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계시를 받은 듯 혹은 물에서 건져진 듯 잠에서 떠오르고 잔상은 온통 흐려진 채 한 단어만이 울린다. 비행기만큼이나 빠르게 흐른 꿈을 좇아 ‘그러나’ 이전의 장면을 불러오려는 시도는 언제나처럼 실패한다. 실시간으로 휘발되는 장면은 좇는 속도에 비해 달아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붙잡지 못한 생각이 달아나듯. 중요한 꿈을 꾼 것 같은데, 계속 자고 싶은데, 무슨 꿈이었을까.. 꼬리 잡힌 것이 하필이면 ‘그러나' 같은 존재감 대단한 것인 탓에 마치 나를 구명할 영감을 놓친 것처럼 실패한 시도를 자꾸 시도한다. 머리 구석과 고막 사이를 훑는 단어에 몽롱하다가 결국 발 끝까지 투과당하니 잠이 깨고 말았다. 서늘하다기에는 싸늘하고, 고요하다기에는 하늘을 가르는 소음이 굉장한 기내에서, 누웠다기엔 앉았고 앉았다기엔 쪼그라든 모양으로. 아까부터 뜬 눈이 드디어 뜨인 기분을 느끼며.
얼마나 잔 거지. 저릿한 손을 털어 스마트 워치를 보니 고작 한 시간 지났다. 억울하다. 시차 적응 때문에 고생하기 싫어서 비행기에서 잠만 잘 작정으로 어제 한잠도 자지 않았는데. 새벽을 꾸리기 위한 지난밤의 분주함이 무색하다. 열몇 시간 되는 긴 평화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쪼그리고 잤더니 머리어깨무릎발이 다 무겁다. 굽은 몸을 펼칠 겸 실컷 자던 팔다리를 뻗어 옆자리에 신호를 보낸다. 저 곧 나갈 거예요. 뻣뻣한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다섯 번, 왼쪽으로 크게 네 번. 양 쪽을 같은 횟수로 푸는 일은 번번이 실패한다. 마무리를 생각하면 마무리를 지을 생각에 질려버리는 탓에 마지막 한 번을 수행하는 것이 시작보다 어렵다. 왼쪽을 더 공들여했으니 괜찮아, 하는 식으로 부족한 한 번은 합리화된다. 그 사이 부산한 움직임을 눈치챈 옆 좌석이 뒤척인다. 항공사 색의 얇은 요로 어깨부터 종아리까지 꼼꼼하게 무장한, 요령 좋은 승객의 모양을 한 23C의 여자는 두 칸 너머에서 도착한 신호를 자다가도 수신해 냈다. 눈치챘다는 걸 눈치채고 테이블까지 정리하면 여자는 무릎과 몸통을 힘껏 당긴다. 선하게 접은 눈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소리 없이 감사를 표하고 낯선 이가 내어준 비좁은 통로를 빠듯하게 통과한다.
23A에서 몇 걸음 만에 도착한 복도에서 비상구 바로 옆에 붙은 화장실을 향해 산책하듯 걷고, 먼저 줄을 선 두 명 뒤에 느긋하게 대기한다. 손목 발목을 돌리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몸을 숙여 뻣뻣한 햄스트링을 풀고, 슬쩍 먼 곳까지 훑는다. 살펴보고 싶은 마음 없이도 초점은 멀리 찍힌다. 낭만적일 정도로 캄캄한 한 밤 중에 함께 하늘에 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 사는 누구인가. 괜히 궁금해져 훑던 것이 길어지면 몇 눈동자와 사고처럼 시선이 얽힌다. 거리낌 없이 복도를 점유하고 일행과 수다를 나누던 사람들과 하필. 눈치 주는 것으로 보였을까. 딱히 너네를 쳐다보려던 건 아니었다는 제스처로 재빨리 눈을 흐린다. 우리의 방향은 얽힌 적이 없었다는 듯. 그리고 언제나 한 발 늦는 아쉬움이 이내 따른다. 굳이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연스러운 웃음 아니면 눈인사면 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어색할라치면 없었던 셈 치는 습성은 눈짓까지 지배하나. 그래 누구 같았으면 아까 가볍게 웃고 인사하고 스몰톡이나 했겠지. 나도 뭐든 자연스럽고 싶다. 인사도 관계도 호의도 감사도 친절도 사랑도 옷차림도 걸음도 미래도 불안도 질투도 분위기와 말씨, 손짓, 몸짓, 생각, 글. 아니 이쯤 하면 타고난 것처럼 능숙하고 싶다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건 좀 염치가 없지 않나. 바라는 건데 염치가 없으면 뭐.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생각 과잉이 급류를 탄 사이 화장실에 들어갈 차례다. 또 쓸데없이 저 끝까지 다녀왔네. 접힌 문을 당겨서 접어 열고 펼쳐서 닫는 손 역시 자연스럽지가 않다.
