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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기자 Mar 20. 2023

대구, 성벽이 없는 성곽도시

서문시장과 앞산순환로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우리집은 주말에 아무것도 할 게 없을 땐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고속도로 위를 오른 적이 종종 있었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전주에 내려서 비빔밥을 먹고 오기도 하고, 대전통영간고속도로를 타고 진안에 내려서 마이산을 보고 오기도 하는 식이었다. 국토의 중심부인 대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한 번은 매번 서울을 가기 위해 상행으로만 타던 경부고속도로를 하행으로 타고 내려 갔다.


이 때 결국 내린 곳이 바로 대구.

말로만 듣던 대구라는 도시를 내가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내게 대구의 첫인상은 '대도시'였다.


대구가 대도시인 걸 몰랐던 게 아니다. 지독한 지리덕후였던 내게 대구의 인구, 자치구의 수, 기차역과 고속도로 IC의 이름이나 개수 따위의 건 자다가도 읊을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분명 내 예상보다 더 큰 도시임엔 분명했다.


서울에서도 찾기 힘든 왕복 10차선 이상의 도로들이 도심을 관통했고, 무엇보다 대부분의 큰 도로들이 직선이었다. +형으로 만나는 두 도로가 모두 왕복 10차선 가까워서 거대한 교차로를 만드는 건 한국 도시들에선 좀처럼 찾기 힘든 일이다. 서울로 따지자면 코엑스 앞 영동대로와 테헤란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도심 곳곳에 있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가장 강렬했던 인상은 고속도로 IC에서 나올 때 봤던 표지판이다.


'시내'


어렸을 때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가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표현이 바로 이 '시내'였다.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서울에선 통상 쓰지 않는 표현. 그치만 대전에선 시내라고 하면 으레 구도심인 중앙로와 은행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상에서 그 단어를 쓰는 대전에서도 '시내'가 도로 표지판에 나오진 않았다. '대전역', '중앙로', '충남도청'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있지만 '시내'는 없었다.

하지만 대구는 아니었다.


고속도로 IC에서 나오자 표지판에 떡하니 '시내'가 있었다.

더 압권은 그 밑의 영어 번역.


'Downtown'


직역에 가까운 표현이지만 조선반도에서는 생전 처음 본 이 신박한 표현이 내겐 대구의 인상으로 굳어졌다.

다운타운의 도시.

 



대구는 분지 도시다. 여름철이면 주변 지역과는 다른 소기후(microclimate)가 나타나는 '대프리카'. 여름철이면 한반도에서 가장 뜨거워지는 도시가 되는 이유는 대구가 분지여서라는 말은 여름철 뉴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얘기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대구는 곧 분지'라는 생각을 갖는다.


사실 전국이 산과 구릉으로 덮여있는 한국에서 '분지 도시'는 그다지 특별한 점이 아니다. 서울, 대전, 청주, 전주, 창원 등등 분지형 대도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대구는 단순히 분지가 아니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매우 높고(대구 도심의 남북을 각각 가로막고 있는 팔공산과 비슬산은 모두 1000m가 넘는 높은 산이다) 공기가 빠져나갈 틈이 없이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도심 서쪽에 제일 높다는 산이 찍해야 700m대의 계룡산이고 굵은 천이 세 개씩 남북으로 흘러서 '틈'을 만들어 놓은 대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다. 이 때문에 다른 분지도시에선 나타나지 않는 여름철 도시 전체의 열섬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구가 갖는 국내 다른 대도시와의 가장 큰 차별점은 '분지 도시'보다는 '평지 도시'라는 데 있다. 한국엔 도심부를 중심으로 구릉 하나 없이 너른 평야가 이렇게 넓은 면적으로 평야가 펼쳐진 도시를 찾긴 쉽지 않다. 도시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도 도시 한복판에 남산, 응봉산, 서달산 등등이 곳곳에 배치돼있다. 제2의 도심인 강남의 경우 도심 전체가 구릉지대인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한국에서 이런 너른 평야의 대도시를 찾자면 광주가 있긴 하다. 하지만 성격이 다르다. 광주는 전통적 도심이 무등산에 가로막혀 현재의 광주 시계의 동쪽에 치우쳐져 있었다. 이 때문에 평야 도시임에도 도심이 동심원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평지가 있는 서쪽으로만 확장하게 됐다. 결국 광주는 시청과 관공서를 상무지구로 옮기고 새로운 도심을 만들었다. 대전과 마찬가지로 도시가 시작한 구도심과 시청이 있는 신도심으로 나뉜 2도심 체제다.


반면 평지도시 대구는 국내 대도시 중 보기 드문 단핵도시다. 대구의 도심은 조선시대 대구읍성 자리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현재 대구의 최대 번화가인 동성로는 성의 동쪽이란 뜻이고 국내 최대 시장 중 하나인 서문시장의 이름 역시 성의 서쪽 문 앞에 자리잡았다해서 붙여졌다. 이밖에도 현재 도심의 지명인 성내동, 도심을 지나는 북성로, 남성로 등등의 지명도 대구읍성에서 나왔다.


성곽 도시로 시작했고 현재 도심이 성곽 안쪽에 있다는 점은 서울과의 공통점이다. 다만 서울은 성곽이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산을 연결하는 형태로 지어졌고, 대구는 성곽 자체도 평지 위에 지어졌고 성곽 밖으로도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는 점이 다르다.


평지 도시의 특징은 도로를 바둑판식의 격자형으로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산과 물을 피해 도로를 구불구불 놓을 이유가 없다. 고등학생 때 처음 접한 대도시라는 인상은 분명 여기서 왔을 거다.

도심이 수 백년 동안 같은 곳에서 이어졌고 도심으로부터 동심원 형태로 도시가 발전해나가면서 지금 대구광역시는 1차, 2차, 3차, 4차 순환도로를 구축했다. 1환(環)부터 8환(環)까지 8개의 고리형 순환도로가 도시를 겹겹이 싸고 있는 베이징과 비슷한 구조다. 또 한 편으로는 여러개의 loop과 beltway가 둘러싸는 미국 도시 같은 측면도 있다.


그래서 이번에 대구로 출장을 간 김에 쏘카를 빌려서 4차 순환도로를 달려봤다. 처음 대구에 왔을 때 엄마 차로 달리던 앞산순환로부터 대구외곽순환도로까지. 서울 내부순환도로랑 비슷하면서도 다른, 미국 도시 같으면서도 아닌 뭔가 끌리는 도시다.


대구는 평지도시, 격자형 도로체계, 겹겹이 도시를수백년 간을 이어온 같은 자리의 도심, 동대구역 주변을 제외하곤 미약한 부도심 발전 등등 요소가 결합한 도시다. 격자형 평지도시라 교통공학적으로 지하철의 효율이 가장 안 나는 도시,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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