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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전달하는 것, 잘 그려내는 것

디자인(design)이란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으로, 의장()이나 도안을 말한다.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지시하다·표현하다·성취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의 데시그나레(designare)에서 유래한다. 디자인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실체이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디자인이든지 실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디자인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조형요소() 가운데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들의 구성으로, 합리적이며 유기적인 통일을 얻기 위한 창조적 활동이며 그 결과의 실현이 곧 디자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자인 [Design] (학문명 백과 : 예술 체육, 조명식)


지난 글을 통해 이미 언급했지만 전 웹디자이너에서 시작해 UX 디자이너 그리고 지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규정한 직업인으로서의 호칭들은 변해왔지만 여전히 그 사이를 관통하는 공통된 맥락으로 '디자이너,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의 흐름에 맞게 적당히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계절에 맞도록 꼭 맞는 옷을 입고 이 계절이 지나면 즐겨 입던 옷들을 고이 포장하여 집 어딘가 보관하듯이 말이에요. 불현듯 잊을만하면 어느새 풀내음을 거리 곳곳에 내려 앉히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게 저마다의 고개를 올리겠지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정도에 맞게 순환합니다. 제가 이상으로 품고 있는 디자이너의 길이 이렇습니다. 수많은 변화에 변화지 않는 것, 기본을 지키고 그 변화 속에 당면한 두려움과 낯섦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균형이란 것을 잘 지키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디자인하는 것들을 대중들에게 '잘 그려내어 잘 전달하는 것'을 말이죠.



잘 전달하는 것, 잘 그려내는 것


한 가지 실험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성인들로 이루어진 두 그룹에게 코끼리라는 주제를 놓고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그 후 불특정 다수에게 이 그림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죠. 

구글을 통해 임의로 이미지를 넣은 것입니다.

위의 이미지를 예시로 가정하자면 좌측이 어린아이, 우측이 성인 그룹이라는 것을 예상하실 겁니다. 물론 성인이라 해도 모두 저렇게 그리진 못하겠죠. 그저 예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위의 그림은 완성된 그림을 옮겨 놓은 것이지만 실제 결과에서는 거의 그리다 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림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주어진 시간이 짧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두 가지의 그림을 놓고 정답을 맞히라고 하면 이 역시도 예상하시겠지만 대부분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그룹의 그림을 정답으로 맞춘다고 합니다. 미완성일지라도 말이죠. 

성인들은 어떠한 주제가 주어졌을 때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누구나 알 법한 보편적 특징에 주목하지 못하는 것이죠. 반면 어린아이들은 본인들이 보고 느낀 대로의 직관적인 사물의 특징을 그대로 그려낸다고 해요. 코끼리는 코가 길다. 귀가 크다 와 같은 단순하고도 명확한 특징들을요. 

이 실험은 제가 산업디자인을 전공할 때 '발상과 표현기법'이라는 수업에서 교수님께 들었던 내용입니다. 초기 아이디어 단계에서 발상했던 형태를 빠르게 스케치하는 법, 그리고 상대에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 위한 예시였습니다. 디자인을 공부하고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그 누구보다 앞선다고 생각했지만 입시미술을 거치지 않았던 제게 스케치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크게 내색 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디자이너가 되지 못할 수도 있겠다.라는 불안감이 가슴 한편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죠. 그런 제게 나름의 위안을 주었던 수업이기도 했습니다. 

위의 실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이미 언급해드린 보편성의 중요성과 정해진 시간 안에 해야 할 우선순위, 마지막으로 잘 그리는 것만이 디자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와 같은 내용들을 세미나/콘퍼런스 혹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지속적으로 공유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도 공통된 맥락 안에서 이야기를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관점이 있습니다. 잘 전달하는 것만큼 잘 그리는 것에 대해서도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업계를 지배했던 그래픽 스타일은 스큐어모피즘이라 하여 현실에 가깝게 표현해내는 그래픽 스타일이었습니다. 이후 모바일이 등장하고 고도화되면서 디자인의 형태는 점차 플랫 디자인 스타일로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시기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팽배한 흑백논리가 존재했었습니다. 조형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에서 플랫디자인은 스큐어모피즘에 비해 떨어진다가 논쟁의 중심이었죠. 