비행기를 적게 탄 것도 아닌데 바람 소리인지 엔진 소리인지 모를 이 소음은 매번 새삼스럽게 시끄럽다. 화장실 앞에서 땅 판 후로 기분이 좋지 않더니 소음이 시끄럽다. 너무 시끄럽다. 정말 화장실부터였나. 생각해 보면 잠이 깼을 때부터 상쾌치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잠이 깨도록 반복해 맥락을 상실한 세글자 전은 이제 영원히 깜깜하다.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떠오르지도 않는 걸 붙잡자니 슬슬 짜증은 나는데 이어폰을 끼기엔 귀 연골이 욱신거린다. 웬만한 이어폰을 다 튕겨내는 좁은 귓구멍이 견딜 수 있는 시간은 1시간이 다인데 그건 이미 자느라 다 썼다. 어찌 됐든 노래가 필요하다. 긴 비행에서 나에게 최적화된 내밀한 시간은 노이즈 캔슬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인데. 포기하기엔 목적지까지 아직도 여덟 시간이나 멀다.
아쉬운 대로 보급된 헤드셋과 항공사의 플레이리스트라도 즐겨야겠다. 200만 원 가까운 티켓이면 들을만한 게 있겠지. 갑자기 드는 본전 찾기 식의 마음으로 좌석 주머니에 쑤셔 넣은 비닐봉지를 꺼내 헤집는다. 자리에 앉은 지 다섯 시간 만에 흥미를 얻은 비닐봉지는 헤드셋과 덴탈 키트, 슬리퍼까지 내놨다. 오, 제법. 다소 짜증스러웠던 몇 분이 싱겁게 쉽게 흥이 붙는다. 딱딱 손톱 소리를 내며 모니터를 뒤진 끝에 사랑하는 김남준의 솔로 앨범을 찾았다. 이거면 됐다. 여덟 시간이 뭐야, 스무 시간도 버티지. 들키지 않을 애정을 자랑스레 과시하고, 음악을 재생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더는 오지도 않는 잠 대신 생각을 부르면서. 베를린에 닿기 전에 이 여행에 의미를 매기는 일을 완수하리라.
그럴 작정이었으나. 과제를 수행하고자 단단히 먹은 마음이 물 닿은 솜사탕마냥 힘 없이 풀어지고, 눈꺼풀 뒤로 잡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 잡생각. 잡이 붙어야만 존재라도 할 수 있는 생각들. 그놈의 잡 것들이 나를 비행기에 태웠다. 넘치는 생각은 과잉하고, 체한 기분으로 살던 나는 병들었고, 병을 핑계로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호사스럽기 짝이 없지. 해외여행이라니. 처연한 척하기에는 얼마나 좋은 팔자인지, 고작 너 힘든 것은 힘든 것도 아니라는 비아냥이 순식간에 따라붙는다.
