으로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또 찾아낸 결과가 자신의 희망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코스모스의 조직과 구조를 끝까지 탐구하여 그 깊은 신비를 밝혀내려는 이들의 것이다.

케플러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자연의 진리가, 나의 거부로 쫓겨났었지만, 인정을 받고자 겉모습을 바꾸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들어왔으니… 아, 나야말로 참으로 멍청이였구나!"


p.660

그리고 과학 하기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단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란 가정은 모조리 철저하게 검증돼야 한다. 과학에서 권위에 근거한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이다. 모든 과학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가슴속에 100번 새겨야 하지 않을까.


p.674

이렇게 어렵사리 만들어진 인간이 자신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로 변하다니. …… 우주에서 벌어졌던 진화의 단계를 차근차근 이해하노라면, 거대한 '수소 산업'의 최종 산물로서 태어난 생물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확실히 알게 된다.


p.674

사람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와 조금이라도 다른 성격의 사회를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존재로 간주하며 심히 혐오하고는 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으면서 말이다.

내가 요즘 정말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이나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 비난하고 있는 나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을까. 친한 친구와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다가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았다. 우리는 똘레랑스의 마인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존중받기 위해선 존중을 해야만 한다.


p.675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와 다른 생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거나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광활한 우주에서 이 지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동시에, 내 옆에 있는 존재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부분이다.


p.675

현대는 충성의 대상을 인류 전체와 지구 전체로 확대해야 할 시대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의 생물 종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국수주의, 지역주의 등 모든 차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지역주의는 싫은데, 국수주의는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관점에서 그것이 유리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p.677

행성과 항성의 탐사가 계속될수록 인류 우월주의는 뿌리째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 대가로서 우리는 우주적 시야를 갖게 될 것이다.


p.677

전 지구 규모의 핵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진정한 의미의 군축 시대가 온다면, 그때 비로소 인류의 우주 탐험 노력이 강대국들의 방대한 군수 산업을 흠결 없는 평화의 산업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준비 과정에서 얻는 것들을 코스모스의 탐사 준비에서도 비교적 수월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장해제. 과연 이러한 세상이 올까. 이러한 세상이 온다면, 그 때야 말로 인류의 부흥 시기가 아닐까.


p.682

우리는 종어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서 감사해야 할 것이다.


옮긴이 후기

저는 이러한 난제들을 안고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화두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위상을 우주적 관점에서 조망하게 될 때, 앞에서 열거한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찾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맞다. 인류에게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알아가는 것 말고 당장 눈앞에 시급해 보이는 문제들이 많다. 하지만, 코스모스와 지구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해결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이 해결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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