디자인은 처음부터 설계였고 인문이었다.


현재의 "디자인을 한다"라는 의미가 이전과는 그 뜻을 다르게 한다고 많이 체감합니다. 그래픽과 아트웍을 잘 해내는 디자이너가 각광받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소위 '때깔 난다'라고 하는 디자이너는 에이전시 업계에서 대우를 받고 원한다면 대기업으로의 이직도 비교적 손쉬운 시기였습니다. 표현해내는 능력 그 자체가 디자인의 전부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죠. 아마 우리 업계가 다른 디자인 분야에 비해 깊이를 가지지 못할 만큼 빠르게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제작하다, 표현하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포토샵을 할 줄만 안다면 디자이너 직함을 마구 찍어내는 생산에 급급했던 시기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초기 단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 과정이 진전되는 중간 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기술들이 진보화 되고 포토샵만이 전부였고 그 외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 우스울 만큼 스케치, XD와 같은 툴들의 탄생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만큼 같은 디자이너라 해도 계층구조의 피라미드화가 더 선명해졌죠. 역할에 따른 변화도 급격하게 생겨났습니다. 기획자라는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던 것이죠. 수많은 기획자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대다수 반발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대항했죠. 오래전 '디자인은 처음부터 설계였고 인문이었다' 란 주제로 강연했을 당시 많은 기획을 하시는 분들에게 질문세례를 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일일이 답변드리며 주장했던 사실에 논리를 부여하는 데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그분들 역시 처음부터 디자이너였던 것이었는데 말이죠. 

누군가의 노력을 누군가의 그릇을 누군가의 미래를 빼앗고 쟁취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변화의 흐름은 무언가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 아닌 본질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이 담긴 진정성에 가깝습니다. 가파르게 치닫던 거친 길들이 다듬어지는 과정 같아요. 새로운 기술의 습득이 아닌 순환을 위한 균형입니다.  



늘 빠지기 쉬운 함정은 자연스럽게의 이데올로기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디자인' 이란 단어를 검색했습니다. 

'디자인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조형요소() 가운데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들의 구성으로, 합리적이며 유기적인 통일을 얻기 위한 창조적 활동이며 그 결과의 실현'

합리적이며 유기적인 통일을 얻기 위해 수많은 데이터를 활용한 기법들이 탄생했습니다. 보편적 사고를 위한다는 명분인 것이죠. 언제부턴가 수많은 디자인 강연에서는 이 보편적 사고를 위해 갖춰야 할 지식들을 전파하는 강의들이 즐비해졌습니다. 빅데이터를 활용하고 디자인 시스템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분석하고 답을 내리는 일련의 정해진 답안들을요. 트렌드의 흐름 때문이라곤 하지만 정작 표현하는 것에 대한, 조형의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고착화된 보편적 지식과 방법론들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것 같아 조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관념의 구체화를 위해서는 오감을 지각할 수 있는 구체적 표현방식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오감 중 시각이 가장 늦게 발달되지만 시각만큼 조형의 아름다움을 가장 먼저 접하는 것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 조형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을 말합니다. 문학평론가 故 황현산 선생님의 트위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글을 쓰거나, 특히 번역할 때, 늘 빠지기 쉬운 함정은 자연스럽게의 이데올로기다.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이어서가 아니라 습관이어서 자연스럽다."

반복은 습관을 만듭니다. 그 습관이 본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신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그것이 생각일 수 있으며 답을 내리는 과정 자체의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습관들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라는 무늬를 덧씌워 옳을 수밖에 없는 방법론들을 늘어놓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격입니다.

때론 숫자와 근거 뒤에 감춰진 진실들이 있습니다. 대중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선 습관적인 방법론들이 아닌 또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잘 그려내어 자연스러운 조형성까지 갖춰야 하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좌뇌 우뇌를 쓰는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겸비해야 한다는 것만큼 말도 안 되는 것이 없겠지만, 우린 이 지랄 맞은 일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가고 있죠. 

참말이지 디자이너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디자인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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