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는 이번이 세번째, 그중 두 번을 신주쿠에 숙소를 잡았지만 신주쿠 버스터미널을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도쿄에 한국과 같은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기본적으로 시내 대중교통에서조차 버스보다는 철도교통에 의존하는 비율이 훨씬 높은 일본에서 각 도시를 잇는 고속버스가 있을 거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국영철도에서 시작한 JR마저 지역별로 나뉘어서 서로 경쟁하고, 거기에 수많은 사철(私鐵) 노선까지 경합하는 '철덕(철도덕후)'의 나라 일본에서 제대로 된 고속버스 터미널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신주쿠 버스터미널. 좌측으로 보이는 넓은 인도도 지상 2층 레벨이다.
하지만 다음날 가와구치코행 버스표를 사기 위해 늦은 저녁 처음 찾아간 신주쿠 버스터미널은 나의 이런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충분했다. 오사카, 나고야, 센다이 등 일본 전국 각지를 잇는 버스부터, 나리타공항과 하네다공항 등 수도권 공항들을 향한 버스까지 줄지어 떠나고 있는 거대한 터미널이었다. 세 번에 걸친 도쿄 여행에서 신주쿠라면 골목골목을 다 걸어 다녔는데도 이런 메가 터미널의 존재조차 몰랐던 것이다.
신주쿠역은 2011년 세계에서 이용객이 가장 많은 철도역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엄청난 규모의 역이다. 일평균 승하차 인원만 35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참고로 2022년 기준 서울 지하철 2호선 전체역의 일평균 승하차량이 250만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일평균 11개의 지하철, 광역철도, 철도 노선이 교차한다. 신주쿠역에서 운영하는 철도 회사만 JR동일본을 포함해 5개에 이른다. 역 출구만 공식적으로 200개가 넘으니 더할 말이 없다.
거기다 사실상 '신주쿠(新宿)'라는 이름이 포함된 근방의 지하철역만 해도 '세이부신주쿠' '니시신주쿠' '신주쿠산초메' '신주쿠니시구치' 등 역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더욱 거대하다. 실제로 여행 마지막날 신주쿠역에서 불과 700m 떨어진 호텔까지 가는데 지하에서 길을 잃어 공항버스를 놓칠 뻔한 적이 있었다. 밖에선 누구보다 길을 잘 찾지만 건물 안이나 지하에만 들어가면 동서남북을 잃어버리는 나에겐 절망적인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주쿠 버스터미널의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갔던 가장 큰 이유는 복잡한 역 구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 고속터미널역만 해도 지하철에서 처음 나오면 지하상가와 신세계백화점, 경부선과 호남선으로 나뉜 고속터미널로 길을 잃기 십상이지만 터미널 근방 반포 일대를 걸으면서 근처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게 더 어렵다. 밖에서도 쉽게 주차돼 있는 버스들과 터미널을 들락날락하는 수많은 버스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신주쿠 버스터미널은 말 그대로 4층에 위치해 있다. 4층 옥상 위로 향하는 버스들조차 신주쿠역 '2층'을 지나는 고가도로에서 연결된 입구로 들어간다. 완전한 지상레벨에서는 버스들조차 구경하기 쉽지 않다.
사실 신주쿠역, 혹은 신주쿠 버스터미널을 처음 찾는다면 어디부터가 지상 1층이고, 어디부터가 지하인지조차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아니, 구분조차 의미가 없다. 난 분명 지하 1층이었는데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 하면, 분명 2층에 있었는데도 밖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주쿠역을 직간접적으로 통과하는 도로, 철도는 모두 각기 다른 층위로 역을 통과한다. 말 그대로 입체적이다.
신주쿠역 2층을 관통하는 고가도로 위에 놓인 육교
신주쿠역에서 서쪽으로 도쿄도청을 향해 걸어가 보면 입체도시로서의 도쿄의 면모가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신주쿠역에서 서쪽으로 도쵸마에역을 지나 신주쿠중앙공원까지, 도쵸마에역부터 북쪽으로 니시신주쿠역까지는 모두 지하로 연결돼있다. 도쿄도청은 위압감 있는 쌍둥이 빌딩인데 신주쿠역 남쪽에서부터 도청의 남쪽 쌍둥이빌딩까지도 지하로 연결된다. 신주쿠 업무구역 일대 전체가 지하로 거미줄처럼 연결돼있다. 지상 위에서는 입체감이 더욱 극대화된다. 동서방향으로는 지상레벨의 간선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건물 2~3층 높이의 고가도로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이 때문에 어느 건물은 메인 출입구가 2층에, 어느 건물은 메인 출입구가 1층에 있다. 인도(人道)라고 다를 건 없다. 난 분명 지상 위 도로를 걷는다 생각했는데 아래에도 사람과 차가 지나다닌다.
