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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Jan 16. 2022

기다리는 마음

 열차가 곧 광주송정역에 닿을 것이라는 방송이 나온다. 두 시간 가까이 자리에 굳어 있던 허리를 가볍게 돌리고 귀에 꽂힌 에어팟을 뺀다. 오는 내내 끼고 있었더니 귀가 깨질 것 같다. 읽다 말다한 책은 쉽게도 접힌다. 기차에서 책이 잘 읽힌적은 없으나 막상 읽을 거리가 없으면 마음이 섭섭해 꼭 책을 챙긴다. 이런 마음은 별에 별 물건에 적용되어 늘 내 몸만한 가방을 이고다닐 수밖에 없다. 양말부터 바지, 티셔츠, 화장품까지. 혹시나 필요할까, 혹시나 누가 필요로할까 하는 마음으로 이거까지만 챙기자 하다보면 끝이 없다. 그러니까 키가 안 크지. 몸만한 가방을 들고 있으면 줄곧 듣는 소리다. 늘 어깨를, 그것도 한 쪽 어깨에 비뚜름하게 매 안 그래도 약한 어깨를 더 무겁게 하고 다니는 통에 금방 짓눌릴 것처럼 보이는지. 정말 내 키는 가방이 무거워서 크지 않은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 나는 밥도 잘 안 먹었고 잠도 잘 안 잤다. 가벼운 어깨보다 위로 올라가긴 어려웠으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빨리빨리의 민족은 이미 문 앞부터 줄을 지어 내릴 준비를 마쳤다. 그제야 노트북만한 테이블을 접고 주섬주섬 가방을 싼다. 나도 따라 설까 잠깐 생각하다 굳이 싶어 허리를 편하게 기대 고쳐 앉았다.


열차가 역에 진입하기 시작했는지 부드럽게 속도가 줄어든다. 열차가 멈추기 직전엔 종종 기묘한 향수에 젖는다. 어디론가 떠나야할 것 같기도 하고 어디론가 돌아가야 할 것 같기도 한 마음이 들면 지난 여행을 가볍게 훑는다. 그리운 기차역 냄새를 상기한다. 기억을 반추하느라 현재에 머무르지 않은 시선은 플랫폼이 보이기 시작하자 초점을 찾는다. 플랫폼엔 문이 열리는 자리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의 사람이 서있다. 새벽 한 시가 되어가는 이 때, 대합실에 있기도 애가 타서 계단을 내려와 기차 문 앞에서 추운 어깨를 용크리고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우고 기다리는 마음을 상상한다. 우리 엄마, 아빠 또래 즈음으로 보이는 얼굴을 보면 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기도 돌아가야 할 것 같기도 한 기분에 휩싸인다.


기차가 멈추기 직전, 내 자리 창문 밖에 같은 폼으로 어깨를 옹크리고 겨드랑이에 손을 끼운 엄마, 아빠가 보인다. 지나가는 기차에서 내 얼굴만 찾고 있었는지 단번에 나를 짚어내고 창문 너머로 들리지도 않는 인사를 흔든다. 반가운 손짓에 나도 손을 들어 답한다. 추운데 여기까지 나오고 그래, 차에 있어도 될 걸. 감사한 일에 감사할 줄 모르고 속만 상하는 딸이라 괜한 혼잣말이 나온다.


-


오늘은 남은 일을 하다 기차 시간을 놓쳤다. 8시 20분에 회사에서 출발했어야 했는데 시계를 봤을 땐 이미 8시 40분이었고 지하철을 타든 택시를 타든 기차는 무조건 놓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체념은 간단하다. 어쩔 수 없는 일에 최소한으로 실망하는 것은 직장인이 되고 익힌 교양이다. 느긋해진 마음으로 다시 열차를 예매하려니 자리가 남은 건 자정이 넘어 도착하는 열차뿐이다. 어쩔 수 없지. 자리 있는 게 어디야. 금요일 기차는 귀한 법이다. 나는 괜찮은데 부모님이 걱정이었다. 엄마, 아빠는 매번 역사 플랫폼까지 마중을 나온다. 열두시 넘어 도착하면 피곤할텐데. 택시타고 들어가겠대도 소용 없을 게 분명하나 혹시 모르니 슬쩍 물어야겠다.


 - 나 일하다 기차 놓쳐서 열두시 넘어서 도착하는데, 택시 타고 들어갈까?

 - 아이고, 일이 그렇게 많아서 피곤해서 어떡해. 기차는 새로 예매할 거야?

 - 이미 예매했어. 나 택시타고 가도 되는데!

 - 니네 아빠 너 온다고 어제부터 신났는데 안 나가겠니. 시간 맞춰서 나갈게. 이따가 봐요 이쁜 딸.


예상한대로 흐른 통화는 금방 끊겼고, 30초 남짓한 시간에 광주에 남은 이들의 기다림은 두 시간이 길어졌다.


-


"주차장 공사한다고 닫아놔서 쩌어기까지 걸어가야 돼. 춥지."

길만 건너면 금방인 걸 엄마는 춥지 춥지 하며 니트에 자켓까지 껴입은 내 팔을 문지르고 열을 낸다. 아빠는 반가운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자꾸 가방을 달라고 보챈다. 안 무겁다고, 들 수 있다고 기차에 내려서부터 거절하고 있는데도 자꾸. 계속 달라는 아빠도 아빠고, 거절하는 나도 나다. 길 건너에 택시를 잡느라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무더기로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이 찡한다. 나는 더 착할 필요가 있다. 더 잘 할 필요가 있다. 이 밤에 플랫폼까지 나온 두 어른에게 더 좋은 딸일 필요가 있다. 


"택시 안 잡히나봐. 엄마 안 나왔으면 집 가는데 한참 걸렸겠다."

"저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택시를 잡고 있는 거야?"

"요즘은 어플로 잡지. 그냥 잡으려면 택시 다 뺏겨 요새는."

"아~ 그래~? 나는 몰랐네. 이제 택시도 못 잡겠어."


고맙다고 말하려고 운을 띄워도 티키타카가 맞아야 말이지. 머쓱하게 숨은 인사가 아쉽다. 


몸도 안 좋으면서 이 새벽에 운전을 하고 나온 아빠는 자꾸 룸미러로 흘깃흘깃 나를 본다. 언젠가부터 나누는 말이 적어진 엄마는 그냥 별 말없이 내 손등을 쓰다듬는다. 따로 산 지 오래 됐다지만 우리 사이에 드문드문 정적이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닌 나 때문이다. 이래저래 살가운 딸이 아니라서.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는 둘에 같은 마음을 돌려드리지는 못하고 깔끔한 목소리로 의젓한 말을 한다.

아빠는 병원 갔어? 엄마는 병원 갔어?

나는 밥만 굶어도 큰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 떨면서 당신 몸은 챙기질 않아 늘 불안한 마음을 이렇게 밖에 꺼내질 못한다. 따로 사는 딸 걱정시키지 말고 몸 잘 챙기라는 잔소리에 아빠가 그런다.

"객지에서 혼자 산다고 고생이 많다, 이쁜 딸."

"아이고, 그 객지 좋아서 평생 서울에서 산다는 애한테. 고생이라도 얘는 이제 광주는 안 와. 그치?"

농담에도 쓸쓸함이 묻어 그치, 나는 서울이 좋지 한다. 이제 나에겐 광주가 객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굳이 전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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