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원고지라는 것에 처음 글을 써보았다. 무시무시한 선생님께서 회초리를 드시곤, 원고지에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가는 연습을 시키셨는데 나는 그 시간이 썩 싫지 않았다. 한 칸에 한 글자씩 써내려 가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매일 선생님께서 읽어주시는 단어들을 모아 여러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그 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침표. 글자는 좀 크니까 한 칸에 하나씩, 숫자는 그보다는 좀 작으니까 한 칸에 두 개씩, 그런데 온점은 저렇게 작은데 왜 한 칸에 하나일까? 그것도 왼쪽 아래 모서리에.
하지만 선생님께 그 이유를 여쭤볼 수는 없었다. 무시무시한 회초리를 들고 계셨기 때문. 그렇게 나는 내 기억 속 첫 궁금증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그때부터였을까, 29년간 이어진 '나'라는 이야기 속 작은 에피소드들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 여전히 힘들고 어렵다.
2017년 겨울, 나는 잠시 대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동성로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 지하철역에서 한 대학생을 만났다. 자신을 대구 K대학교 미대생으로 소개한 그 학생은 시민 참여작으로 이루어질 졸업 전시를 위해 시민들을 인터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나에게 잠시 시간이 괜찮은지 물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던 터라 그 눈빛을 쉽게 외면하지 못했다.
동성로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2시간여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동안 나는 그녀의 질문에 맞춰 내 삶의 일부를 들려주었고, 그녀가 권하는 그림 몇 가지를 그려보았다. 비 오는 날의 모습, 그 안에 나, 상상 속 나의 집과 나무, 자화상. 그녀는 자신이 권한 그림들은 미술 심리 치료를 위한 그림들인데, 이를 통해 누군가의 심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심리적 불안감과 스트레스, 성격과 같은 것들을 말이다.
내가 그린 비 오는 날의 모습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과 곳곳에 위치한 물 웅덩이가 눈에 띄었다. 길 위에 우산은 놓여 있으나 그것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산 아래 비를 피하는 사람을 그려 넣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의 해석에 따르면 내리는 비는 스트레스를 의미하지만 정작 우산 아래에 비를 피하는 내가 없어 스트레스를 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말했다.
또 내가 그린 나무 그림은 뿌리와 가지가 완성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줄기와 나뭇잎은 풍성한데 그에 비해 뿌리는 작고 초라했다. 그녀는 다 그려내지 못한 나의 나무를 보곤 하고 싶은 일과 꿈은 많지만 마무리를 다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후 나는, 그녀로부터 두 번째 인터뷰 요청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두 번째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속살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던 걸까. 나는 또다시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3년의 시간 하고도 몇 개월이 더 흐른 지금,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매년 이루고 싶은 일들을 적어내고 다짐하지만 이번엔 다를 수 있을까. 올해는 나의 이야기 속에 정직한 마침표 하나를 남기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갈 수 있을까. 그 작은 점 하나에 온전한 원고지 한 칸을 내어주는 일이 여전히 어렵고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