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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smet Jan 14. 2021

그녀의 흔적들

한 달에 한두 번, 그녀가 우리 집에 방문할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냉장고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지난번에 만들어준 음식은 다 먹었는지, 혹시나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반찬이 남아 상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한다. 그녀의 아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파악하는 엄마 나름의 방법이다. 그녀는 먼 길을 운전하느라 피곤하고 고된 날에도 냉장고 확인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근처 재래시장을 방문해 재료들을 사고 부족한 반찬들을 채워 넣는다.


그녀가 오는 날은 온 집안이 향기로 가득하다. 집안 곳곳 쌓인 먼지와 밀린 빨래를 해결하고 만들어낸 마법 같은 향기. 어지럽혀져 있던 이부자리와 옷장은 정돈되고, 어색하게 걸려있던 빨래들은 가지런히 개어진다. 마치 엄마 없는 동안 혼자 고생했다 안아주는 따뜻한 느낌마저 든다.


지난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나의 집을 방문해 반찬을 만들고 있었고 나는 막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여느 날처럼 이어지는 배고프지 않냐는 인사. 오랜만에 먹는 햇반 아닌 쌀밥, 따뜻한 찌개까지 행복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녀는 나에게 평소 먹지 않는 반찬이 있다면 빨리빨리 정리해야 한다 말했다. 냉장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먹지 않는다면 상하기 전에 버리라고 말이다. 나는 무심한 척 알겠다 말했지만, 앞으로도 나의 냉장고는 쉽게 비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 그 애정 어린 마음을 알고 있기에 나의 냉장고는 쉽게 비워지지 않을 것이다.


또 그녀는 입지 않는 옷들과 쓰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하라 말했다. 특히 어려웠던 시절 나를 위해 사주었던 옷들과 동성로 지하상가에서 샀던 만 원짜리 목도리, 이제는 뒤꿈치가 다 닳아버린 가죽 구두를 말이다. 정작 자신은 시장에서 산 2만 원짜리 옷을 입고, 아들에게 줄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을 말이다. 추운 겨울날, 첫 출근을 위해 상경하는 아들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그녀의 선물. 주머니에 단돈 50만 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갔던 그 날, 애써 미소 지으며 잘 다녀오라 손 흔들던 엄마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또다시 무심한 척 알겠다 답했지만, 힘들었던 그 시절 소중한 그녀의 마음을 앞으로도 버릴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떠나며 냉장고 정리와 옷장을 정리할 것을 당부했다. 엄마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을 열면 들려오는 환한 목소리와 보글보글 소리가 없어 허전하다. "아들 잘 다녀왔어? 배고프지 어서 밥 먹자" 엄마의 목소리가 그립다. 그녀가 다녀간 후 집안 곳곳에는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지런히 정리된 옷가지와 수건들, 정갈하게 만들어진 음식들까지. 하나 둘 나의 손길이 닿으며 흐트러지거나 음식이 사라질 때마다 엄마의 흔적을 지우는 것 같아 허전하다.


홀로 집에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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