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인터뷰 273회, 휘민 시인 편 中
Q.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 일수도> 시인의 말을 보면 ‘삶이 허락한 불안한 휴식 속으로’라는 문장이 앞뒤 맥락을 고려하지 않아도 묘하게 공감이 가는 문구였어요. 쉼에도 항상 불안한 저의 모습 같았죠.
직장인이 되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실감할 수 있을 거예요. 일주일 중 5일을 일하면서도 주말 이틀에도 맘 편히 쉬지 못하고 있는 거죠. 사실 인간은 사고의 흔적이나 다른 사람들의 불행, 죽음과 같은 불안을 통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존재이거든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늘 불안과의 싸움인 거 같아요. 그 불안이라는 감정이 우리 삶을 긴장시키고 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나 싶어요.
군대를 제대하고 현재까지 평일은 학교, 주말은 알바로 일주일을 가득 채우고 있다. 또 틈새 시간을 활용해 관심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하곤 했다. 그렇게 약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평일은 학교와 또 다른 일로 채워졌고, 주말에는 온전히 경제활동을 위해 시간을 쏟아야 했다. 불금이라는 단어는 내게 어울리지 않은 단어였으며, 금요일 저녁은 월요일을 맞이하는 일요일 저녁처럼 느껴졌다. 일을 하면서 주어지는 연차는 개인적인 연례행사를 위해서만 사용해도 부족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흔히 말해, 나는 ‘열정 만수르’였다.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며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내 행동의 이면에는 스스로를 옥죄는 사고가 존재한다.
남들보다 늦게 입학한 대학은 암묵적으로 정해진 사회적 틀에서 나를 뒤처지게 만들었고, 그 틀은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압박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씩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면서 자신의 앞가림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또 그렇지 않은 척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면서 자기 암시를 하며 지냈다. 그런 나를 돌이켜 보니 온전히 내게 휴식시간을 준 기억이 없었다. 휴식이라는 단어는 사치처럼 느껴졌고 온전한 휴식이 어떤 건지, 어떻게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물론 나름대로 휴식이라는 이름으로 방학에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하루 이틀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여행은 무언가 채우고 싶은 불안한 마음에 이끌려 한 선택이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시간에도 오히려 피로가 쌓였다. 휴식은 내게 또 다른 불안함만 양산했다.
'삶이 허락한 불안한 휴식 속으로'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 일수도> 시인의 말 中
그러는 도중 휘민 시인 시집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 일수도>의 시인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항상 불안한 내게 와 닿는 문장이었다. 이 시집을 읽기 시작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나를 더 채우고 싶은 마음과 내 안의 불안과 씨름하며 지내온 날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휘민 시인은 이 ‘불안’이 있기에 우리 삶이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불안을 극복의 개념이 아니라 인정의 개념으로 접근했다. 돌이켜보면, 불안을 없애기 위해 내가 했던 일들은 일시적 해소였을 뿐 또 다른 새로운 불안함을 양산했다. 그는 불안한 휴식을 어쩔 수 없는 삶의 결과로 해석했으며 자신의 삶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그에게 불안함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불안함을 떨치려고 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기 자신과 대화하면서 내면의 불안함을 인정하기. 그가 말하는 휴식은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