1994년 철거된 삼각지 교차로. 일명 '돌아가는 삼각지'
복개된 청계천 위에 놓여있던 청계고가도로
사실 70-80년대 서울 사진을 보면 서울도 도쿄 못지않은 입체도시였다. 현재 청계천 자리에 있던 청계고가도로, 지금은 보행자 전용 서울로7017로 탈바꿈한 서울역 고가차도, 삼각지역과 신촌역 일대에 있던 입체 로터리 등 수많은 고가도로가 있었다. 하지만 서울은 보행자 중심의 도로체계 구축, 복개 하천 복원(기존에 있는 서울 고가도로는 상당 부분 복개천 위에 건설됐다. 지금 남아있는 고가차도도 마찬가지 - 내부순환로, 욱천고가차도, 이수고가차도 등)으로 인해 많은 고가차도를 철거했다. 도쿄와 달리 서울은 끊임없이 입체성을 죽여온 도시인 것이다.
도쿄에는 고가차도 등 입체적인 도로교통체계와 상관없이 서울에서는 사라지고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한 도로가 있다. 바로 육교다. 도쿄엔 조금만 넓은 도로가 나오면 어김없이 육교가 등장한다. 신주쿠나 마루노우치 같은 오피스지구에도 기본 도로체계 자체가 입체적으로 구성된 것과는 별개로 수많은 육교들이 놓여있다.
신주쿠역 서쪽 오피스지구 일대
육교는 굉장히 양면적인 특성을 지닌다. 우선 자동차 도로 중심체계에서 육교는 도로교통을 원활하게 해 준다. 신호등을 최소화할 수 있고, 운전자 입장에선 보행자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줄여 속도를 높일 수 있게 해 준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도 예전엔 교통사고 위험이 잦은 곳엔 횡단보도를 설치할 수 있는데도 육교를 설치한 곳들이 많았다.
반면 육교는 장애인이나 노약자 등 교통약자들에겐 최악의 시스템이다.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고,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하더라도 횡단보도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만든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육교가 철거되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도로체계를 자동차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전환하는데 가장 핵심이 육교와 지하보도 철거였다.
앤트러사이트 연희점에서 바라본 육교
육교의 본성은 보행자가 자동차에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하지만 도로체계가 보행자 중심이라면 말이 다르다. 이 관점에서라면 사람이 도로 위를 다니고 자동차는 자주 멈추거나, 자동차가 지하나 고가로 피해 가는 것이 옳다. 도쿄는 LA, 휴스턴, 시카고 등 미국의 여느 대도시들처럼 극단적인 자동차 중심 도시구조가 아닌데도 여전히 수많은 육교를 갖고 있는 도시다. 도대체 왜?
일본에선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육교 위로 대피해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쓰나미 등 재해 상황에서 육교가 훌륭한 대피용 구조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일본이 예전의 육교를 그대로 존치하는 유일한 이유가 재해 상황 대비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관점에선 국내에서도 전시에 기갑차량들의 진격을 막기 위한 대전차방호벽으로 건설했던 육교까지 몽땅 철거한 게 옳은 선택인지는 곱씹어볼 일이다.
사실 도쿄의 입체적인 도시 면모를 보면서 또 하나 든 생각은 과연 도쿄가 한국의 도시였다면 2023년까지 시내에 있는 수많은 철길이 계속해서 지상 위나 고가로 그대로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지방선거나 총선 때마다 'OO선 외곽 이전' 혹은 'OO철도 지하화 후 공원 조성' 등이 단골 공약이 됐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일종의 포퓰리즘으로 서울의 공간은 더욱 보행자 친화적이고 녹지가 확충되는 긍정적인 면이 많다. 내가 감히 뉴욕의 하이라인보다 훌륭한 도시재생 사업으로 꼽는 경의선 숲길공원 역시 이러한 철도 지하화로 탄생한 곳이니 말이다.
경의선숲길 연남동 구간./ 서울특별시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교통 인프라를 마치 심시티 게임하듯 너무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과연 옳은 방향인지도 따져볼 문제다. 철도나 공항이 훨씬 먼저 생기고 그 뒤에 그 주변으로 주거단지가 형성됐음에도 국가가 모든 소음 피해를 보상하고, 선거 하나만 끝나면 전국에서 철도 지하화, 공항 이전이 현실화되는 게 분명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고도의 정치적 반응성을 바탕으로 시민 편의성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이는 동시에 국가만능주의로 귀결된다. 국가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