역사를 톺아보기도 지긋지긋한 만성적 우울을 병으로 진단받던 순간이 떠오른다. 언젠가 글을 쓴다면 이 장면이 시작이 되리라 직감했던. 언제 주로 그런 생각을 하세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셨나요? 에두른 질문과 정확한 대답에의 요구를 번갈아 던지던 상담사의 친절하고 무해한 표정, 목소리. 언제든 울어도 좋다는, 눈물은 결코 별스럽거나 대단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슬쩍 밀리는 티슈. 타이핑 소리마저 고요해 어색하고 난감한 취조가 서비스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이런 장면에는 이골이 난 것마냥 제삼자의 이야기를 하듯 진술하는 내 모습. 객관적일 필요도 담담할 필요도 없다는 위로 아닌 진단. 담담하려고 드는 건 아니고 관성인데요. 언제나 그랬다. 연약해질 것 같으면 메시아적 관점을 쓰고서 프레임 밖에서 관조하는 것은.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그랬지. 할머니는 어릴 적 나와 동생의 엄마 대신이었다. 맞벌이 부부대신 종일 손녀를 돌보던, 내 식성을 빚은 여리고 다정한. 10대를 온통 의탁한 할머니가 철제 테이블 위에 놓여 수의를 입을 때에도. 엄마, 아빠, 고모, 작은 엄마, 작은 아빠, 할아버지 할 것 없이 모두 눈이 빨갛게 흐느낄 때에도. 내 눈은 얌전하고 조용하게 한 방울씩 눈물을 꺼내며 무아의 세계로 뱉어진 내게 할머니를 중계할 뿐이었다. 그러니 내 병증과 성장 배경, 가족 관계, 스트레스를 읊는 일이 뭐라고. 그런 건 고작이다 고작.
방어기제라고 불러도, 버릇이라고 불러도, 뭐라고 불러도 마땅한 꼴로 한 시간 못 되는 사전 조사에 응하고 드디어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친절하지만 강단을 더한 목소리와 인사를 나누고,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을 받고, 처음 듣는 약은 복용해 본 적 있냐는 질문에 처방받은 적은 없어요 하고. 당신의 우울은 만성적이며 이것은 병입니다. 땅땅. 드디어. 이 진단을 받기 위해 두 시간을 긴장했다니. 허탈하고 슬프고 착잡하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내 우울이 병이라는 것은. 그런데 왜 새롭게 슬퍼지는가. 병 소리는 듣기 싫어서? 내가 정말 언젠가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고? 뭐든 회피하려는 기질은 나의 어떤 모습까지 지배하고 지어내는가. 쓸데없이 발 빠른 잡생각이 이곳저곳을 두드리고 다닌다.
인간관계는 멀쩡한 것 같니? 어제의 그저께의 지난달의 작년의 너는. 이 나이 먹고도 능숙한 인사말 하나 휘두르지 못하는 너는. 멀쩡한 척 일군 하루 끝에 얻은 안도조차 자고 일어나면 허상 취급하던 너는. 그게 병이 아닐 리가. 뭘 몰랐던 것처럼 착잡해하는 거야? 냉소하는 내게 휘둘리다 보면 결국 인정할 수밖에. 그래, 이 정도면 병이지. 병이 아닐 리가.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나중엔 선택지가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 게? 유일하게 매몰찼던 마지막 상담. 나를 기어코 울렸던.
그러나. 다시 한번 튜브처럼 던져진 단어에 눈을 뜬다. 잠든 것이었는지 생각에 빠진 것이었는지 구분되지 않는 경계에서 다시 한번 건져졌다. 쿠구구구. 여전히 기내는 맹렬한 소음으로 고요하고 김남준의 노래는 고작 세 곡이 지났다. 기척 없이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나는.
죽고 싶진 않아. 이 짓도 지겨워. 실은 이제 드디어 정말로. 무서워. 내가 나인 것이 싫은 것이 싫어. 이런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도 불쌍해. 나를 불쌍해하는 내가 싫어. 싫은 내가 불쌍해. 지금껏 병을 회피했음에도, 아니 부러 즐겼음에도, 이것이 나를 다른 사람과 분리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음에도, 자해 같은 말에 실은 누구보다 희열 했음에도, 언젠가 우주 만물과 진리에 데려다줄 것처럼 결코 놓지 않았음에도.
이제는 단순해서 단정한 정신머리로, 차라리 멍청하도록 깨끗한 머리로, 내가 내 살을 파먹지 않고도 지내고 싶은 것 같아. 베를린에 가면, 베를린에서는.
약속의 땅에 가는 것처럼, 맡겨둔 미래를 찾으러 가듯. 여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