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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Dec 17. 2021

회고 21

어중간한 12월. 목요일.


  노트북에 손을 얹으면 글이 나가기도 전에 습관적으로 일을 한다. 24/7 로그인 상태로 성과를 확인하고 구상하느라 머리가 쉴 틈이 없다.

  내 뇌는 일이 주는 자극에 절여진 지 오래다. 일 외에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찾은 게 글이었다. 지난 봄, 여름, 가을은 온통 글을 짜내기 위해 분투하던 내가 껴있다.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얻기 위해 끙끙대며 마음으로 애쓴 날이 얼마나 많았나. 그러나 애쓴 것은 마음뿐 글은 더뎠다. 노트북 앞에 앉으면 일을 하고 펜을 쥐면 손이 생각을 따라가질 못해 어려웠다. 변명 섞어 이유를 대자면 그렇고. 알고 있다. 글이 마음으로 써지던가. 글은 엉덩이가 쓰는 거였지 항상.

  그래도 오늘만큼은 꼭 쓰자는 마음으로 노트북에 손을 얹는다. 식탁 겸 책상으로 10여 년간 함께한 작은 상 앞에 쭈그려 어깨를 말고 머리에 잔뜩 낀 단어를 잡아채다 뱉기라도 해 보겠다. 꼭.




  정리하기 좋은 날이다. 12월 17일 목요일. 올해를 접고 내년을 다짐하기에는 이르고, 미루자니 조바심이 드는 어중간한 날이라 딱 좋다. 마침 마음이 들뜨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라 기분에 휘둘리지 않고 올해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월요일이 두 번만 지나면 해가 바뀐다. 올해 허투루 살았던 날은 많지 않은데 열심히 살았냐 자문하면 쉬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맘에 들지 않은 날이 많았다. 연의 끝에 닿을 때면 늘 그랬다. 흡족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둘 중 하나일 테다. 이상이 높아 성에 차지 않은 날이 많았거나, 이상에 닿을 수 없게 살았거나. 둘 다일 수도 있고.

  뭔가가 되고 싶은데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뚜렷하지 않아 뭐라도 하는 날이 쌓이다 보니 벌써 오늘이다. 다정하고, 부지런하고, 확신에 찬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내가 벌인 수많은 일이 대충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벌인 것들이었다. 친절한 표정과 목소리를 흉내 내다보면 내 마음에 다정이 배지 않을까.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 열심히 몸을 굴려 내 몸을 버틸 힘이 생기면. 그러다 보면 다정하고, 부지런하고, 확신에 찬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영영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많은 날 불행했다.

  내가 그런 마음으로 애쓰고 있단 걸 몰랐다. 열두 달을 지내는 내내 몰랐다. 책 읽는 거 좋아하니까 자꾸 책을 사고, 불안함에 공부하고, 살찌기 싫어 운동하고 그런 줄 알았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서 벌이는 일을 두고 자꾸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만 휩싸여 길을 잃었다. 내 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불안은 나의 원동력이었으나, 올해는 내 눈을 흐렸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뭐야. 애쓴다는 자각만 가득하니 힘 내기가 점점 힘들어졌던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고생했는가. 그런 나를 주워 담아 어떻게든 멋진 사람이 되겠다고 아등바등 지내느라 얼마나 버거웠던가. 매일 밤 하루를 반추하며 반성하느라 얼마나. 그 와중에 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매일 밤마다 깨지는 나를 잘 주워 담고 쓸어 모아 다시 이어 붙이면서 얼마나.


  애썼다. 앞으로도 내가 나로 살아야 하는 일이 공교로우나 어쩔 수 없으니 잘 부탁한다. 기꺼이 깨지면서 더 예쁜 조각을 주워다가 이리저리 끼우고 붙일 팔자로 났으니 반드시 나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믿고. 매일 같이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멋진 나를 쌓는데 열심을 아끼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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